리버송이랑 독터 관계로_덷거미덷
- 트위터 헤일럿님 트윗 보고 썼습니다 :)
- 공개 허락 받고 써요!
- 출처 : https://twitter.com/hellooot/status/768004048549060608
Chapter –2 / Chapter 12. 작별 (Farewell)
1. 세상은 늘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2. 사실상 그 누구의 뜻대로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게 맞는 표현일 테지만, 그의 입장에선, 그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란 표현이 알맞을 터였다.
3. 부모도, 삼촌도, 숙모도, 자신의 아이도, 그리고- 제 연인도.
4. 점점 멀어져가는 소음들과,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그는 온갖 힘을 다해 숨을 붙잡았다. 늘 그렇듯 늦을 제 연인에게 또 하나의 죄책감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이 눈에 마지막으로 담는 것이 그 사내이길 바라며.
5. 낮아져가던 소음들이 커진 것도 찰나, 그 어떤 소음보다도 크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6.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7. 애꿎은 신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그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분기탱천한 채 사람들에게 고함을 내지르고 있는 사내를 시야에 담고서야 미소 지었고, 자신의 고글이 날아가 버린 것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8. 웨이드.
9. 작게 뱉은 단어에도 돌아서는 사내의 붉은 옷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방금 전 작동을 마쳐 연기가 나는 차원 이동기는 충전중임을 알리는 주황색 불이 들어온 채였다.
10. 헛소리는 그만 하고 이리로 와요.
11. 아마도 그, 박스들과 토론 중이었을 사내는 머뭇거리면서도 그의 곁으로 와 무릎을 꿇었고,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팔을 간신히 들어 사내의 무릎에 얹은 그는,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나오길 바라며 다시 입을 열었다.
12. 왜 그렇게 어색하게 굴어요? 반갑다는 키스는 이번에도 없어요?
13. 돌아오지 않을 것이 뻔히 아는 대사를 뱉는 목소리는 뻣뻣하게 갈라진 채 흩어졌고, 마스크 안에서 잔뜩 당황하여 굳었을 것이 뻔한 얼굴의 사내가 그에게 되물었다.
14. 키스? 우리가 키스하는 사이였어?
15. 사내는, 자신을 모를 것임이 분명했다.
16. 사랑한다는 말은커녕, 자신의 이름도, 자신의 과거도, 사내와 자신의 추억들조차도 알지 못할 터였고, 마지막 작별 인사조차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임이 뻔했다.
17.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은 그 누구의 뜻대로도 흘러가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유독 자신에게는 짜게 굴곤 했다.
18. 사랑해요, 웨이드.
19. 마지막 숨을 짜내어 뱉은 단어에 묻어나온 물기를 견디지 못한 기도가 무언가를 토해냈고, 황급히 자신의 배로 와 닿는 손을 감싸 쥔 그는, 어떻게든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20. 컴컴하게 죽은 시야에 남은 잔상은 어설프게 사내의 모습을 그려냈고, 차갑게 죽은 손에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기도, 떨림도, 그 사람의 숨소리도, 아무것도.
21. 마지막일 것임이 분명한 숨이 그의 폐를 가득 채웠고, 굳어가기 시작한 혀를 간신히 움직인 그는 입을 열었다.
22. 사랑한다고, 마지막이니까, 그 말만이라도-
23. 죽어버린 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곧이어 몰려온 포근함이 그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며 그는 미소 지었다.
24. 부디, 저 이의 앞에 있는 나날들 끝에 행복함만이 있기를.
25. 부디, 저 이가 모든 여행을 끝냈을 때에는 울음이 없기를.
Chapter –1. / Chapter 11. 마지막 인사.
1. 그가 스파이더맨과의 황당한 만남 뒤에 이동한 곳은 생뚱맞게도 가정집 2층이었다.
2. 박스들이 고장 난 차원 이동기에 대한 욕설을 퍼붓고 있는 와중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아이 방 치고 지나치게 깔끔한 방 상태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밖으로 나섰고, 2층 복도 끝에 서 있는 사내의 모습에 얼른 총을 꺼내 겨눴다.
3. 이봐, 난 지금-
4. 얼른 내려와요. 찻물이 딱 좋게 식었거든요.
5. 불법 침입자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유순하게 말을 건넨 사내는 그가 총을 겨누고 있건 말건 개의치 않은 채로 내려 가버렸고, 박스들만큼이나 당황한 채로 베이지색 천지의 2층을 지나 내려간 그는, 휑한 집 구조에 혀를 차며 거실로 추정되는 곳으로 발을 디뎠다.
6. 돌아왔으면 뽀뽀나 해줘요.
7. 능청맞게 말하며 볼을 내미는 사내에 인상을 찌푸린 데드풀이 총을 총집에 넣었고, 웃음을 터트린 사내가 그에게 찻잔을 건넸다.
8. 당신이 이런 기분이었겠네요.
9. 씁쓸함이 가득담긴 말은 사내가 건넨 찻물만큼이나 썼고, 그가 온갖 욕설을 내뱉고 있는 박스들 사이에서 최대한 침착한 척 찻잔을 커피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 새빨간 색 마스크를 머리에 뒤집어 쓴 사내가 그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10. 이래도, 하기 싫어요?
11. 박스들의 환호 속에서 그가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마스크를 도로 벗은 사내는, 거실 한편에 있는 책장에서 푸른 색 다이어리 두 개를 꺼내왔고, 흰 박스가 자신이 여전히 이 사내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을 짚어주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그가 대뜸 건네진 다이어리를 받으며 사내에게 물었다.
12. 누구...?
13.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메모장에 무언갈 열심히 적기 시작한 사내는, 그의 인내심이 바닥에 이르기 전에 돌아서서 메모장을 건네며 그에게 대답했다.
14. 피터 벤자민 파커. 남들이 이르길 스파이더맨. 그리고 당신 남편 될 사람이요. 나한텐 이미 당신이 남편이지만.
15. 말을 끝낸 뒤, 뒷짐을 진 채 서서 마스크를 뒤집어 쓴 그의 표정 읽기라도 할 듯 그를 빤히 쳐다보던 사내는 이내 포기한 듯 뒷짐을 풀었고, 그가 쪽지를 만지작거리며 소리를 내자 입을 열었다.
16. 다이어리 하나는 당신 꺼고, 나머지 하나는 내 꺼예요. 쪽지는 다음에 만나는 피터 파커에게, 그리고 다이어리는 아주, 아주 어린 피터를 만나면, 그러니까 당신 목차가 더 이상 쓸 자리가 없어지면 주시고요. 아, 내 목차도 당신이 만들어줘야 해요.
17. 근데, 진짜로 뽀뽀는 없어요? 사랑한다는 말은?
18. 얼핏 들으면 장난스럽기만 한 사내의 목소리에 묻어난 씁쓸함이나 슬픔, 그리고 남편이란 말에 혼란스러워진 그가 무어라 대답 할지 몰라 입술만 벙긋거리는 사이 결론을 내린 듯한 사내가 피식 웃었다.
19. 뭐, 내 취향이 그렇게 싼 남자는 아니니까, 됐어요. 그건 우리 벤도 반대할 걸요.
20. 벤?
21. 그의 질문에 슬픈 표정을 감추지 않은 사내의 얼굴이 묘하게 찌그러졌고, 쪽지의 바스락거림에 정신을 차린 듯 비식 웃은 사내가 그에게 말했다.
22. 모르는 게 너무 많죠? 앞으론 어떻게 버티시려나. 이제는 내가 더 모를 텐데.
23. 어휴, 이걸 고치던가 해야지-
24. 안 고칠 거잖아요.
25.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은 채로 나온 말엔 가시가 박혀있었고, 사내의 굳은 표정에 그가 당황한 사이 그에게 성큼 다가온 사내의 팔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26. 사랑해요, 웨이드.
27. 무언가 대답을 바라듯 사내가 말을 끊었지만, 박스들조차도 입을 다문 고요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무의미한 말장난들만이 그의 머릿속을 떠다닐 뿐이었다.
28. 괜찮아요. 정말로. 나중에라도 오늘 일을 후회할 생각은 말아요. 아, 정말로 후회 안 하면 그건 그거대로 속상할 것 같은데.
