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스파이디

스파이디가 없는 뉴욕 끝.

Spideypool 2015. 10. 4. 18:32

- 캐붕, 세계관 시망, 그냥 다 주의


 가을을 맞은 뉴욕의 하늘은 푸르렀다. 마치 맑은 물에 옅은 하늘색 물감을 떨군 것 같은 색깔의 하늘을 따라 시선을 내리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색을 그대로 담은 수평선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었고, 그 수평선에 맞닿은 뉴욕은 마치 하늘 위에 떠서 존재한다는 어느 섬을 옮겨놓은 듯 아름다웠다. 한참동안 바다 쪽으로 향한 마천루 위에 앉아 그 광경을 쳐다보던 피터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조심스럽게 웹슈터를 쏴 자리를 옮겼다.


 토니 스타크가 그를 찾아온 후 피터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뉴욕을 떠나 정체 없이 떠돌았다. 신용카드나 은행계좌는 물론이고 무언가 추적이 될 법한 것은 모조리 피해서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조차 터지지 않은 농장들을 전전하는 그를, 블랙 위도우가 몇 번, 그리고 노바가 몇 번, 아주 나중에서야 캡틴 아메리카가 찾아와 돌아올 것을 권했지만, 피터는 한결 같이 그들의 권유를 거절했고, 종내엔 어렵사리 찾아온 헐크의 권유조차 거절한 그는 언젠가부터 다시 방향을 틀어 뉴욕으로 향했다. 피터가 다시 뉴욕으로 향하고 있단 소식은 쉴드에 소속된 히어로나 어벤져스 일원의 대다수를 환호케 만들었지만, 위성에 찍힌 피터의 단출한 짐을 쳐다보던 토니 스타크는 침음만 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자리를 뜰 따름이었다.


 스파이더맨이 없는 뉴욕은 빠른 속도로 이전의 모습을 되찾아갔고, 사람들은 스파이더맨이 없던 시절 이전보다도 빠른 시각대부터 거리를 비웠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스파이더맨을 피해 뒷골목을 전전하던 빌런이나 하다못해 스파이더맨의 주먹 한 방이면 나가떨어질 건달조차도 그가 사라지고 1년이 지난 시점에는 사람들이 비워준 거리를 점거한 채 야근 때문에, 혹은 운 나쁘게 전철을 놓쳐 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을 재물 삼아 비행을 일삼았고, 뉴욕의 뉴스사들은 모든 소식을 담으면 미어터질 뉴스 타임라인을 위해 사건 사고 보도를 간추리고 또 간추리는 데에 일념했다. 근 반년 동안이나 뉴욕을 비우는 동안 뉴스라고는 동네 누가 결혼을 한다더라, 따위만을 접하던 피터는, 뉴욕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신문 가판대의 신문사별로 다른 헤드라인을 애써 모른 척 하며 비워두었던 집으로 향했고, 생각보다 깨끗한 집 상태에 의문스러워하다 썩은 음식들로 가득할 거라 예상했던 냉장고 안이 온통 유기농 마크가 붙은 식재료들로 가득 찬 걸 보고는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냉장고 문 칸에 채운 계란들로 부족했는지 야채칸마저 가득채운 유기농 계란 박스들에 찍힌 생산일과 유통기한을 살피곤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렁각시를 위해 집을 비워두어야겠다고 결심한 피터는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살피지 않은 뉴욕 정경이나 구경할 요량으로 집을 나선 참이었다. 그러니까, 구경만 할 요량으로.


 “누가 좀 도와줘요!”


 마천루에서 내려와 막 사람들 틈바구니에 합류하려던 피터는 갑작스레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방향을 틀려다가 누가 소리를 지르건 말건 제갈길만 가는 행인들의 모습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대충 여기가 어디가 파악한 피터가 신고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들었을 때쯤엔 모든 상황이 종료된 듯, 골목 밖으로 사내 둘이 시시덕거리며 사람들 틈에 섞여 사라져버렸고, 귀에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의 목소리를 멍하니 듣던 피터에게 그가 서있던 건물 앞에서 구걸하고 있던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개중에 나은 사람인가 보구만.”

 “네?”


 피터의 얼빠진 되물음에 어깨를 으쓱인 사내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는 피터의 핸드폰을 가리켰고, 그제야 여전히 전화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피터가 대충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 피터의 행색을 살핀 사내가 낮게 혀를 찼다.


 “시골에서 막 올라왔나 본데, 모르는 척 하는 게 좋을 거요. 당신도 알겠지만, 스파이더맨이 사라지고 나서는 진짜 말할 수도 없이 엉망이 되어 버렸거든. 일일이 신고하다간 통화료를 감당할 수가 없을 걸? 조나 제임슨은 스파이더맨이 다 작정하고 벌인 일이라고 하고, 누구는 스파이더맨이 있기 전보다 더 엉망이라고 하지만, 다들 모르고 하는 소리지. 여긴 원래 엉망진창이었어. 단지 스파이더맨이 있는 동안 다들 범죄에서 빠르게 멀어지고,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언젠간 스파이더맨이 찾아오겠거니 해서 그렇지. 달라진 거라곤 신고하는 사람이 더 적어졌다는 거 정도겠지. 다들 스파이더맨이 있는 동안 911 번호라도 까먹었나 보지?”


 사내가 말을 하는 사이 그 뒤에 있던 건물 대형 스크린의 화면이 바뀌었고,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클로즈 업 되자 픽 웃는 피터를 쳐다보던 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옮겼다.


