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 전력 60분, 고양이.
- 쓰면서 들은 노래는 마찬가지로 맨 아래에
골목에 놓인 캔버스들의 물감은 그 밑면들을 드러낸 채 갈라져 있었다. 방치되어 있던 그 세월을 대신 말해주려는 듯,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림 위를 덮은 균열조차도 그림을 그린 이의 애정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 듯, 낡은 캔버스 위엔 환한 빛이 드는 창가에 엎드린 고양이가 곤히 단잠에 빠져 있었고, 그 옆에 놓인 화병의 꽃은 물주는 이를 오래 전에 잃은 듯 바싹 메말라 있었다. 그리고, 그 외로워 보이는 캔버스들의 무리 앞에는, 아마도 그 그림의 주인공인 듯한 검은 고양이가 작은 몸뚱이를 잔뜩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골목 가장 안쪽, 그 후미진 곳에서.
묘연.
두 손 안에 들릴 정도로 작은 몸뚱아리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아직, 따스했다. 목에서 덜렁거리는 빨간색 공단 리본은 헤질 대로 헤져서 차라리 떼어내는 것이 더 맞았겠지만, 어째선지 쉽사리 그 리본을 풀어내지 못한 데드풀은 벌써 세 번째 퇴짜를 맞은 뒤부터는 뉴욕의 밤거리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병이 걸린 게 틀림없어 보이는 고양이를 품에 안은, 수상쩍어 보이는 거구의 사내를 태워주는 택시는 드물었고, 택시를 잡는데 10분을 허비한 데드풀은 점차 느려지는 심장 박동에 입술을 짓씹으며 이미 근육이 터질 듯이 힘을 주어 달리고 있는 다리를 타박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데드풀!”
“스파이디! 나 지금 바쁘니까 우리 재회의 키스는 다음에 하자!”
어디선가 나타난 스파이더맨에게 대충 지른 고함으로 인사를 대체한 데드풀은 재빨리 뉴욕 시내에 있는 걸로 검색되던 네 번째 병원에 가는 가장 빠른 길을 계산해내기 위해 다시 입을 다물었고, 평소와 달리 자신을 아는 체도 않고 달려가는 데드풀에 의아해진 스파이더맨의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무슨 일이예요? 어딜 그렇게 바쁘게- 오, 이런.”
(스파이디가 묻잖아, 병신아.)
“그럴 시간 없어, 병신아.”
여전히 앞을 향해 직진하고 있는 데드풀의 앞을 스파이더맨이 가로막았고, 얼결에 총으로 응수하려던 데드풀은 자신이 거의 다 죽어가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짜증 섞인 신음소리를 내며 스파이더맨을 비껴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데드풀, 데드풀! 웨이드 윌슨!”
“제발, 좀! 이 아기 고양이가 죽어가고 있다고!”
[엄밀히 말하면 ‘아기’ 고양이는 아니지.]
(하지만 ‘아기’라는 단어를 붙이면 다 귀여워 보이잖아.)
[그렇다고 쟤가 아기가 되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농담으로라도 저 몰꼴이 귀엽다고 할 수 있겠어? 털은 다 빠져서 벌레 먹은 나뭇잎 꼬라지고 우리가 그렇게 불러대도 대답 한 번 없었다고.]
“제발, 좀! 스파이디! 이럴 시간이 없다고!”
또 다시 스파이더맨이 앞을 가로막자 데드풀이 신경질적으로 고양이를 한 손에 안으며 총을 꺼내들었고, 재빨리 두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밝힌 스파이더맨이 고양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병원은 저쪽이에요. 모르는 것 같아서-”
“거기서 더러운 옷을 입은 괴짜는 믿을 수가 없대! 거기가 세번째였어!”