29. 사내는 또 다시 장난스러운 말로 눈물을 털어냈고,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아 뻥긋거리고 있는 웨이드의 뺨을 감싸 쥔 뒤 말을 이었다.
30. 웨이드, 사랑해요. 당신이 있어줘서, 내 삶이 행복했다는 것, 그것만 알아줘요.
31. 스파이더맨-
32. 피터요.
33. 피터, 난-
34. 삐비빅 거리는 소음이 그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고, 충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푸른 불빛으로 시선을 내렸던 사내가 그를 안아왔다.
35. 타임즈 업. 헤어질 시간인가 봐요. 사랑했어요, 웨이드. 정말, 정말로, 사랑했어요.
Chapter 1. 피터가 화 냄 / Chapter 10. 웨이드에게 뺨 한 대를
1. 가을의 공원은 싸늘했다.
2. 그리고 외투를 껴입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떠날 줄 몰랐다.
3. 푸른 빛 다이어리 중 하나를 펼친 그는 12부터 1까지 적힌 목차 위에 크게 적힌 피터, 라는 단어를 한 번 쓸어본 뒤 다른 다이어리를 펼쳤고, 마찬가지로 웨이드라고 적힌 큰 글씨 아래에 1부터 10까지 적힌 목차에 인상을 찌푸린 후 쪽지를 펼쳤다.
4. 2번 남았어, 피터.
5. 간결하게 적힌 문장은 힘을 담아 눌러쓴 듯 펜 자국이 짙게 남아있었고, 여전히 알 수 없는 일들에 혼란스러워하는 박스들에 응수하던 그는, 옆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는 사내를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6. 피터 파커.
7. 그의 짧은 말에 분노한 듯 일그러지는 눈썹에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가 망설이는 사이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거리가 가까워진 탓에 마주한 얼굴은, 지난번에 본 사내보다 조금 더 젊어보였다.
8. 아, 웨이드 윌슨씨. 여간하면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 당신 얼굴을 날려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는 중이니까요.
9. 이를 악다문 사내의 눈빛이나 목소리는 그가 상대했던 그 어느 스파이더맨보다도 적대적이었고, 쥐어진 주먹들에 사내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가 온도차를 못 견디겠다, 나이는 몇 살이냐 등의 웅얼거리는 말을 들은 듯 사내가 고함을 내질렀다.
10. 이젠 남편 나이도 기억 못해요?
11. 낸들 아냐? 니가 내 상황이 되어 봐야-
12. 벤이 죽고 5년이 지났어요! 벤이 죽고, 5년이, 5년이 지났다고요! 벤이, 저 아이들만큼 자랄 시간만큼이 흘렀어요! 그럼 이제 좀 파악이 되세요?
13. 뭐?
14. 당신하고 내 아들, 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잖아! 왜, 말해주지 않았어? 왜! 알면서도, 왜 말을 해주지 않았냐고! 그, 어린 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무슨 일을 해낼 거라고, 내가 한 말 하나 지키겠다고, 그 5살 밖에 안 먹은 애를 사지로 내몰았어요, 웨이드?
15. 분에 차 내뱉은 말은 그가 알 수 없을 법한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제야 바로 전에 만난 사내의 집에서 봤던, 산 흔적이 보이지 않던 아이 방과 사내가 잠깐 언급했던 그 이름, 벤, 이란 단어 끝에 묻어났던 씁쓸함을 떠올린 그가 넋이 빠진 채로 중얼거렸다.
16. 벤? 우리한테 아들이 있었어? 우리한테?
17. 제발, 웨이드!
18. 미안. 아직 적응 중이라 그래. 그러니까 내가 진짜로 스파이더맨이랑 결혼했단 소리지, 그거?
19. 눈물을 떨궈내지 않은 채로 그의 손에 들린 다이어리에 시선을 옮겼던 사내는, 순식간에 그의 손에서 다이어리들을 빼앗아 갔고, 새하얀 페이지들을 수없이 넘기며 새하얗게 질려갔다.
20. 이것도 가져가.
21. 이게 뭔데요?
22. 너한테 전해주라던데.
23. 접었다 펴길 반복해 꼬깃해진 쪽지를 신경질적으로 펼친 사내의 얼굴은 붉어졌다 이내 제 색을 되찾았고, 쪽지를 다시 접어 코트 주머니에 넣은 사내가 여전히 빨간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24. 일기 좀 잘 적어요. 당신 건 오늘부터 적으면 되겠네. 나 만날 때마다 적으란 소리 안하던가요?
25. 응.
26. 비식 웃은 사내가 벤치에 놓여있던 가방을 뒤적거려 낡아 보이기는 하나, 같은 것으로 보이는 푸른빛 다이어리를 꺼냈고, 그 다이어리를 잡아채려는 그의 손을 피한 뒤 다시 다이어리를 가방에 넣으며 그에게 말했다.
27. 날 봐요. 이런 데까지 들고 오잖아요. 아, 스포일러 조심하고요.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요.
28. 말을 하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다시 미소 지은 사내는 그에게 다이어리들을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29. 우린 늘 시간이 부족했죠. 서로를 사랑한다 말해줄 시간도, 심지어 서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도요. 내 과거는 당신의 미래고, 당신의 과거는 내 미래였으니까. 말해줄 수도 없었고요.
30. 피터-
31. 조금 뜬금없지만, 사랑해요, 웨이드. 잘하면 지금밖에 시간이 없겠죠.
32. 뭐?
33. 그의 맥빠진 되물음에 사내가 무언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차원 이동기의 소음이 그 둘을 갈라놓았고, 피식 웃은 사내의 두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아왔다.
34. 당신이 미처 깨닫기 이전부터 당신을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해왔어요. 보고 싶을 거예요. 아주, 많이.
35. 피터, 난-
36. 이동이 임박해왔음을 알리는 알람 소리가 높아지자 사내의 손이 그의 어깨를 밀쳤고,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가는 와중에 사내의 말이 들려왔다.
37. 당신이 부럽네요, 웨이드.
38. 당신이 가진 미래가, 그리고 시간들이요.
39. 웨이드, 사랑ㅎ-
40. 사내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Chapter 2. 벤과의 마지막 식사 / Chapter 9. 사라진 (벤)을 찾아서.
1. 이번에도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그의 기대와 달리 사내는 보이지 않았고, 혼잡한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백화점 내의 긴 벤치를 찾은 그는 길게 드러누운 채 웨이드라고 적혀있는 다이어리를 펼쳐 목차 장도 넘긴 채 첫 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2. 아빠-
3.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그가 막 첫줄 –피터가 나한테 소리를 질렀다. 뜬금없이 벤이 죽은 지 5년째-에서 넘어갔을 때였고, 다이어리를 접어 허리춤에 있는 파우치에 넣은 그가, 아이에게 거의 다 갔을 때쯤 어디선가 나타난 행인이 아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아빠의 행방을 묻는 것을 본 그가 돌아섰을 때, 방금 전까지 울고 있던 아이가 그에게 달려와 다리에 매달렸다.
4. 아빠!
5. 끝이 없을 것 같은 행인의 잔소리를 견뎌낸 뒤, 애꿎은 자신을 아빠로 지목하여 잔소리를 먹게 만든 아이를 한 팔로 안아든 그는 미아보호소를 찾기 시작했고, 그의 팔에 안긴 아이는 단단하게 고정된 마스크에 심통이 난 표정으로 마스크 끝을 연속해서 당기는 중이었다.
6. 웨이드! 벤!
7. 그가 막 안내 데스크에 도달해 미아보호소 위치를 물으려는 찰나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와 아이와 그의 볼에 입을 맞췄고, 그에게 상황 설명은 고사하고 아이에게 끝없는 잔소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8. 운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내의 붉은 눈을 응시하다 사내가 메고 있는 가방에 시선을 옮긴 그는, 가방 밖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는 다이어리로 손을 뻗었다가, 어느 새 잔소리를 끝마친 사내의 손이 자신의 손을 덮자 슬그머니 손을 거두어야만 했다.
9. 스포일러요, 웨이드.
10. 목차, 목차만 보자. 신박한 아이디어가 없어서 그래. 표절 안 하고 참조만 한다니까. 아니지, 애초에 저거 내가 쓴 거잖아.
11. 네, 네, 목만 아픈 소리 계속 하려면 하시고요. 대신 이건 줄게요!