 [스파이더맨이 사라진지 1년이 된 오늘, 뉴욕의 거리는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과연 이게 누구 때문일까요? 그 답을 모르신다고요? 과연, 1년째 모습을 감추고 있는 스파이더맨이 그 1년간 무엇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진실된 친절한 이웃이자 유일하게 진실만을 전하는 데일리 뷰글의 이 조나 제임슨이 그 흑막을 밝혀드리죠! 그 흑막은 바로-]

 “스파이더맨이겠지, 안 그래?”


 자조적으로 말한 피터가 그 뒤로 이어지는 뻔하디 뻔한 멘트들을 보는 사이 구급차와 경찰차가 골목 앞에 섰고, 구급차로 실려 가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던 피터도 구급차와 경찰차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거리의 사람들은, 더 이상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하지 않은 채 눈 돌리기 바빴고, 가끔씩 지나치는 골목 끝에는 위협적인 표정의 사람들이 담배인지 마약인지 모를 것 따위를 입에 문 채 늘어져 있었다. 1년 사이에 꽤 많은 것이 바뀐 거리를 걸어가던 피터는, 그 변화 속에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건물 가판대를 지나 모퉁이를 돌았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그가 멈춰 선 건물 모퉁이엔, 어딜 가나 볼 수 있었던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휘황찬란한 문구들을 유리문에 온통 도배를 한 채 위치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앉아 각자의 핸드폰을 쳐다본 채 넋이 나간 사람들 마냥 이따끔씩 커피를 들이마실 뿐이었다.


 “저기요, 여기에 핫도그 집이 하나 있지 않았나요?”


 말을 걸려고 해도 기겁을 하며 피하는 사람들 턱에 몇 번이고 실패했던 피터는, 마침내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 감사하며 질문했고, 잠시 피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사람은 이내, 커피 전문점 앞 모퉁이의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던 핫도그 집이요?”

 “네. 그 왜 늘 빨간 모자 쓰시고-”

 “아, 무슨 말인지 알아요. 파는 건 핫도근데 밥스 버거라고 써 붙여놨던.”

 “네! 어디로 옮기셨나 봐요? 아무리 찾아봐도 없네요.”

 “소식 못 들으셨나 보네요. 스파이더맨이 거기서만 핫도그 사먹기로 유명한 집이었어서 몇몇 스파이더맨 골수팬들이 가끔씩 거기서 죽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 스파이더맨 팬들 때문에 심기 불편했던 빌런들이 뱀! 하고 쳤으면 차라리 나았겠지만, 이 커피 전문점이 영업에 방해된다고 소송 걸어서, 졸딱 망했죠, 뭐. 소송 보상액이 장난 아니었다고 듣긴 했는데, 어땠는지는 모르겠네요. 스파이더맨 팬이신가봐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

 “다들 바보 천치죠, 안 그래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도 아니고, 아니, 외양간을 고칠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투덜거리며 말을 이은 행인은 오랜만에 스파이더맨 팬을 만나서 반가웠다며 그에게 악수를 권했고, 얼결에 악수까지 한 피터는 잠시 커피 전문점 앞 빈자리를 쳐다보다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덧 한적한 거리에 들어선 그는 한 때는 매일같이 지났던 길을 지나 익숙한 입구에 들어섰고, 여전히 팬케이크 한 접시가 놓여있는 묘비 앞에 섰다. 아마도 그보다 앞서서 다녀간 사람이 떠난지 얼마 안 된 듯, 따끈한 팬케이크 위엔 한층 업그레이드 된, 메이플 시럽이 화려하게 뿌려져 있었고,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은 그는 그 언젠가 어느 날처럼 묘비 앞에 털썩 앉아 지나치게 과한 메이플 시럽을 대충 털어내곤 팬케이크를 입에 우겨넣었다.


 “너라면 여기 올 줄 알고 있었지.”

 “워, 토니. 일 년이 지나도록 여기에 죽치고 있었어요?”

 “그럴 리가. 내가 얼마나 바쁜 인산데. 정확히 네가 메인 스트릿을 벗어나는 순간 아머 입고 뛰어왔지. 그래서, 뉴욕 구경은 잘 했어?”

 “모든 게 그대로라는 것 정도는 아주 잘 알겠던데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토니에 놀라 흘린 팬케이크 조각을 바지에서 털어낸 피터가 팬케이크를 권했고, 안될 거 뭐 있냐며 팬케이크를 집어든 토니는 메이플 시럽이 끈적한 팬케이크를 입에 넣곤 감탄했다.


 “이거야, 뭐, 뉴욕 맛집보다도 더 나은데. 오성 호텔 주방장이 울고 가겠어.”

 “설마 이게 매일 여기 놓아져 있던 건 아니죠?”

 “흠. 모르겠는데. 말했잖아. 난 핫플레이스만 간다고.”


 이번엔 물티슈를 꺼내 손을 닦고 있는 토니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피터는 불현 듯 무언가 떠오른 표정으로 토니를 쳐다보았고, 손을 다 닦고 주머니에 넣으려던 토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피터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왜, 또. 알다시피 난 바쁜 사람이라고. 내가 여기 온 건, 네가 뉴욕에 들어섰단 소리를 들어서지, 나라고 매일같이 네 스토킹을 하진 않아. 애초에 여긴 감시 카메라도 없고.”

 “그게 아니라, 고맙다고요.”

