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라 빌런
익숙한 옥상에 앉아 보슬비를 맞으며 평화로운 뉴욕 거리를 바라보던 그는 요 며칠간 자신을 괴롭히던 이질감이 무엇인지 뒤늦게 깨닫곤 큰 건물이 즐비한 대로변을 지나 가장 으슥한 골목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욱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내리던 빗방울은 어느 새 길거리의 사람들이 우산을 꺼내들 정도로 굵어져 있었고, 막 들어서려던 골목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 건, 처음엔 그렇게 개의치 않던 그가 방수 슈트라도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때쯤이었다.
“데드풀.”
(스위이이이이티이이이이)
[내가 말했지. 언젠간 알아낼 거라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를 맞고 선 사내의 옷은 평소보다 짙은 붉은 빛으로, 사내의 발밑으로 막 젖기 시작한 아스팔트는 뒤덮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손엔-
“우리 합의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적어도 뉴욕에서는 이러지 않기로 했던 거 같은데요?”
“뭐, 그랬었나? 최근에 뇌를 한 번 날릴만한 일이 있어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시큰둥하게 말을 받은 사내는 하던 일을 끝내려는 듯, 평소라면 등에 잘 꽂혀 있을 검을 찾아 등 뒤로 손을 뻗었지만, 그가 사내보다 한 발 빨리 움직인 탓에 거미줄에 엉킨 채 건물 벽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스파이디, 허니. 도대체 퍼니셔랑 데어데블은 냅두면서 내 일에만 이렇게 참견하는 이유 좀 물어봐도 돼?”
“적어도 그 둘은 불쌍한 민간인을 잡아다 그러지는 않는다고요. 그리고 그 둘이더라도 내 앞에서 누굴 죽이는 건 안 돼요.”
“이 새끼가 민간인이라고 누가 그래?”
어깨를 으쓱인 사내는 그제껏 한 손으로 잡고 있던 사람을 그의 발치로 던졌고, 순간 뒤로 물러났던 그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다 얼굴을 찌푸렸다. 온통 피떡이 된 얼굴을 한참 살피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 사람을 들쳐 업었고, 그 순간 빠르게 다가온 사내가 다시 반죽음된 민간인-적어도 그의 의견엔 민간인인-을 빼앗아 들었다.
“자기는 자기 적이 누군지 알아볼 생각도 안 하는구나.”
“그게 누구건 상관없이 병원에 데려갈 거예요.”
“그래, 너라면 그러겠지.”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데드풀의 손에 총이 들린 것도, 그가 그 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도 순식간이었다.
“제발, 좀!”
“그 새끼는 좀 내버려 두고 가지 그래. 슬슬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 같거든. 그 새끼만 해결하면 다시 뒷조사에 착수해야 돼서 말이야.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기어 나오는지 조사도 좀 같이 해봐야 겠어.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으니 이건 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도 아니고.”
“죽여도, 죽여도라니요?”
“그럼 도대체 요 며칠간 네가 바쁘게 안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쟤네가 착하게 살기로 결심이라도 한 줄 알았어? 뭐 범죄자들의 고난주간이라도 된 줄 알았나 보지? 스파이디, 내가 무보수로 이런 수고를 무릅쓰는 건 흔하지 않아. 이게 다 스위티를 위해서라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네가 안다면-”
“무슨 일이 생기건 상관없다고 말한 거 같은데요? 데드풀, 내가 언제 이런 걸 부탁한 적이라도 있던가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그거야!”
(다음 이슈에서 네가 죽으니까 그렇지라고 왜 말을 못하니!)
[스포일러.]
(망할 놈의 스포일러. 그러니까 작가들부터 죽이자니까. 데드풀의 스파이더맨이라도 쓰쟤도. 우리라면 쟬 행복하고 부유한 인간으로 만드는 이야기를 아주 멋지게 쓸 수 있을 거라고.)
“왜 또 말이 없어요?”
“그거야 할 말이 없어서 그런다. 할 말이 없어서.”
뜻밖의 말에 그가 멈칫한 사이 검에 엉킨 거미줄을 풀어낸 데드풀은 그가 공격태세를 취하자 기도 안 찬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침음을 내더니 등에 있는 검집에 검을 꽂곤 한숨을 내쉬었고, 어디서 꺼낸지 모를 우산을 스파이더 맨에게 건넨 후 말했다.
“제발, 내가 실망하는 일만 없게 해줘, 스파이디. 내가 지난 주부터 내 밥벌이도 미루고 한 이 모든 일들이 허사로 돌아가서 니 무덤에 욕설 퍼붓는 일이 없게 해달란 소리야.”
“제 뭐요?”
“못 들었으면 됐어. 여튼 잘 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