12. 어딘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다이어리 앞쪽에 부착되어 있던 하얀색 USB를 건넨 사내는 신이 나서 자신의 모험담을 떠들고 있는 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그의 품에서 아이를 빼내 안았고, 어리둥절해 있는 웨이드를 향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13. 벤 일지요. 아빠가 되가지고 애 커가는 것도 모르면 써요? 그치, 벤?
14. 사내의 말에 신이 나 그럼요! 안 되지요,를 외치기 시작한 아이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던 그는 앞서 걷기 시작한 사내의 뒤를 쫓으며 USB를 대충 파우치에 우겨 넣었고, 그가 잘 따라오나 확인이라도 하듯 뒤를 돌아본 사내가 그에게 말했다.
15. 이번에도 그럭저럭 금방 만나서 다행이에요. 이러다가 벤이 당신 얼굴도 까먹겠다고요. 물론 우리 아들이니까 까먹진 않겠지만! 내가 열심히 당신 사진 보여주고 있거든요.
16. 영감님 표정을 지은 아이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그런 아이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그를 빤히 쳐다보던 사내가 재빨리 돌아서며 그에게 물었다.
17. 밥은요?
18. 아직. 사실 적응도 다 안 됐어. 뭐가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다니까.
19. 다이어리는요? 얼마나 썼어요? 또 안 쓰고 있는 건 아니죠?
20. 사뭇 진지한 어조에 땅으로 향했던 시선을 들었던 그는, 사내에게 안겨있는 탓에 고개가 뒤로 향하고 있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그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 사내의 질문에 답했다.
21. 스포일러야.
22. 또 안 쓰고 있네.
23. 추궁보다는 장난기가 더 묻어나는 말에 피식 웃은 그는 재빨리 사내의 팔에서 아이를 안아들었고, 아이는 웃음이 많은 듯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음을 터트렸다.
24. 도사야, 아주.
25. 당신을 알고 지낸 게 몇 년 짼데 그것도 몰라요? 아빠처럼 자라면 안 돼, 벤. 숙제는 바로 바로 끝내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응?
26. 맞아! 숙제는 바로바로, 선생님 말씀은 잘 들어야지, 아빠!
27. 니네 아빠 직업이 선생님이야?
28. 그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아이가 피터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를 향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던 사내는 아이의 고개가 돌아가자마자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꾼 뒤 고개를 내저었다.
29. 아이들 취향에 맞췄을 법한, 입구부터 만화 캐릭터가 가득한 레스토랑에 멈춰선 사내는 익숙한 태도로 아이용 의자를 같이 부탁했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는, 여전히 말갛게 웃으며 자신의 마스크를 당겼다가 구겼다가 벗기려고 갖은 애를 쓰는 아이에게 마스크가 늘어날 정도로 혀를 내밀어보인 뒤 아이가 또 다시 세상이 떠나가라 웃어재끼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가 쎄한 기분에 휩싸여 물었다.
30. 얘 나이가 몇 살이야?
31. 그의 질문에 혀를 찬 사내가 아이의 시선을 따라 자리를 옮겼고, 그를 따라한답시고 혀를 있는 힘껏 내밀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32. 우리 벤, 몇짤?
33. 네짤!
34. 네 살? 네 살이라고? 이 어린 애가 네 살이라고?
35. 주변 사람들이 시선이 다 쏠릴 정도로 소리를 친 탓에 놀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고, 그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간 사내가 알람음을 울리기 시작한 그의 차원 이동기를 눈짓하며 대답했다.
36. 시간 다 됐네요. 이번엔 밥 좀 같이 먹는 줄 알았더니. 아빠, 안녕, 해야지, 벤. 아빠한테 인사도 안 해 줄 거야?
37. 피터, 너한테 말해줄 게 있어. 꼭 말해야 돼. 벤이-
38. 스포일러요, 웨이드. 스포일러 잘못하면 큰 일 난다고요.
39. 아니! 그러니까, 스포일러고 자시고 간에-
40. 아빠!
41. 점점 언성이 커져가는 중에 사내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아왔고, 말을 끊은 그는, 방금 전 운 탓에 눈물에 젖은 다갈색의 눈을 보고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42. 아빠 말은 잘 들어야 착한 어린이지요. 그렇지요?
43. 그럼! 우리 벤이 제일 착하네. 아, 웨이드, 잘 가요.
44. 알람이 점점 높아져가는 가운데 방실거리며 웃던 아이는, 그가 모습을 감추기 직전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그대로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45. 그대로.
Chapter 3. 벤과의 첫 만남 / Chapter 8. 웨이드가 아빠인 걸 깨달은 날.
1. 삶은 고단했다.
2. 특히 뉴욕에서 싱글대디이자 스파이더맨으로 살아가는 그 고충은, 정말이지.
3. 자신이 건재함을 알면서도 매일같이 모습을 드러내는 잡범도 문제였지만 나날이 그 기술이 발전하는 수퍼 빌런을 대할 때면 하루 수십번도 이 짓을 그만둬야지, 하는 그의 생각을 날려버리는 건, 작은 감사 한마디와 그리고-
4. 웨이드!
5.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자신의 남편, 웨이드 윌슨, 딱 둘 뿐이었다.
6. 아, 이제는 벤까지 셋.
7. 회색 후드 집업에 모자까지 눌러쓴 채로 그를 향해 걸어오던 사내는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당황한 기색을 감출 생각조차 없이 황급히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여기는 뉴욕, 그의 도시였고, 그는 오랜만에 만난 남편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8. 이러기예요? 그보다 나, 좋은 소식 있는데!
9. 거미줄로 잡으면 금방일 것을 장난이나 칠 요량으로 느적거리던 그의 귓가로 9시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가 들려왔고 재빨리 거미줄을 쏴 제 연인을 멈춰 세운 그는, 한 팔로 사내를 안아들며 높이 뛰어올랐다.
10. 추가 요금! 안 돼! 일단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제가 모시죠, 남편님.
11. 고건물이 즐비한 시내를 지나 교외 지역으로 향한 뒤 그가 옷을 갈아입는 중에도 사내는 말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 못할 짓을 한 죄인마냥 고개를 숙인 사내의 표정은 죄책감과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런 사내의 표정을 못 본 척 재잘거리던 그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문을 따고 들어가 잔뜩 뿔이 난 표정의 베이비시터에게 추가요금을 후하게 얹어준 후 여전히 멀뚱히 서 있는 사내에게 돌아섰다.
12. 짜란! 웨이드! 누가 있는지 좀 봐요!
13. 아이는 그의 남편을 닮은 듯, 색이 옅은 금발의 머리칼을 가지고 태어났고, 우연찮게도 저를 닮은 갈색 눈을 한 탓에 그는 종종, 어쩌면 그와 내 유전자가 섞인 아이가 아닐까, 라는 희망뿐인 망상을 털어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14. 자신만큼이나 흥분할 거라는 그의 예상과 달리 사내는 알 수 없는 옹알이를 내뱉으며 장난감을 내던진 아이에게 시선을 옮길 뿐이었고, 그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애를 쓰며 여전히 바닥에서 장난감을 신나게 던지고 있는 아이를 안아들었다.
15. 어, 그러니까 얘가 벤이지?
16. 한참 만에 나온 벤, 이란 단어에 화색을 한 그가 아이를 안은 채로 사내에게 다가갔고, 그가 다가간 만큼 거리를 벌린 사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17. 그는, 또 다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아이를 향해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18. 오, 아빠가 우리 벤 이름도 이미 아시네! 벤, 아빠야! 웨이드 아빠, 아빠!
19. 그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듯하던 아이가 부우거리며 침을 뿜었고,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20. 피터.
21. 왜요?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 그럴 거였으면 일찍 왔어야죠. 그럴 거였으면 날짜를 알려주지 말았어야죠!
22. 점점 높아져가는 목소리에 아이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하자 한숨을 내쉰 그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토닥거리기 시작했고, 어느 새 그의 앞으로 다가온 사내가 아이를 안아들며 말했다.
23. 피터.
24. 벤, 아빠 처음 보지? 아빠, 해봐, 아빠.
25. 피터!
26. 왜요!
27. 내가 지난번에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어.
28. 뭔데요? 설마 스포일러 하려는 건 아니죠?
29. 그냥 예언이라고 해두자.