 “어…천만에. 근데 뭐가 고맙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제 집이요. 냉장고가 유기농 딱지들 때문에 온통 풀밭처럼 보일 지경이던데요, 뭐.”

 “아, 그거.”


 피터의 설명에도 토니는 어정쩡한 태도로 말을 받았고, 그제야 우렁각시 노릇을 한 게 토니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걸음을 옮기려다 반 이상 남은 팬케이크 접시를 손에 든 피터가 서둘러 웹슈터를 쏘려고 하자 토니가 위로 올라간 손을 붙잡았고, 어느 새 아머를 갖춰 입은 토니를 본 피터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제가 말했잖아요, 이 뉴욕에 ‘친절한’ 이웃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비싼 아머니까 거미줄로 더럽히진 않을게요. 잘 있어요, 토니. 아,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피터는 고갯짓으로 뒤에 있는 묘비를 가리켰고, 피터의 시선을 따라 묘비로 고개를 돌렸던 토니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일 이야기하기에 좋지 않은 날짜죠, 안 그래요?”


 간신히 입 꼬리를 올려 웃은 피터는, 토니에게 더 이상 시간 낭비할 생각이나, 사과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그대로 사라졌다.


 어느 덧 퇴근시간이 가까워진 뉴욕의 거리는 혼잡했다. 오해를 사서 문제를 일으킬 게 두려운 사람들은 죄다 바닥이나 어정쩡한 아래쪽으로 시선을 둔 채 거리를 오갔고, 그 덕에 피터는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건물들 사이를 활강해 낮에 봐두었던, 대형 스크린 앞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건물 아래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팬케이크를 집어먹던 그는, 무심코 뻗은 손에 메이플 시럽으로 끈적거리는 빈 접시 바닥이 닿고 나서야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코스튬을 꺼내 입었고, 다시 건물 모서리에 서서 상체를 한껏 아래로 젖힌 채 형형색색의 머리칼들을 다시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구경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대형 스크린의 화면에 다시 조나 제임슨의 얼굴이 떠올랐고, 1년이 지나도 그 1년 전만큼이나 단정한 콧수염을 보며, 매일 아침 거울에 한껏 얼굴을 갖다 댄 뒤 수염을 정리하였을 조나 제임슨을 떠올리고 그가 웃음을 터트리려는 찰나 그의 뒤에서 뉴스 앵커의 얼굴만큼이나 익숙한, 경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파이디!”

 (스파이이이이이이디, 스파이디가 돌아왔어, 스파이디가 돌아왔다고! 우리의 영웅, 우리의 새끈한 엉덩이가 돌아왔단 말이지!)

 [돌아오긴 개뿔이, 저러다 영영 돌아갈 것 같구만.]

 (뭐?)


 건물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피터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빨간 색과 검은 색 조합의 수트를 확인한 건, 순전히 공기 중에 섞여 풍기는 역한 피 냄새 때문이었고, 생각보다 성한 수트를 한참이나 쳐다보던 피터는 이내 그 피 냄새가 데드풀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 서로 합의본 거 아니었어요? 적어도 뉴욕에서는 당신 일을 맡지 않기로 말이에요.”

 (그거야 스파이디가 스파이디일 때 이야기지. 뭐, 애초에 우리 일 한 것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내가 뭐랬어? 우리가 그런다고 알아주는 놈 하나 없다니까. 그런 멍청한 짓 할 시간에 일이나 더 했으면 우리 사랑스런 핏이 죽을 이유가 없었다고! 망할, 티모시 살 돈조차 없다니!]

 “그건 우리가 미친 듯이 유기농 따위를 사들여서 그런 거야. 그 미친 가격들이라니! 애초에 그 할망구는 어디서 돈이 나서 그런 걸 먹은 거야? 우리 스파이디 등골을 이렇게, 이렇게 쏙쏙 빼먹나? 아니, 뭐, 그것도 아니면 망할 그 가루들 때문이던가. 생각해보니까, 가스가 끊긴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러면 팬케이크도 못 굽잖아? 가스 회사 놈들이랑 단판을 지으러 가야겠구만. 우리 총알이 얼마나 남았지?”

 [그랬다간 가스 회사가 망해서 가스가 못 들어올 걸?]

 “그건 안 되지. 아이언맨 계좌를 털까?”

 (나 할래, 난 찬성!) 

 [리펄서 건에 맞아서 죽고 싶다면야.]

 (오오오오오오, 데스를 보러 가는 거야? 데스의 핫바디를 못 본지도 거즌 1년이라고! 데스, 데스를 보자!)


 피터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잠시 텀을 두었던 데드풀은 피터의 질문에 대답은 않고 계속해서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고, 팔짱을 낀 채 데드풀의 혼잣말을 방관하던 피터는 조나 제임슨의 말이 끝나고, 7시를 알리는 게임 회사 광고가 시작되자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데드풀, 박스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잣말 좀 그만하고 해명이나 좀 해보지 그래요.”


 퉁명스런 피터의 말에도 잠시 무언가 중얼거린 데드풀은 그대로 피터의 앞으로 다가섰고, 피터가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르러 손을 들어 데드풀을 제지하자 데드풀은 어깨를 으쓱인 뒤 대답했다.


 “그거야 여기가 스파이더맨이 있는 뉴욕일 때 이야기고. 최신 뉴스를 못 들었나본데, 이 뉴욕에서 스파이더맨이 없어진 지 1년이야, 허니. 그리고 난-”

 “그리고요?”