그제야 데드풀의 옷차림을 다시 살펴본 스파이더맨은 데드풀의 수트가 어디서 전투라도 치르고 온 듯 피범벅에 찢어져 있다는 걸 깨닫곤 한숨을 내쉬며 데드풀의 손에서 고양이를 빼앗아 들었고, 데드풀이 당황한 틈을 타 재빨리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외쳤다.
“그러고 가니까 그렇죠! 하지만 뉴욕시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라면 다를 테니까, 이 일은 나한테 맡겨두라고요. 동물보호협회한테 털릴 준비도 하시고요!”
공중으로 뛰어오른 스파이더맨은 데드풀이 세 번째로 방문했던 동물병원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졸지에 박동과 함께 전해져오던 온기 대신에 총기의 차가운 냉기만 느껴지는 손을 잠시 쳐다보던 데드풀은, 잠시 뒤 고개를 떨군 채 스파이더맨이 사라진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데드풀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는 그 골목 끝에 겹겹이 쌓여있는 캔버스들 앞에 이르러서 멈춰 섰다. 희미한 불빛에 비춰진 캔버스 속 고양이는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고양이라니.”
(동물구조라니. 우리보단 스파이더맨이 더 걸맞지.)
“그래도 병원 정도는 데려갈 수 있을 줄 알았어. 돈도 있었어. 그것도 현금으로.”
(네가 뭘 잊었나 본데, 우린 용병이야. 살리는 것보단 죽이는 게 더 걸맞는 사람들이라고.)
노란 박스의 일침에 몇 번이고 달싹이던 데드풀의 입술은 결국 꽉 다물린 채 다시 움직이지 않았고, 그제껏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다시 제자리에 넣은 데드풀은 파우치를 뒤져 종이와 크레용을 꺼내 무어라 적은 뒤 고양이 그림에 붙이곤 자리를 떴다.
* * *
뉴욕의 봄은 소란스러웠고, 한껏 들떠 있었지만 밤마다 고양이 울음소리에 잠자리를 설친 피터는 그렇지 못했고, 일요일 아침부터 동물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시점부터는 더더욱 편치 못했다.
예상치 못한 만남 뒤에 당연히 고양이를 핑계로 들러붙을 거라 생각했던 데드풀은 며칠째 잠수를 타고 있는 상태였고, 데드풀이 비용을 지불할 거라 여겼던 병원비가 나날이 쌓여가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언가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토니. 제발. 도대체 이거 어떻게 바꾸는 거예요?”
[니 폰 보안 설정을 탓해. 그러니까 우리 회사 핸드폰을 쓰라니까.]
“그럼 더 뚫기 쉬운 거 아니고요?”
[그거야 써보고 판단하시고요, 고객님. 그것보다 니가 재정난에 이르렀다는 소문을 입수해서 말이야. 대관절 우리 자린고비 스파이더맨 선생이 무슨 일로 재정난에 이르렀을까 싶어서 말이야. 이 아빠는 아들 걱정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요. 최근엔 이렇다 할 전투도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토니의 말에 한숨부터 내쉰 피터가 막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찰나 그가 걷고 있던 인도 바로 옆으로 검은 색 차가 멈춰서며 차 창문이 내려갔고 장난스레 웃고 있는 토니에게 피터가 눈썹을 치켜뜨자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피터를 향해 손가락으로 귀를 툭툭 친 토니가 피터에게 차에 타라는 시늉을 한 뒤 옆자리를 내주었다.
“어쩔 때 보면 당신이 사람 놀래키는 재주에선 데드풀을 앞서는 거 같아요.”
“그냥 사고뭉치 아들을 둔 아빠의 보험 정도로 해두자. 그보다 진짜 무슨 일이야?”
토니의 걱정 어린 질문에 무심코 입을 열려던 피터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굳혔고 피식 웃은 토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히어로들도 사람인지라 재정난이 심해지면 나쁜 길로 빠질 수가 있거든-”
“그래서 실드 국장님이 히어로 재정까지 감찰하신다?”