30. 하지 마요, 웨이드. 당신의 말 한 마디에 세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해요. 패러독스라면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아요? 그런 것도 달고 다니면서.
31. 그의 말에 사내가 무언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아이의 손이 사내의 얼굴에 닿았고, 이내 아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32. 요새 잘 웃어요. 얼굴 숨겼다가 보여주는 것도 좋아하고요. 이렇게 하면 되는데, 해볼래요?
33. 그의 질문에, 사내의 고개가 말없이 저어졌고, 기분이 다시 나빠진 그는 잠이 와 칭얼거리기 시작한 아이를 안고 2층으로 향했다. 아이는 금세 잠이 들었고, 미리 챙겨놓은 쇼핑백을 챙겨 그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사내는 익숙한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적다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피식 웃은 그는 사내의 다이어리를 가리키며 웃음을 터트렸다.
34. 안 그래도 안 볼 거거든요? 근데 고작 그것뿐이 안 돼요? 난 이만큼이나 썼구만.
35.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36. 여전히 침통해 보이는 사내에게 쇼핑백을 건넨 그는 어리둥절해 보이는 사내의 얼굴에 혀를 찼고, 쇼핑백의 물건들을 일일이 짚으며 설명했다.
37. 이건 우리 벤이 앨범이고, 이것도 앨범, 이건 일기, 이건 앨범. 이것도 앨범. 나야 옆에서 지켜봤다지만, 당신은 하나도 모를 거 아녜요! 그러다 우리 벤이 다 크고 나서 자기 어렸을 때 물어보면 어쩌려고요?
38. 여전히 장난스러운 그와 달리, 점점 더 얼굴을 굳힌 사내의 손이 쇼핑백 손잡이를 움켜쥐었고, 답답한 침묵 속에서 한숨을 내쉰 그는 미리 사다놓은 와인이나 개봉할 요량으로 부엌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39. 늘 그렇지만 사내의 방문은 갑작스러웠고, 작별 또한 갑작스러웠다.
40. 마치 오늘처럼.
41. 방금 전까지 누군가 있었다는 것이 그의 환상이라도 되는 듯 빈 거실엔 사내가 남긴 흔적이라곤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 텅 빈 공간 속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은 그는, 내내 참고 있던 울음을, 그제야 터트려놓을 수 있었다.
Chapter 4. 병원 직행 /Chapter 7. 웨이드 납치 사건.
1. 아침의 뉴욕 거리는 혼잡했고, 그만큼이나 익숙했다.
2.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 알던 뉴욕일리는 없지만,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방문한 아지트는 너저분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USB를 컴퓨터에 꽂은 그는, 컴퓨터가 데이터를 읽는 동안 앨범이나 읽을 요량으로 손잡이가 엉망이 된 쇼핑백을 열어 1번이라고 적힌 앨범을 펼쳤다.
3. 적혀 있는 메모가 아니었더라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초음파 사진부터, 새빨간 덩어리, 그 것 외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도 않는 신생아 사진, 그리고 다 똑같아 보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입은 옷만 다른 아기 사진들로 가득 찬 사진은 이내 턱받이를 한 사진, 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엉거주춤한 사진들에서 마침내 기어 다니는 사진으로 이내 물건을 짚고 일어선 사진으로 변했고, 아마도 나중에 볼 자신을 위해 덧붙여진 글씨들은 군데 군데 번진 흔적들이 역력했다.
4. 있는 듯 없는 듯 연했던 아이의 머리칼은 앨범이 뒤로 갈수록, 그리고 앨범에 붙은 숫자가 커질수록 점점 눈에 띄게 변했고, 초점이 흐려진 채 사내와 같이 찍힌 아이의 사진들은 늘 빈자리가 상재했다.
5. 마치, 그 누군가가 거기 있기라도 한 듯, 그렇게.
6. 둘 중 하나의 유전자만 섞였을 것이 분명한 아이의 눈은 사내의 눈동자에서 빛을 얻은 듯 다정한 갈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때때로는 웃는 얼굴로, 혹은 우는 얼굴로, 그리고 무언가의 열중한 얼굴들을 한 채 그 앨범 속에 담겨 있었다.
7. 컴퓨터에 꽂힌 USB의 파일을 다 읽었음을 알리는 알람이 뜨자, 빽빽한 글씨들로 가득 찬 일기에서 시선을 뗀 그는, 미친 듯한 용량의 파일 폴더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8. 아마도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그 아이는, 그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웃고 있었고, 울고 있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든 채 화면을 향해 뛰어오기도 했으며, 사내와 같은 머리띠를 한 채 신이나 고함을 치고 있었다.
9.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장난감, 싫어하는 음식, 싫어하는 물건들, 동물들 따위가 가득 써진 일기장엔 다음에 벤을 볼 땐 필히 기억해둬야 할 거라는 경고문구가 새빨간 색으로 적혀 있었고, 그 부질없는 희망들이 묻어나는 글씨에 목이 멘 그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울음을 터트렸다.
10. 마지막까지도 웃고 있던 아이의 모습은 영영 볼 수 없을 터였다.
11. 그 아이가 다시 그의 이름을 부를 일도, 그가 새빨간 색의 경고문구 아래 적혀 있던 숙지 사항을 잊어 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일도, 그 샛노래 보이던 금발이 나중에 무슨 색으로 또 변할 지도, 아이가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될 지도, 아이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들을 기회도, 그에겐 영영 없을 터였다.
12. 한 번 터진 울음은 끝이 없었고, 움직임을 감지 못한 컴퓨터의 화면은 까맣게 점멸해갔다.
13. 쾅!
14. 소음과 함께 들이닥친 청년은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양 팔을 포박한 울버린과 아이언맨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청년의 지시에 따라 그를 납치한 뒤, 차에 태웠고 한참 만에 도착한 곳이 불임클리닉인 것을 본 그가 얼굴을 구기자 생긋 웃은 청년이 그에게 말했다.
15. 핏, 이게 무슨-
16. 당신이 말해준 거예요.
17. 뭘?
18. 당신이 언제 올 지요.
19. 아, 혹시 내가 말해줘야 되나? 난 지금 28살이고 지금은 1월 17일입니다, 남편님.
20. 밝은 표정으로 말하는 청년을 넋이 나간 채로 쳐다보던 그는,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 청년에게 28살인데 자신과 결혼했냐고 물었고, 그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인 청년은, 가까이로 다가온 의사와 간호사에게 그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21. 넵. 이 사람입니다.
22. 이 사람? 나는 왜?
23. 의사와 간호사 손에 이끌려 일어난 그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에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웃은 청년이 다섯 손가락을 펼쳐 하나씩 접으며 그에게 답했다.
24. 비용 문제, 클리어. 예약, 클리어. 대리모, 클리어. 내 정액, 클리어! 그럼 뭐가 남았을까요?
25. 피터!
26. 잘하고 와요, 웨이드! 나와서 우리 애 이름도 같이 정하고요!
27. 손까지 흔들어가며 자신을 배웅하는 청년의 표정에 차마 못하겠다는 말이나, 미래에 대한 말을 꺼내지 못한 그는 그대로 의사와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향했고, 아이를 낳지 말자고 해야 할지, 혹은 아이의 이름에 대해 자신이 먼저 벤이라고 꺼내면 안 되는가에 대해 고민하며 모든 과정을 끝냈을 때에 익숙한 알람음이 그의 귓가에 울렸다.
28. 그의 정액은 미래에 남은 채로.
Chapter 5. 결혼식 / Chapter 6. 결혼식.
1. 그러니까, 이 시간이라고 했다고요! 아, 저기 있다! 웨이드, 일단 이것부터 입어요.
2. 우중충한 회색 옷을 입고 있던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흰 색 턱시도를 받아들었다가 이내 화들짝 놀란 듯 옷을 던져버렸고, 한숨을 내쉰 그는 턱시도를 주워들어 괜히 한 번 털은 뒤 다시 사내에게 건넸다.
3. 자요.
4. 이건, 턱시도잖아!
5. 네. 우리 결혼식이니까요.
6. 결혼? 결혼이라고? 내가? 너랑?
7. 어휴. 이 인간 옷 좀 입게 해줘요, 스칼렛.