 (그냥 보여주자! 그냥 보여주재도!)

 [오, 나라면 안 그럴 텐데.]

 “그래, 맞아! 말보다야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문맥에 맞지 않게 혼잣말을 한 데드풀이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손에 내내 쥐고 있던 주머니를 피터 앞으로 던졌고, 여전히 난간에 올라선 채로 몸을 굽혀 주머니 밖으로 굴러 떨어진 머리를 확인한 피터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치려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는 데드풀을 향해 고함쳤다.


 “웨이드!”

 (아,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우리의 ‘그’ 스파이더맨이 저렇게 섹시하게 우리 이름을 불러주다니.)

 [그럼 다행이네, 곧 죽게 생겼으니까.]

 (상관없지, 뭐. 데스 얼굴 좀 보고 그 짓도 좀 하다가-)

 [내 말은 우리 말고, 쟤 말이야.]

 “아까부터 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웨이드, 미쳤어요? 해명하라니까 대뜸 이런 걸 던지는 건 또 무슨 의미예요?”

 (오, 모르나본데.)

 [내가 뭐랬어? 다 의미 없는 짓이라니까. 우리 불쌍한 핏. 이 멍청이들이 널 죽인 거다.]

 “허니, 넌 진짜로 네 적에 관심이 없구나.”


 한숨을 내쉰 데드풀은 피터가 손을 내젓거나 말거나 난간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머리를 주워들었고, 끈덕해진 피가 조금씩 흘러내리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든 채 나머지 왼손으로 제품 설명이라도 하는 모양새로 머리를 가리킨 채 말하기 시작했다.


 “본명 : 알 수 없음, 코드네임 : 스티커, -나도 이 이름이 존나게 병신 같다는 데에 한 표.- 직업 : 갱스터, 주 범죄 사항 : 강도, 강간, 상해치사 외 잡다. 참고사항으로 팔에 있는 돌고래 모양의 타투. 도합 세 기관에서 현상수배 중, 정부가 내 건 포상금 사항 없음, 어벤져스, 실드에서 각각 내건 포상금 : 10만 달러 되겠습니다.”


 말을 마친 데드풀은 무언가 기대하듯 피터를 쳐다보았지만, 피터는 난간에 버티고 선 채로 못마땅한 표정으로 데드풀을 쳐다보았고, 한참이나 피터의 반응을 살피던 데드풀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 새끼가 마지막 새끼였어, 스파이디.”

 “마지막이라뇨?”

 “그 때 그 불쌍한 할망구를 궁지에 몬 미친 개새끼들 중 마지막 놈이었다고. 넌 애초에 이 새끼들을 잡아다 족칠 생각조차 못했겠지만, 난 아니었거든. 스파이더맨이 없는 뉴욕이라니! 아이러브뉴욕은 망했어! 이젠 없다고!”

 [그거야 니가 공장이랑 디자이너를 불태웠으니까 그런 거고]

 “말이 안 되잖아! 스파이디가 없는데 어떻게 뉴욕을 사랑해!”


 혼잣말을 하다 무언가에 화가 난 듯, 하늘을 향해 팔을 넓게 벌리는 바람에 머리가 멀리 날아가서 뒹굴건 말건 데드풀이 발을 구르며 분노했고, 머리가 날아가 뒹구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피터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데드풀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놈들을 모조리 잡았다고요?”

 “그래! 잡아서 ‘못’ 살게 해줬지. 덤으로 계란이랑 우유 살 돈 도 벌고.”

 “어벤져스는 그걸 내버려뒀고, 말이죠?”

 “걔네는 그 일 하기엔 너무 바빴거든.”

 (그 외계인들에, 하늘에서 내려온 멍청이 같은 블론디에, 참고로 말해두자면 차라리 그 흑발이 내 취향이었어. 거기다 왜 그 로봇들도 있었잖아. 뉴스에서 이이이이렇게 나오던 그 로봇.)

 [내 생각엔 그게 포인트가 아닐 거 같은데.]

 (왜?)

 [쟤 표정 좀 보라고.]

 (마스크를 썼는데 표정이 어떻게 보여?)

 [말이 그렇다는 거지.]

 “표정 생각할 시간에 저 쩌는 허벅지나 좀 보라고. 어떻게 일 년이나 쉬었는데 저럴 수가 있지? 스파이디, 한 번만 만져봐도-”

 “닥쳐요, 데드풀.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하니까.”


 한참이나 데드풀이 정신없이 쏟아내었던 말들을 총 조합해보던 피터는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내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었군요. 토니가 말해줬어요?”

 “뭐가?”

 (이제야 우리 사랑을 깨달았나보네. 이제 키스만 하면 되는 건가? 키스하기 전에 엉덩이부터 잡아도 되냐고 물어봐!)

 “그건 우리 숫총각한테 진도가 너무 빠른 거 같은데, 흐흐흐.”

 “데드풀, 우리 집을 어떻게 알았냐고요.”


 또 다시 혼잣말이 이어지려는 찰나 피터가 재빨리 끼어들었고, 단호한 음성에 정신을 차린 듯 다시 피터와 눈을 맞춘 데드풀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 팬걸들이야 나 같은 쩌는 능력이 없으니까 몰랐을지 몰라도, 세계 제 1의 몸값을 받는 용병, 데드풀님한테 불가능이란 없는 법이지, 에헴.”