“감찰은 너무했고 복지 혜택이 뛰어나다고만 해두자고. 그래서, 무슨 일이야, 스파이디? 동물병원에 쓴 이 미친 듯한 금액은 뭐냔 말이지. 내가 알기론 너도 개가 없고 메이 부인도 애완동물이라곤 없는데 말이지. 너 혹시-”
“고양입니다. 그리고 그 혹시가 아니라 이게 다 데드풀 때문이라고요.”
“데드풀?”
예상치 못한 원인에 토니가 눈을 크게 뜨자 고개를 내저은 피터가 병원 위치를 기사에게 알려준 뒤 차를 출발시켰고,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 하자 무언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 토니가 피터의 손에 쥐어져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박살을 낸 뒤 기계 잔해에서 칩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래서 이런 게 있었던 거구만.”
“이게……?”
“버그라고 하고 쉽게 풀어 말하자면 감청장치 정도?”
피터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본 토니가 피터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보인 뒤 칩을 발로 밟아 부셔버렸고, 바로 그 때 차가 멈춰 섰다.
“당사자한테 물어보자고. 고양이 맡기고 튄 이유랑 그래놓고 감청장치를 심어놓은 이유까지 말이지.”
“데드풀요? 하지만-”
“안녕하신가, 데드풀 선생. 아니지, 그 모습으론, 웨이드 윌슨씨?”
태평한 얼굴로 피터를 따라 차에서 내린 토니가 피터 등 뒤를 향해 턱짓을 해보였고, 고개를 돌린 피터의 앞엔 모자를 눌러쓰고 후드티의 모자, 후드집업의 모자에 이어 패딩의 모자까지 눌러쓴 데드풀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데드풀!”
“쉿. 스파이디. 내 이야기는 나중에 들으면 안 될까? 너도 알다시피 네 통화를 들어서, 나도, 나도……알게 돼서 말이야…….”
겹쳐 쓴 모자 그늘들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데드풀의 목소리가 젖어있다는 걸 알아챈 피터가 입을 굳게 다문 채 동물 병원 입구로 들어섰고, 그 둘을 조용히 쳐다보던 토니는 다시 차에 올라탄 뒤 사라졌다.
“……해서, 이게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수의사가 피터 앞으로 와 설명하는 내내 거리를 벌린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데드풀은 수의사의 안내에 따라 피터가 움직이자 발을 떼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냐는 리셉의 말에 어물거렸고 보다 못한 피터가 수의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후 데드풀의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이 사람이 최초 발견자예요. 스파이더맨에게 고양이를 맡긴 사람이요. 말씀드렸다시피 전 스파이더맨 대신 병원 업무 보기로 한 사람이고요.”
비용을 지불할 때 쩔쩔매는 거 외엔 친절하던 청년의 날카로운 어조에 놀란 리셉이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고 데드풀을 잡아끌고 입원실로 들어선 피터는, 철제 입원장 안 구석에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에게로 빠르게 걸어갔다.
마지막일 것 같다는 수의사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듯, 고양이가 숨을 낼 때마다 들썩이던 등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달싹이고 있었고, 병원 사람들이 가져다 놓은 듯한 이불더미를 피해 차가운 벽에 기댄 고양이는 그 어느 때보다 작아보였다. 입을 벌린 채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는 고양이와 거리를 둔 채 한참이고 서 있던 데드풀이 조용히 케이지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고, 데드풀의 돌발 행동에 놀란 피터가 수의사를 쳐다보았지만 수의사 또한 어깨를 으쓱일 뿐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자 피터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그림을 바닥에 내려놓은 데드풀이 다 헤진 빨간 색 리본을 고양이 목에 두른 뒤 그림 곁에 내려놓은 뒤였다. 잠시 반응이 없는 듯하던 고양이가 힘겹게 숨을 내쉰 뒤 그림에 얼굴을 기대는 걸 본 피터가 할 말을 잃고 서 있었고, 조심스레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은 데드풀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엔 그냥 우연이었어.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비나 피하려고 들어간 골목이었거든. 근데 웬 고양이가 울고 있는 거지. 그래서 다가갔더니 성을 내더라고. 그 땐 이 리본도 이렇게 헤지진 않았는데.”