8. 한참 전부터 기다린 탓에 인상을 쓰고 있던 스칼렛 위치가 가차 없이 사내의 옷을 벗긴 뒤 턱시도를 입혔고, 옷을 입는 내내 무언가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고 있던 사내가 식장에 입장하기 바로 전 그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9. 혹시 몰라서 미리 말해두는 건데-
10. 스포일러요.
11. 니가 내가 말했댔어.
12. 음, 그럼 괜찮을 것 같네요. 뭔데요?
13. 우리 애는 28살 1월 17일이야. 그보다 오늘은 며칠이냐. 몇 시고.
14. 3월 4일 11시, 아니 10시 반이요. 그보다 애요?
15. 그래! 대리모도 구해놨다며!
16. 스포일러! 당신한테나 일어난 일이지 나한텐 미래에 생길 일-
17. 신랑 신랑 입장!
18. 경쾌하게 울리기 시작한 웨딩마치에 입을 다문 그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를 향해 웃음을 터트린 뒤, 여전히 어색하게 걷고 있는 사내를 재촉해 버진 로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9. 아이라니.
20.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단어에 대한 생각으로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는 동안, 짧게 해달라고 부탁한 주례사는 끝나 있었고, 짓궂은 표정으로 피터를 향해 눈썹을 들어 올린 앤트맨이 입을 열었다.
21. 신랑 신랑 입맞춤!
22. 왠지 모르게 붉어 보이는 얼굴에 미소 지은 그가 사내의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고-
23. 그게 끝이었다.
24. 삐비빅거리는 알람음과 함께 사내가 사라진 자리엔 연기만이 남았고, 텅 빈 자리를 향해 씁쓸하게 웃어 보인 그는 당황해하고 있는 하객들을 향해 돌아서며 애써 웃어보였다.
25. 이 사람이 이렇다니까요, 하하.
Chapter 6. 프로포즈 / Chapter 5. 무언가 중대한 일.
1. 거리는 아름다웠다.
2. 넘쳐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이 주말임을 실감한 그는 하릴없이 저녁거리나 사갈 요량으로 수트를 벗은 채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고, 무언가에 골몰한 듯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에 발소리를 죽인 채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3. 자신이 서 있는 반대쪽 어깨를 톡톡 두들기고 재빨리 의자를 끌어당긴 그는, 어깨 쪽으로 향한 사내의 고개를 보곤, 자신의 장난이 통했음에 만족한 뒤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고, 어딘가 멍해 보이는 사내에게 자신이 들어도 어색할 법한 목소리로 사내를 불렀다.
4. 아저씨.
5. 다이어리는 펼쳐진 채였다.
6. 내 사랑하는 남편이자, 내 사랑하는 아이의 아빠, 피터 벤자민 파커에게.
7. 그의 시선을 느낀 사내가 재빨리 다이어리를 덮었지만, 그는 이미 그 문구를 본 후였고, 애진작에 발견했던 다이어리의 맨 뒷장 문구가 오늘 써진 것임을 깨달은 그는 미처 보지 못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8. 정말 보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번엔 좀 빨리 만났네요. 그보다, 이런 데까지 그런 걸 들고 다녀요?
9. 자신의 질문에 한숨을 내쉬며 다이어리를 파우치에 우겨넣은 사내가 어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대답했다.
10. 당연하지. 그럼 넌 안 들고 다녀? 날 언제 만날 줄 알고?
11. 사내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부터 터질 듯 뛰고 있는 심장에 목소리가 떨릴까 싶어 애써 장난스럽게 웃은 그는, 여전히 어딘가 멍해 보이는 사내와 시선을 맞춘 뒤 부러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12. 넣을 데도 없거든요.
13. 피터 파커 바지에 파우치 하나 달아드려야 겠어요. 이거라도 달아줄까, 핏?
14. 그의 대답이 성공한 듯, 장난스럽게 웃은 사내가 마치 금방이라도 사내의 수트에 달린 파우치를 하나 떼어 달 것처럼 움직였고, 그와 함께 웃으며 팔까지 휘저어 사내의 행동을 막은 그는, 무심결에 내밀었던 왼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춘 뒤 사내의 말을 기다렸다.
15. 왜?
16. 다음에 만나면 뭔가 중대한 할 말이 있다면서요. 다이어리 목차도 좀 그렇고. 그게 뭔데요?
17. 내가?
18. 사내의 어리둥절한 대답에 애써 감춰왔던 왼손을 감싸고 있는 금속이 그의 목이라도 옥 죈 듯 숨이 막혀왔고, 애써 장난스러운 표정을 유지한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19. 넵. 요정 대부님.
20. 요정 대부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순식간에 구겨진 마스크에 침음을 낸 그는 변명하듯 말하며 은근슬쩍 왼손을 테이블 위에 올린 뒤 사내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21. 놀릴 생각 말아요. 당신이 먼저 요정대부라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뭔데요?
22. 자신의 왼손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자 지나치게 크게 들린 숨소리에 움찔한 그는 얼른 시선을 내렸고, 도이건 모이건 사내가 얼른 아무 말이라도 내뱉기만을 기다렸다.
23. 반지는 햇볕을 받아 빛을 내고 있었고,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24. 그래, 지난번에 그렇게 헤어졌는데 그럴 리가, 하지만, 하지만-
25. 끝없는 기대감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온 불길한 생각을 밀어내기 시작했고, 기대감과 함께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어느 새 푸르게 빛을 내고 있는 눈에 숨을 삼켰다.
26. 나랑 결혼해줄래?
27. 네?
28. 분명 기대했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기 그지없는 말에 당황한 그의 되물음에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29. 나랑 결혼해달라고, 피터 벤자민 파커.
30. 입 꼬리는 이미 위로 향한지 오래였고, 사내의 손이 자신의 손을 덮자마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막기 위해 그는 얼른 입을 열었다.
31. 설마, 지금 청혼하는 건 아니죠?
32. 왜, 난 방금 강제로 결혼당하고 오는 길인데.
33. 사뭇 진지한 사내의 표정과 달리 벅차오르기 시작한 행복감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고, 자신을 따라 웃는 사내에게 왼손을 보여주며 말했다.
34. 어쩐지 결혼반지는 따로 못 줄 거라더니. 이런 이야기였나 보네요.
35. 조금은 멍청해 보이는 표정의 사내의 시선은 이제 반지에 박혀 있었고, 그는 손을 내려 비어있는 사내의 손을 감싸 쥐었다.
36. 뭐, 좋아요. 결혼해드리죠! 운 좋은 줄 아시라고요, 웨이드 윌슨씨. 이런 팔팔한 20대 남성을 잡다니!
37. 여전히 손에 시선이 붙박여 있던 사내의 입이 벌어지려는 찰나, 초록불로 빛이 바뀐 차원 이동기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씁쓸한 기분에 휩싸인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손 안에 가둬져 있는 손에 감사하며 사내에게 물었다.
38. 그건 정말로 고칠 생각 없어요?
39. 고쳐질 지도 모르겠는데. 아, 그보다 3월 4일 오전 10시 반.
40. 그만큼이나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 사내는 얼른 적으라는 시늉을 해보였고, 대충 날짜를 한 번 더 읇조려 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사내를 붙잡았다.
41. 그건 또 뭔 헛소리예요? 그보다 왜 고쳐질 지도 모르는데요?
42. 그야 니가 그랬으니까, 피터 파커.
43. 알람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었고, 사내는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으면서도 연신 불안한 표정으로 이동기를 주시할 뿐이었다.
44.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로.
45. 제가요? 아, 저 대학 들어간 건 알아요?
46. 마치 그 둘에게 기회라도 주려는 듯 작동이 더딘 차원 이동기의 알람은 여전히 고음으로 울릴 뿐이었고, 그의 다급한 질문에 눈썹을 치켜뜬 사내가 그에게 되물었다.
47. 대학에?
48. 네! 그것도 이과로요!
49. 그의 대답에 잠시 망설이던 사내가 드디어 말을 고른 듯 입을 열었고, 잘됐네, 란 단순한 대답에 실망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손 안에 가둬진 사내의 손을 움켜쥔 채로 사내를 닦달했다.
50. 왜 거기 갔는지도 안 궁금해요?
51. 내가 물어봐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
52. 그의 질문에 의아한 듯 되물은 사내는 결국 답을 들을 수 없었다.