 “그럼 그 팬케이크들도 당신이겠네요. 그웬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안 거예요?”

 “그건 좀 설명하기 복잡한데. 그게 상당히 타이미 와이미 한 거라서 말이야. 나랑 차원이동기 구경 갈래, 스파이디? 난 말보다 행동이 우선인 남자라서 말이야.”


 아마도 마스크 아래에서 입을 한껏 벌려 웃은 듯 늘어나는 마스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피터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잔뜩 올라갔던 데드풀의 어깨가 축 쳐졌다.


 (안 가려나 봐. 그냥 이제 집에 가서 저 허벅지나 반찬 삼아 딸이나 치자.)

 “좀만 더 하면 넘어가지 않을까? 그래, 타코로 꼬셔보자, 타코면 될 거야!”

 (오, 타코를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타코벨 같은 쓰레기 말고 우리의 그 ‘타코’ 말이야.)

 “이 날을 위해서 구워온 팬케이크만 수천개가 넘는다고!”

 “웨이드, 도대체 타코랑 팬케이크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하고 내 말 좀 들어요.”


 손을 앞으로 내밀어 흔들어 데드풀을 부른 피터는 자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을 다문 데드풀을 보고 낮게 신음을 냈고, 그 신음소리가 나기 무섭게 또 다시 벌어지려는 데드풀 입가의 마스크를 보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일단, 고마워요. 내가 없는 동안, 아니, 있는 동안에도 그웬이나 메이 숙모 묘비에 찾아와준 거 말이에요. 그리고, 내 집에 와서 청소해주고 냉장고 채워준 것도요.”

 (청소는 청소 업체를 불렀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린 청소에는 재능이 없잖아. 가령, 나중에 스파이디가 그래서 내 헤어드라이어기는 어디 있어요, 하면 어쩔 거냐고?)

 “우리 스파이디는 게이가 아니야, 게이가 아니라고!”

 (그럼 우린 기회가 없겠네.)

 “아니지, 그럼 스파이디더러 헤어드라이어기를 쓰라고 하자!”

 [니들은 뇌가 비어서 참 좋겠다.]

 “……그리고 이제 그럴 필요 없어요, 웨이드.”

 “아, 그렇긴 하겠네. 이젠 돌아왔으니까.”

 “……웨이드, 당신한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여기 있는 게 당신뿐이라 어쩔 수가 없겠네요.”

 (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건 나뿐인가?)

 [이상하긴 아까부터 이상했어, 멍청이들아. 애초에 자살하는 인간 빼고 저 난간에 저렇게 서 있을 인간이 몇이나 되겠어?]

 (SNS에 사진 찍으려고 올라가는 멍청이 수천 수백들이랑, 너랑, 나랑, 쟤랑, 그리고 스파이디도 옛날에 가끔 저렇게 감시하던데?)

 [너랑 나랑, 쟤는 자살하려고 올라갔던 거고.]

 “아, 그렇네.”

 “제발, 좀, 웨이드. 집중 좀 해주면 안 돼요? 당신한텐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나한텐 정말로 중요하단 말이에요. 난 당신처럼 다시 살아날 수 없을 테니까요.”

 “뭐?”

 (WHAAAAAAAAAAAAAAAAAAAAAAAAT?)

 [너 방금 영어로 말했어. 이 글을 읽는 놈들은 한국놈들이라고.]

 (Oh, I forgot that. Sorry, my bad. 뭐어어어어어어어엉어?)


 고함을 친 데드풀이 서둘러 피터를 향해 걸어갔고, 손을 들어 데드풀을 제지시키려던 피터는 데드풀이 멈추지 않자 한쪽 발을 들어 등 뒤로 뻗었다. 그제야 발걸음을 멈춘 데드풀은 못마땅한 듯 팔짱을 낀 채 피터의 말을 기다렸고, 여전히 한쪽 발을 뗀 채 중심을 잡은 피터가 말을 이었다.


 “내 가방에, 돈이 좀 있을 거예요. 그걸로 메이 숙모랑 벤 삼촌 무덤을 옮겨서 내 거랑 같이 뒀으면 좋겠어요.”

 [이젠 우리더러 멍청한 장례업체 일까지 시킬 모양이네. 우리가 너무 친절하게 굴어서 쟤가 잊었나 본데, 잠깐만, 설마 니들 이거까지 할 생각은 아니지? 니들도 일을 안 한지 너무 오래 되가지고 잊었나 본데, 우린 용병이라고! 망할 NGO 단체가 아니라!]

 “조용히 해, 하얀 박스. 나 지금 심각해지고 있으니까.”

 “고마워요, 해준다는 걸로 알게요. 그리고, 그리고- MJ한테는, 그러니까, 데드풀, 지금 뭐하는 거예요?”


 잠자코 말을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데드풀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장전시켜 자신의 머리를 겨냥했고, 당황한 피터는 들고 있던 발을 다시 난간에 붙이곤 두 손을 들어 데드풀을 만류했다.


 “거기서 뛰어내릴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스파이디. 첫째로 아직 퇴근 시간인데다 너도 알다시피 니 뛰어난 신체능력 때문에 제 때에 구급차가 오기라도 하면 다시 살아나는 수가 있어. 그것도 니 신상이 모조리 까발려진 뒤에 말이지. 운이 좋다면 뭐, 스파이더맨 팬 정도로 무마할 수야 있겠지. 둘째로, 이런 대로변에서 죽으면 니 그 엉망인 모습을 사람들이 모조리 보게 될 거고, 세 번째, 니가 이 뉴욕에 들어온 걸 다른 어벤져스도 다 알고 있는 마당에 여기서 뛰어내리면 그 중 하나가 와서 널 구해주지 말란 법도 없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파이디.”