53. 기계에 조금만 더 같이 있게 해달라는 기도는 닿을 리가 없었고, 또 다시 순식간에 비어버린 자리를 응시하던 그는, 여전히 그의 두 손 사이에 사내의 손이 잡혀있는 것마냥 손을 그러쥔 채로 듣는 이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54. 이젠 당신을 잡아놓고 싶어졌거든요.
55. 대답도, 청자도 없는 그 말을.
Chapter 7. 가정 방문의 날 / Chapter 4. 가정 방문의 날.
1. 그는 결국 청년이 왜 이과로 가기로 했는지 듣지 못했다.
2. 그가 피터 파커가 과학에 능한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전공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고, 그 이유를 왜 자신에게 묻는지도 알지 못했다.
3. 그가, 청년의 선택에 대해 들을 기회는 늘 그렇듯 그 때 뿐이었고, 이미 지나온 길은 청년에게는 앞으로 걸어갈 길이었기에 다시 만날 피터 파커들에게 묻는다고 해서 답이 돌아올 거란 보장 또한 없는 셈이었다.
4. 잠시 생각에 빠진 채 멍하니 서 있던 그는, 뒤늦게 자신이 익숙한 현관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들어가려다 발에 채인 우편물에 멈칫했고, 도착한지 한참은 되어 보이는 운편물을 집어 들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5. 역시나 청년이 챙겨주었던 아이의 앨범이나, 파일은 남아있지 않은 채였다.
6. 텅 빈 컴퓨터 앞에서 잠시 멈칫했던 그는 이제 반 이상 찬 다이어리들의 목차를 채우기 시작했고, 대충 스포일러가 될 듯 말 듯한 선을 잡아 쓰기 위해 애썼다.
7. 익숙한 아지트에서 현금 다발을 찾는 일은 쉬웠고, 우편물엔 아마도 자신이 과거로 가 부탁한 듯한 피터 파커의 정보가 담겨있었다.
8. 청년이 끼고 있던 반지를 찾아 뉴욕 시내를 헤매기를 반나절, 결국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찾아내고야 만 그는 검은 색 케이스를 받고 헤실거릴 청년을 상상하며 택시에 올라탔고, 택시는 이미 반쯤 빈 뉴욕 시내를 빠르게 벗어나고 있었다.
9. 누구세요.
10. 벨이 눌리고 천년이 지난 것만 같은 텀 끝에 들린 목소리는 노부인의 것이었고, 걸쇠가 걸린 채로 열린 문틈의 노부인의 모습에 당황한 그는 어째서 반지를 이중 포장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후회하며 떠듬떠듬 말문을 열었다.
11. 어, 그러니까, 피터, 피터 있나요?
12. 아니, 없는데. 피터 친군가?
13.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에 손에 쥔 케이스를 움켜쥔 그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노부인이 그의 등 뒤를 눈짓했고, 거기엔, 그가 그토록 만나길 고대하던 그 청년이 서 있었다.
14. 핏!
15. 숙모, 이 사람하고 잠깐 이야기 좀 할게요. 괜찮죠?
16. 반가워하는 기색 없이 노부인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끌어당긴 청년은 꺼진 가로등 아래에 가서야 정장을 차려입은 그의 복장을 본 듯 인상을 찌푸렸고,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그가 어물쩍 대고 있을 때 먼저 입을 열었다.
17.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일찍 왔어요? 여긴 어떻게 알았고요?
18. 차마 프로포즈겸 결혼 반지를 미리 주러 왔다고 말할 수 없었던 그가 케이스를 불쑥 내밀었고, 케이스를 받을 때까지도 미심쩍은 얼굴로 있던 청년의 얼굴은, 케이스를 열고 나서는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19. 이렇게 뜬금없이 와서 이런 걸 주면 내가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20. 어?
21. 이렇게 뜬금없이 와서 이런 걸 주면, 내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뭐 이럴 줄 알았냐고요! 참 자비로우시네요, 웨이드 윌슨 선생! 자칭, 제 요정 대부님!
22. 뚜껑이 닫힌 반지 케이스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당황한 그가 반지 케이스를 다시 주워왔을 때 차원 이동기의 불빛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23. 하, 이젠 또 가겠네요!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사니까 남은 보이지도 않고, 자기 생각만 하고 사시는 거겠죠!
24. 핏.
25.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26. 그래, 피터. 아니, 말 끊지 말아줘. 나한텐 시간이 얼마 없어.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넌 아니겠지만, 난 그래, 핏. 제발.
27. 애절한 목소리에 멈칫한 청년의 손에 반지 케이스가 쥐어졌고, 이번엔 내던지지 못하도록 두 손을 꽉 붙잡은 채로 그가 말을 이었다.
28. 그래, 솔직히 나도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거기 있을 거란 거야. 그리고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 네가 나와 함께할 미래를 지키고 싶어졌다는 거, 그게 얼마나 엉망진창이고 절망스러울지는 몰라도, 그냥 네가 나와 함께한 순간들이 지속될 수만 있다면, 그게 바뀌지만 않는다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얼마든지 이기적으로 굴 수도 있고.
29. 알람은 점점 높아져 가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손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울고 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뒤 여전히 분노에 찬 눈을 마주하며 말을 계속했다.
30. 피터, 제발. 시간 낭비 하지 말자. 우리한텐 시간이 없잖아? 다음엔, 그래. 다음엔 더 대단한 걸 들려줄게. 앞으로 계속 함께 있진 못해도, 정말 있어야만 하는 순간들을 놓친다 하더라도, 내가 널 사랑한다는 것만은 부정하지 않았으면 해.
31. 청년의 입술이 달싹이는 걸 본 그는 서둘러 고개를 저어 청년의 말을 막은 뒤 반지 케이스가 쥐어진 손을 청년의 가슴 쪽으로 밀었다.
32. 피터, 제발. 널 사랑해, 피터 파커.
33.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년의 입술이 벌어졌지만, 그는 이번에도 청년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Chapter 8. 피터가 욺 / Chapter 3. 추락.
1. 뉴욕의 밤은 어두운 날이 없었다.
2. 건물들의 불빛,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가게들의 불빛, 차도 위의 불빛, 그리고-
3. 대형 뉴스 스크린들의 불빛.
4. 청년은, 그 대형 스크린이 잘 보이는 옥상 난간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는 채였다.
5. 핏.
6. 그렇게 부르지 마요.
7. 피터.
8. 부르지, 말라고, 했어요.
9. 아니면, 스파이더맨?
10. 혹시나 신변 보호를 위해 단어 선택을 잘못했음을 알려주는가 싶어 세 번이나 호칭을 바꿔 불렀던 그는, 무릎 사이로 머리를 처박는 청년의 행동에 그게 문제가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고, 아무런 대답 없이 웅크린 청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11.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
12. 아무것도요. 아무도 아니고 싶어요.
13. 그의 손이 청년의 등에 닿으려는 찰나 청년과 그를 덮고 있던 빛 무리가 크게 바뀌었고, 그제야 고개를 든 그는, 화려한 화장을 한 앵커 뒤의 화면을 보고 숨을 죽였다.
14. 스파이더맨의 실패.
15. 빌런 처치가 우선이냐, 인명구조가 우선이냐.
16. 당신은 늘 없었어요.
17. 늘 늦었구요.
18. 울음 섞인 목소리는 경찰차나 구급차의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고, 청년의 등에 거의 닿을 뻔 했던 팔을 거둔 그는, 조용히 청년의 말을 기다렸다.
19. 5년이었어요! 자그마치 5년이요!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거미에 물려서 스파이더맨이 되고, 스파이더맨이 되고-
20. 흐느낌에 밀린 말은 뭉그러진 채 사라졌고, 청년보다는 아이 같은 울음소리 끝에 청년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21. - 벤 삼촌이 죽는 그 5년 동안! 당신은 뭘 했죠? 내가 당신을, 그러니까, 내 요정 대부를!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그 날들 동안, 무얼 했냐고요!
22. 가느다랗게 떨리는 어깨에 닿았던 그의 손은 무참히 뿌리쳐졌고, 청년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던 그의 목소리는 청년의 귀에는 닿지 않은 듯 했다.
23. 당신이 준 목차들도 소용이 없었어요. 웨이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요?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일찍 올 수는 없었나요? 아니면 아주 많이 일찍 오던가요! 나한테 그 정도 말해주는 것도 힘들었어요? 스포일러? 세계? 다 좃 까라고 그래요! 오늘, 오늘!