 거기서 말을 끊은 데드풀의 목소리는 대화하는 내내 발랄하던 기운을 잃은 채 가라앉아 있었고, 그답지 않게 진중했다.


 “내 마음이 찢어질 거야.”

 “데드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요. 첫째로, 아무리 저라도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이 뉴욕에 건물 위에서 사람이 떨어진다고 신고할만한 사람이 있기나 하던가요? 적어도 여기서 떨어지면 매일같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절 헐뜯는 조나 제임슨을 조금이나마 엿 먹일 수는 있겠죠. 게다가 이런 퇴근 시간이라면 아무리 가까운 병원에서 구급차를 보낸다고 해도 최소 15분 이상은 걸릴 거예요. 죽기엔 충분한 시간이죠. 둘째는 전혀 상관없네요. 죽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는 산 사람들의 문제니까요. 셋째, 그 인간들은 자기 일 하느라 바쁜 인간들이라 뉴스로나 보게 되겠죠. 그리고 마지막은, 미안하지만, 당신 일 또한 제 알바는 아니죠. 애초에 이렇게 죽지라도 않으면, 다 썩은 시체가 되어서야 발견될 걸요? 이젠 이 세상 어디에도 절 챙겨줄 사람이 없다고요, 웨이드. 단 한 번도 전화하지 않은 MJ를 빼면 모조리 다, 죽었다고요.”

 (어이쿠, 이건 좀 아팠어. 진짜로, 정말로, 아주 많이 아팠다고.)

 [그러니까 내가 누누이 말하잖아. 쓸 데 없는 짓이었어, 웨이드 윌슨. 우리가 잘하는 용병 일이나 하자고. 새로운 핏이나 사잔 말이야.]

 “하지만, 약속했잖아, 스파이디.”

 “네?”

 “적어도 내가 네 눈앞에서 죽었을 때만큼은 날 혼자 두지 않기로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죽으면, 적어도 몇 시간만큼은 살아있어야 될 거란 소리지. 설마 ‘그’ 스파이더맨이 선량한 시민과 한 약속을 저버릴 셈은 아니지?”


 여전히 자신의 머리를 겨눈 총구를 떼지 않은 채로 질문한 데드풀은 자신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동안 말이 없는 피터를 보고는 답을 읽었고, 한숨과 함께 데드풀의 손가락이 움직이려는 것을 본 피터가 재빨리 그를 막았다.


 “웨이드, 나한테 이러지 마요. 당신이 보기에 내 삶에 비극이 부족하던가요? 그걸로는 부족해서, 죽기 전에 보는 게, 메이 숙모가 죽고 나서 날 챙긴 사람의 시체이게 만들려는 거예요?”

 “그럼 거기서 내려오던가.”

 “웨이드, 난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내 첫사랑의 아버지는 나더러 자기 딸을 위험에 빠뜨리지 말아달라고 하고 죽었는데, 걔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알겠죠. 그보다 먼저 죽은 내 삼촌은요? 게다가 그 삼촌의 죽음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된 건데, 그 분 말씀을 따르겠다고, 이 모든 책임을 진 건데, 내게 뭐가 남았느냔 말이에요. 웨이드, 내가 바란 건 단 하나였어요. 모두에게 선하고, 친절하며 친근한 이웃, 그거면 족했단 말이에요. 근데 내가 정말로 얻은 게 뭔지 아세요? 공개적 망신, 음해, 모욕, 야유! 거기다가 이 일을 하는 바람에 얻은 가난들! 그보다 더한 건 죽음이에요, 웨이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그리고 내 죽음! 다른 건 다 상관없어요. 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거리면서 욕하고, 비방하는 것도, 내가 이 마스크를 쓰는 게 제 잘난 영웅심리 충족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건지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공격도 다 상관없다구요. 하지만, 그 죽음들은요? 내 사람들의 죽음들은요? 웨이드, 난 이제 지쳤어요. 이젠 더 이상 견디질 못하겠단 말이에요. 매일같이 뉴스에서 봤던 그 장면들이 떠올라서 미칠 것만 같아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 때 핸드폰이나 들고 자기 포스팅에 눌린 좋아요나 공유수를 기대하며 동영상을 찍고 있던 인간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내가 바란 건, 그저 그저, 나 스스로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그거 하나였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 어떻게 내 삶을 유지할 수 있겠어요, 웨이드. 그러니까 그 총 좀 내려놓고, 내가 그냥 이 망할 거미줄을 끊게 내버려둬요.”


 피터의 간청에도 데드풀의 머리에 겨눠진 총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낮게 신음을 내뱉은 피터가 머리에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바닥에 내팽겨쳤다.


 “이러면 어때요? 난 이제 스파이더맨이 아닌데. 아니면, 뭐 수트도 벗어야 인정해줄 셈인가요?”

 (와, 오늘 스파이디가 우릴 여러번 죽이네. 하지만, 수트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면 일단 벗어보라고 말하는 게 좋겠어.)

 [닥쳐, 노란 박스.]

 (왜? 죽을 땐 죽더라도 좋은 구경이라도 하고 죽어야지. 좋은 구경하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단 소리 몰라?)