24. 옥상 난간에서 뛰어내리듯 바닥으로 내려온 청년의 키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작았고, 내던져진 마스크 아래에 숨겨져 있던 여린 얼굴은, 눈물에 젖은 채였다.
25. 오늘, 그웬 스테이시가 죽었어요! 그것도- 내, 잘못으로요!
26. 고함과 함께 터져 나온 울음은 청년을 무너뜨렸고, 그는, 그웬 스테이시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자기 자신의 상황에 절망했다.
27. 아, 그웬 스테이시를 모르시는 구나! 당신은 영원히 모를 거야! 영원히 모를 거라고! 당신은, 내 미래만 아니까! 나한텐 쥐뿔 관심도 없으니까! 내가 언제 뭘 했었는지 따윈 중요한 게 아니니까! 제발 그냥 꺼져줘요. 늘 그랬듯, 그 기괴한 소음이랑 썩 꺼져버리라고!
28. 그를 밀친 청년은 허리까지 숙여가며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고, 순순히 청년의 손에 밀려났던 그는 청년에게 조심스레 다가섰다.
29. 피터.
30.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어요!
31. 날아온 주먹은 느렸고, 가냘펐다. 그가 기억하는 모든 스파이더맨들 중에서도 가장.
32. 그가 아주 손쉽게 자신의 주먹을 피하는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청년은 결국 웃다 울음을 터트리며 주저앉았고, 청년에 맞춰 몸을 낮춘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33. 난 사실 아직도 너에 대해선 잘 모르겠어. 수많은 세계를 다니면서 수많은 스파이더맨이나 피터 파커를 만나왔지만, 난 아직도 네가 가장 어려워. 핏, 난, 그러니까 우린, 너랑 난, 늘 현재에 대해 이야기 할 시간도 너무나도 부족해서, 그래서 과거는 물어볼 틈조차 없었거든.
34.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고, 땀에 젖은 청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35. 그래, 어쩌면 내가 가장 모르는 스파이더맨일지도 몰라. 하지만, 핏, 그 수많은 스파이더맨들 중에 너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었어. 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네 고통을 위로는커녕 알아주지도 못해서 미안해. 앞으로도 미안할 일이 수없이도 많아서 더 미안하고. 하지만, 핏, 제발 눈이라도 맞춰주면 안 될까? 나한텐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 너를 알아갈 시간도, 널 볼 수 있는 시간도, 널 이렇게 품에 안을 시간도, 이젠 얼마 남지가 않았어. 네 다이어리의 비어버린 공간들은, 나에겐 이미 지나온 길들이고, 읽어버린 책장들이야. 피터, 제발.
36. 고개가 들려져 드러난 청년의 눈은 여전히 젖어있었고,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은 여전히 붉은 채였다. 그가 잠시 그 모습을 쳐다보는 사이 생각을 마친 듯, 청년이 입을 열었다.
37. 그것도 고백이에요?
38. 응.
39. 그럼 다신 고백하시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최악의 타이밍에, 최악의 고백이었으니까요!
40. 매섭게 외친 청년은 그를 가볍게 밀친 뒤 옥상 너머로 뛰어내렸고, 청년이 추락하듯 떨어지다 다시 올라오는 것까지 확인한 그는, 옥상 한켠에 앉아 다이어리를 꺼냈다.
41. 피터, 라고 써진 다이어리의 목차를 4번까지 완성한 그는, 3번이란 숫자를 두고 고민에 빠졌고, 대형 스크린에 나오는 뉴스를 한참이나 응시하다 사망자 그웬 스테이시가 추락해서 죽었다는 것과 직전까지 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급생 피터 벤자민 파커군은 현재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내용을 보고서야, 다시 펜을 들어 조심스럽게 적었다.
42. 추락.
43. 스포일러를 조심하라는 흰 박스의 말은,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피터가 정말로 미워할 거라는 노란 박스의 말에 묻혔고, 한참을 망설이다 핸드폰을 꺼낸 그는, 원래의 세계에서 자신과 거래하던 정보 거래 업자의 번호를 눌렀다.
44. 피터 벤자민 파커 관련 정보 좀 수집해서 내 아지트로 보내.
45. 통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울리기 시작한 알람에 그래도 바람은 나쁘지 않느냐는 노란 박스의 말은 묻혔고, 이제 단 2번이 남은 여행을 위해 그는 눈을 감았다.
Chapter 9. 요정 대부 나가십니다! / Chapter 2. 요정 대부
1. 묘기에 가깝게 농구공을 던졌다 받으며 아이들을 혼내는 사내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2. 이전에도 그렇지만 이번에도 참 희한한 순간에 나타나는 사람이라고.
3. 자신을 피터 파커의 요정 대부로 소개한 그는 협박에 가까운 말들과 아슬아슬하게 아이들 곁을 스쳐지나가는 농구공으로 애들을 쫓아버렸고, 아이들을 쫓을 때의 무시무시한 표정은 금세 지운 채로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4. 쟤들이 맨날 널 괴롭히니?
5. 윽박을 지를 때와 달리 그에게 건네지는 말들은 다정했고, 목소리는 부드럽기 그지없어서, 그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화상을 입은 듯 보이는 사내의 얼굴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결심한 채 고개를 저었다.
6. 아뇨. 오늘은 저 때문에 농구에 져서 그래요. 근데 이거 플래시 건데.
7. 플래시?
8. 네. 아까 제일 덩치 컸던 금발 남자애요.
9. 그가 건넨 농구공을 받아들더니 사내는 공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고, 곧이어 그랬다간 자기가 곤란해질 거라는 그의 말에 황급히 공을 다시 주워와 그에게 건넸다.
10. 자.
11. 근데요.
12. 응.
13. 아저씨 이름은 뭐예요?
14. 그의 질문에 눈을 크게 떴던 사내는, 대답대신 아직 자기 이름도 모르냐고 반문을 해왔고 그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15. 코드명 데드풀, 본명은 웨이드 윌슨. 너니까 특별히 말해주는 거야.
16. 코드명이요? 무슨 스파이 같은 거예요?
17. 스파이란 말에 코웃음 친 사내는 그와 시선을 맞추려는 듯 쪼그리고 앉아 그의 손에서 다시 농구공을 빼앗아 몇 번 튕기더니 그의 품에 살짝 던졌고, 그가 공을 받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18. 농구 잘하네. 스파이가 아니라 요정 대부라니까. 요정계에서 대부를 하려면 음, 그래! 세례명 같이 코드명을 정해야 되는데, 내 거는 데드풀인 거지.
19. 왜요?
20. 그와 말하는 내내 부드럽게 올라가 있던 입술이 처음으로 호선을 그으며 내려갔고, 그가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는 찰나, 사내의 입술이 벌어졌다.
21. 마치 죽은 놈처럼 머리가 안 돌아가는 바보라는 뜻이야. 내가 일을 잘 못하거든. 그래서 데드, 풀. 제출할 때 스펠링이 틀려서 P로 풀이긴 하지만, 그것까지도 내 이름다운 거지. 응, 그래.
22. 마치 스스로 뭔가를 납득하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의 모습은 어째선지 풀 죽어 보였고, 사내를 웃게 하고 싶단 생각에 일단 사내에게 농구공을 던진 그는, 농구공에 맞은 사내가 그대로 픽, 쓰러지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23. 웨이드라고 부를게요, 요정 대부님.
24. 그와 함께 웃음을 터트렸던 사내는 자신의 배 근처에 굴러와 있는 농구공을 집더니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쪼그리고 앉았고, 그와 눈을 맞추며 개구지게 웃었다.
25. 그래놓고 아저씨라고 부를 거지?
26. 오, 그것도 좋은데요.
27.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씩 웃은 사내는 그의 눈을 피해 땅으로 시선을 박은 채로 농구공을 만지작거렸고, 어색한 침묵에 그가 꼼지락거리기 시작했을 때 입을 열었다.
28. 그럼 그렇게 불러도 괜찮아, 핏. 사실, 네가 뭘 한 대도 괜찮겠지만.
29. 사내가 지난번에 건넸던 다이어리의 뒷면에 써져 있던 문구가 떠오른 그가 장난스레 말을 건네려다 번뜩 들려진 사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입을 다물었고, 농구공이 터져라 움켜잡은 사내가 심각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30. 하지만 저 놈들이 너한테 한 짓은 안 돼. 그건 전혀 괜찮지 않은 짓이라고. 그게 너이건, 다른 사람이건.
31. 네. 그치만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가 안 가는 걸요. 그리고 이해가 안 가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구요.
32. 그럴 땐 그냥 이해하지 않으면 돼.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해할 수 없는 거니까.
33. 다짐이라도 받아내려는 듯 강경한 어조로 말한 사내가 다시 그의 손에 농구공을 쥐어주었고,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34. 그럼, 피터 어린이. 혹시 아이스크림 좋아하나?
35. 네!
36. 좋아, 아이스크림이나 먹자! 그 전에 내가 준 다이어리에 일기는 잘 쓰고 있나?
37. 넵, 요정 대부님!
38. 어디까지 썼지?
39. 짐짓 장난스러운 척 건네지는 말엔 긴장감이 어려 있었고, 사내의 한 손을 잡고 골목을 벗어나던 그는, 잠시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망설였다 사내의 질문에 대답했다.
40. 하나요. 그것뿐이 없는데.
41. 단순하기 그지없는 질문과 대답이었지만,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골목 밖으로 걸어 나오던 사내의 발걸음이 멈춰졌고, 자신이 무언가 잘못 대답했나 싶어 그가 굳어있을 때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어왔다.
42. 이제, 이제 하나라고?
43. 네.
44. 밀린 일기도 없고?
45. 네. 아저씨가...바로 바로 쓰라고...
46.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내의 얼굴은 어느새 눈가가 붉어진 채였고, 말을 맺지 못한 그가 말끝을 흐렸을 때 잡고 있던 손을 도닥인 사내가 그에게 말했다.
47. 착한 어린이네, 응...착한 어린이야...
48. 사내의 슬픈 표정에 덩달아 슬퍼진 그가 무언가 말을 건네려는 찰나 사내의 허리춤에 있던 기계가 녹색 빛을 빛내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멈춰선 사내가 낮게 읊조렸다.
49. 제발.
50. 울음과도 같은 짧은 중얼거림 뒤에 다시 그와 시선을 맞춰 쪼그린 사내가 그의 손에 지폐를 쥐어주었고, 다시 돈을 주려는 그의 손을 만류한 뒤 속삭였다.
51. 핏.
52. 네?
53. 아저씨, 벌써 가세요?
54. 응. 요정계가 요즘 많이 바빠서 그래. 그보다 앞으로 힘든 일이 정말 많을 거야. 하지만 난 널 믿는다, 피터. 네가 그 모든 걸 이겨낼 거라고, 그리고 언제나 바른 길을 선택할 거라고, 늘 믿고 있어.
55. 사내의 말은 아이의 다짐을 받아내려는 어른들의 것과는 다른 확신이 어려 있었고, 저도 모르게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긴 한숨을 내쉰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56. 그냥 덕담이라고 생각해. 요정 대부의 덕담.
57. 아, 그리고-
58. 그리고요?
59. 잠시 말을 끊은 사내는 그에게 장난스레 웃어보였고, 기대감에 찬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코를 당기며 말을 이었다.
60. 아무리 요정 대부라고 해도 두 번 만난 잘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거 사준다고 이렇게-
61. 사내의 말은 맺어지지 못했고, 텅 빈 자리엔, 그림자조차 남지 않았다.
Chapter 10. 작별 (Farewell) / Chapter 1. 일기는 밀리지 맙시다.
1. -따라가면 안 돼.
2. 맺어지지 못했던 말은 듣는 이가 사라진 후에야 끝이 났고, 노을빛 하늘이 펼쳐진 교외 지역의 놀이터 앞에 서 있던 그는, 그 놀이터 그네에 홀로 앉아있는 소년을 발견하곤 조용히 미소 지었다.
3. 마지막 제목들은 이미 정해진 지 오래였다.
4. 이제 한 장만을 남겨놓은 다이어리를 주머니에 넣고 목차가 완성된 채 텅 빈 다이어리를 들고 소년에게 다가간 그는, 긴 그림자에 덮힌 소년의 뒤통수를 한참동안 쳐다보다 조용히 그네를 밀었다.
5. 안녕, 피터.
6. 아이는 말이 없었다.
7. 지금은 힘들겠지만 앞으론 더 힘들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힘 좀 내는 게 좋을 걸! 뒤 돌아보면 떨어진다!
8. 얼핏 들으면 저주 같은 말에 기분이 상한 듯한 소년이 고개를 돌렸고, 당분의 말과 함께 그네를 있는 힘껏 민 그는, 그네가 다시 자기 쪽으로 올 때까지 기다렸다.
9. 절 아세요?
10. 그럼! 알다 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지!
11. 다시 높이 치솟았다 내려오던 그네는 그에게 닿기 전에 멈춰 세워졌고, 그네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온 소년을 쳐다보던 그는 그 멀뚱한 낯에 낮은 웃음을 터트린 뒤 말을 이었다.
12. 하지만 괜찮을 거야. 곧 괜찮이 질 거고, 앞으로도 쭉, 괜찮아 질 거야.
13. 어, 감사합니다?
14. 알면 됐고. 그보다 이거나 받아라.
15. 던지듯 건넨 다이어리를 힘겹게 받아든 아이는 파란색 표지의 다이어리에 당황한 듯 보였고, 그는 자신을 전혀 모르는 듯한 표정에 자신이 맨 처음 만난 피터 파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천천히 깨달아갔다.
16. 내가 아는 친구가 너한테 이걸 줘야 된다더라고.
17. 누군데요, 그게?
18. 여전히 다이어리 표지에서 손을 멈춘 소년이 멀뚱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힘겹게 들려진 고개에 인상을 찌푸린 그는 소년과 시선을 맞춰 쪼그리고 앉은 뒤 소년의 질문에 답했다.
19. 너한테도, 나한테도 아주, 아주, 소중한 사람. 나중에 때가 되면 알지 않을까 싶은데.
20. 그의 대답에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에 담긴 듯 했던 소년이 스스로 무언가 결론을 내린 듯 다시 고개를 들었고 일말의 희망에 가득 찼던 그의 심장은 산산이 조각나야만 했다.
21. 부모님 친구 분이신가요?
22. 그는, 이제 마지막까지 제 할 말을 다했던 피터 파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23. 자신을 사랑한다 말했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서 대하기란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그런 상대에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지 않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24. 아니, 네 친구가 될 사람.
25. 제 친구요?
26. 그래, 그 이상은 스포일러니까 네가 천천히 알아가도록 해, 응?
27. 그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던 소년은 다이어리를 옆구리에 끼워 넣은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그 소리 없는 질문에 답한 건, 차원 이동기의 알람이었다.
28. 피터.
29. 네?
30. 아이는 어렸다.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도 여린 머리칼도, 순진무구해 보이는, 운 흔적이 역력한 눈동자도, 자그마하기만 손도, 발도, 그 모든 게 이 소년은 너무 어리다고 말하고 있었다.
31. 하지만, 그에겐 시간이 얼마 없었고, 그가 가진 선택지 또한 너무나도 한정적이었다.
32. 사랑한다고 말해줄래?
33. 그 또래의 아이들이 대체로 그렇듯 소년 또한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눈을 크게 떴고,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한 그는, 이제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들 속에서 박스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
34. 먼저 입을 연 건, 소년이었다.
35. 왜요?
36. 기계 소음 속에서 질문을 던진 소년은 고민에 빠진 듯 보였고, 여전히 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37. 그 소리를 들은 게 너무 오래 전이어서 말이야. 나한테 그 말을 해줄 사람이 해줘야 되는지를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해야 하나, 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야 하나, 음, 그러니까-
38. 사랑해요.
39. 소년의 목소리는 진중했고, 말과 함께 안겨오는 소년의 품은 따스했다.
40. 피터, 피터, 피터-
41. 끝없이 몰려오는 울음 속에서도 기계는 연속해서 음을 높여가고 있었고, 해는 빠르게 대지를 향해 추락하고 있는 중이었다.
42. -사랑해.
43. 대답을 들을 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44. 그 대답을 들을 이 또한 이제 없을 터였다.
45. 소년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고, 소년이 들을 말도, 소년이 함께할 시간도 이제 시작이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6.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