 “닥쳐. 아, 너보고 닥치란 건 아니었어. 그래도 네가 정말로 스파이더맨으로서만 약속한 거라면, 정말로 마음이 아플 거야, 피터 벤자민 파커.”


 한숨을 내쉰 데드풀이 남은 한 손으로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는 몸짓을 해보이자 얼굴을 굳힌 피터가 할 말을 잊은 채 입을 뻐끔거렸고, 머리에 겨눈 총을 내리지 않은 채로 몸을 숙여 자신의 발치에 떨어진 마스크를 바닥에 펼친 데드풀이 말을 이었다.


 “그 긴 세월들, 그리고 수많은 차원들을 드나들며 널 스토킹 했는데, 네 본명조차 알아내지 못한다면, 나를 고용하느라 그 돈들을 내는 인간들은 다 병신이겠지, 안 그래?”

 “웨이드, 하지만, 당신은-”

 “이봐, 도대체 뭘 바란 거야? 난 네 집도 알고, 티가 날까봐 그냥 할망구로 지칭했지만, 그 메이 숙모가 너한테 어떤 사람인지도 알아. 심지어 니 첫사랑이랑 악수도 해봤다고. 영화 취향이 꽤나 독특한 처자였어. 말도 꽤 통했고. 내가 걔 무덤에 매일같이 팬케이크를 갖다 바친 건, 단순히 네 첫사랑이어서 뿐만은 아니었어. 그 모든 걸 알고 있는데, 네 본명을 모를까? 내가 그 동안 내색을 안 한 건, 니가 워낙 니 신상 보호에 철저하고 예민하게 굴어서라고. 그리고 난, 피터, 아, 토니는 널 이렇게 부르던데, 핏.”


 몸을 일으킨 데드풀은 어느 새 피터의 한걸음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오른손에 들린 총은 여전히 머리를 겨냥한 채였다.


 “핏, 난 널 그냥 스파이더맨으로서 좋아한 게 아니야. 난 네 그 왕따 당하기 딱 좋은, 너드 같은 피터 파커도 좋아했다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고대하던 첫 데이트조차도 마다하고 달려나가는, 그 소시민 피터 파커 말이야. 그런 나한테 마스크나 이렇게 던지고서 이러면 그 약속은 취소된 거 아니냐고 하다니, 너무 하잖아.”


 정말로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을 팽팽하게 감싸고 있던 마스크가 한껏 일그러지는 모양을 지켜보던 피터는 데드풀이 갑자기 던진 마스크를 받느라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고, 팔짱이 풀려 손이 뻗는 순간을 놓치지 않은 데드풀이 피터의 팔을 잡아당겨 그를 난간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피터가 무어라 항의할 새도 없이 턱짓으로 데드풀이 스크린을 가리켰고, 한참 새로 떠오른 락스타에 대해 보도 하고 있던 대형 스크린의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웬 소년의 얼굴이 대형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프라이 스미스, 열렬한 네 신봉자였지. 언젠가는 자기도 웹슈터를 만들어서 스파이더맨이 되겠다고 떠들고 다니던 녀석이었으니까. 넌 기억 못하겠지만, 네가 쟤네 엄마를 구해준 적이 있었거든. 자, 이 소년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요?”


 멍하니 서 있는 피터의 팔을 놓아준 데드풀이 손가락을 튕겼고, 그와 동시에 바뀐 화면에는 꽃과 화환, 인형이 가득한 묘비가 나타났다.


 “지하에서 고요히 잠드셨습니다. 넌 관심조차 없었겠지만, 네가 없는 동안 여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거든. 위험에 빠진 사람 돕겠다고 10대 소년이 나선 마당에 다들 바쁘단 이유로 착한 사마리아인 노릇을 회피할 정도로 말이지. 다들 누군가가 죽고 나서야 다들 동정심과 의협심이 많은 척 하기 바쁘지. 타자 치는 거야 누군들 못 하겠어. 그리고 다음 손님.”


 이번엔 경찰 제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화면을 메웠고, 데드풀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필립 J. 프라이. 슬럼가에서 큰 놈인데, 어떻게 잘도 스스로 올바르게 큰 보기 드문 청년이지. 너도 몇 번 봤을 걸? 신고가 들어오면 자진해서 제일 먼저 출동하던 놈이니까, 그리고 이 놈도-”


 데드풀의 박수와 함께 화면으로 아무런 화환도, 꽃도 없이 쓸쓸이 서 있는 묘비가 나타나자, 피터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어깨를 으쓱인 데드풀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죽었어. 총이 있기야 하지만, 이 뉴욕에 총 안 가진 빌런들이 몇이나 되겠어, 안 그래? 저 인사는 자기 할 일 하다 죽은 거라 아까 그 소년보다도 조문객이 없지. 더군더나 가족도 없었거든.”

 “데드풀,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아직 끝이 아니야, 스파이디. 네가 정 지루하다면 다 스킵하고 마지막으로 이것만 보여주지, 뭐.”


 데드풀의 손을 잡아채려던 피터는, 그 둘을 덮고 있던 빛 그림자의 색이 바뀌자 하릴 없이 고개를 들었고, 스크린을 가득 메운 얼굴을 알아보곤 낮은 신음을 내었다. 어느 덧 스크린엔, 붉은 색 머리의 여인이 검은 색 학사모를 쓴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가 그러던데, 네가 무언가 큰 결정을 할 때마다 이슈별로 꼭 크게 후회하게 된다고 말이야. 이번엔 어때. 네 절친이 도대체 뭐 때문에 연락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어, 허니? 그냥 무관심이라고? 저 처자는, 성격이 불같았던 탓에 일을 당했지. 이제 뉴욕은 대낮이라고 안심해서는 안 되는 도시가 돼서 말이야. 네가 하도 소식이 없으니까, 뉴욕에 올라왔다가 택시를 못 잡은 탓에 전철을 탔는데, 건달들이 다른 승객한테 추근대는 걸 보고 달려들었던 거지. 그러는 사이에 그 사람은 도망갔고. 다른 놈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피터가 넋을 놓은 채 스크린을 쳐다보는 모양을 흘깃 쳐다본 데드풀이 손가락을 튕겼고, 다시 정규방송으로 돌아온 스크린에서는 여전히 락스타가 노래하고 있었다.


 “스파이디, 난 네가 무책임했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 이 세상에,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일은 없어. 전이라면 내가 이 말을 하는 순간 네가 거미줄로 내 입을 틀어막았겠지만, 진심이야. 많은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데, 해야만 하는 일이란 없고, 할 수 있는 일만이 있을 뿐이라고. 네가 없는 동안 맷 머독은, 그러니까 데어 데빌은 생계조차 포기하고 뉴욕을 뛰어야 했고, 퍼니셔는 돈 좀 만졌지. 그 뿐인줄 알아? 나조차도 언젠가는 네가 이 도시에 돌아올 거라고 믿고, 네가 돌아왔을 때 이 망할 시민들이 절반 이상 죽어나가 있는 사태를 막으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다시 스파이더맨을 하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어. 말했다시피, 내가 좋아한 건, 스파이더맨으로서의 네가 아니라, 피터 파커의 스파이더맨이었으니까. 네가 그 사건으로 얼마나 절망하고, 혼란스러워할지 난 솔직히 모르겠어. 난 하루에도 수십번은 내 머리를 날릴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그런 인간한테 그것까지 이해해달라고 말하진 말아줘, 핏.”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레 말한 데드풀은 여전히 스크린으로 향한 피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생중계로 진행 중인 빌런의 공격을 보곤 낮게 혀를 찼다.


 “다만 내가 아는 건 그거 하나야. 내가 아는 넌, 저런 병신 같은 인간들일지언정, 니가 그 사람들을 돕게 싶어 했고, 그 일을 하면서 무슨 욕을 먹고, 설사 고맙단 말 대신 썩은 토마토 사례를 받더라도 그냥 그 사람들을 돕는 것 자체만으로 만족했다는 것 말이야. 이 말을 하면 분명 욕을 하겠지만, 토니한테 네가 말한 것도 모두 들었어. 메이 숙모가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그렇게 절망했을지 모르겠다고? 젠장, 스파이디.”


 어느 새 총을 내려놓은 데드풀이, 어딘가에서 꺼낸 칼로 자신의 옆구리를 푹 찔렀고, 식겁한 피터가 여전히 옆구리를 찌른 채 칼을 잡고 있는 손을 떼어내려고 하자 다른 손으로 자신의 손에 얹어진 피터의 손을 잡은 데드풀이 말을 이었다.


 “그건 누구나가 똑같아. 지금 내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고 해서 네가 아프기라도 해? 아니면, 내가 이 상처 때문에 당장 죽나? 아니면, 내가 고작 이것 때문에 병원에 갈 사람이냐는 거야. 그런데도 넌 지금 날 말리려고 했잖아. 내가 총으로 내 머리를 쏴도 다시 살아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넌 장장 일 년이나 고민하고 자살하려던 것조차 멈추고, 못 쏘게 했다고. 적어도 내가 아는 피터 파커는 그런 인간이야. 굳이 스파이더맨이라는 이름을 달지 않고도 다른 사람이 괴로운 걸 못 보는, 그런 인간이라고.”


 마스크 아래로 올라간 입꼬리를 쳐다보던 피터는 여전히 스크린 속에서 진행 중인 난장판을 흘깃 쳐다보곤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집어 머리에 쓰고 아래로 뛰어내리려다가 문득 웹슈터를 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입조심 해야지, 피터.”

 “저 없는 사이에 캡틴이랑 친하게 지냈나 봐요, 웨이드.”

 “애초에 네 스토커 말고 누가 네 뉴욕 입성을 알렸다고 생각했어, 그럼?”


 키득거리며 말을 받은 웨이드는 한참이나 허리에 찬 파우치들을 뒤적이다가 무언가를 찾아낸 듯 피터의 손에 쥐어주었고, 손에 쥐어준 게, 이 건물에 올라오기 직전에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웹슈터인 걸 알아챈 피터가 비난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부디 친절하고, 다정하며 친근한 스파이더맨이 되라고, 허니.”

 “고마워요, 웨이드. 이거나 저거나 하도 고마울 게 많아서 뭐부터 말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요.”

 “정 고마우면 엉덩이나 한 번-”

 “손 조심하셔야죠!”


 엉덩이로 향하는 손에 거미줄을 쏜 피터는 데드풀이 욕설을 내뱉자, 입조심하라는 말을 외치곤 그대로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고, 건물 아래로 모습이 사라지기 무섭게 맞은편 건물로 거미줄이 뻗어 올라오는 것을 본 데드풀이 아래에서 환호하는 사람들 소리를 듣다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MJ가 안 죽었다는 소릴 못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