조금 비뚤어진 리본을 고쳐 맨 데드풀이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는 등에 닿았던 손을 뗀 뒤 말을 이었다.
“길고양일까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깨끗하고 리본도 매져 있어서 주인이 있겠거니 했어. 그냥 별난 놈이구나 했지. 그냥 혹시나 해서 그 다음날 갔는데 그 자리에 그대로 있더라고. 그래서 그 다음날 갔는데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고양이의 호흡은 이제 거즌 멈춘 거나 다름없어 보였고, 말없이 서 있던 수의사가 자리를 떴다.
“그제야 그 고양이가 지키고 서 있던 그림들을 봤고, 어느 병신이 고양이를 버렸구나, 이 놈도 좀 있으면 다른 놈들이 그러듯 지 자리를 찾아 떠나겠지 했는데, 한 달 뒤에도 거기에 그대로 있더라고. 똑같은 자리에, 똑같이. 달라진 건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는 거 정도? 그 정도 기다렸으면 됐을 텐데, 올 리가 없는 사람을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거야. 들리 리가 없는 발자국 소리나 기대하면서 멍청하게. 너무 멍청하게.”
그림 속의 고양이는 여전히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따스한 햇살을 받은 채 잠들어 있었고 그 그림에 기댄 고양이가 모든 움직임을 멈추자 고양이와 그림을 품에 든 데드풀이 피식 웃었다.
“길 가던 사람조차 올 리 없는 그 구석진 곳에서. 버린 사람만 알 것 같은 그 후미진 골목에서 말이야. 누군가는 말을 해줬어야 하잖아, 안 그래? 니가 기다리는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람은 영영 떠났다, 그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다, 그러니까 너도 네 인생을, 아니지. 얜 고양이니까 묘생인가? 난 가방끈이 짧아서 모르겠네. 여튼 누군가는 말을 해줬어야 했어. 니가 하고 있는 건 병신 짓이고 니 기다림은 모두 헛된 거라고. 아무도, 적어도 니가 기다리는 그 사람은 그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그걸, 내가 해줬어야 했어. 이 멍청한 새끼가 헛된 기다림에 자기한테 남은 모든 시간을 다 허비하기 전에. 아니, 아니면 적어도 나보다 더 정상적인 사람을 찾아서 병원에 데려가 달라 부탁했어야 했어. 나같이 고양이 하나 못 구하는, 동물병원 하나 입원 못 시키는 병신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사람한테 말이야. 바로 너 같은.”
모자 아래 그림자는 너무 짙어서 데드풀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피터가 뜻밖의 말들에 할 말을 찾지 못해 어물거리는 사이 고양이를 품에 껴안은 채 그림을 옆구리에 낀 데드풀이 피터에게 말했다.
“역시 뉴욕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은 달라, 안 그래? 고마워, 스파이디. 마지막이라도 내가 얘한테 무얼 해줄 수 있게 해줘서. 돈은 스타크 타워로 보냈어. 남은 돈은 가져. 돌려줄 필요는 없어. 난 아무래도 이 녀석을 묻어주고 나면 다 잊게 될 거 같으니까 니가 돌려준다고 해도 아마 왜 주는지 모를 거야.”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피터와 눈을 마주친 데드풀이 빙긋 웃었고, 엉망인 그의 얼굴을 본 피터가 입을 열자 고개를 저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니 비밀 신상. 그건 지켜줘야지. 네가 인정하든 안 하든, 난 네 오랜 친구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이 세상에 이런 놈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치?”
어깨를 으쓱인 데드풀은 그대로 병원을 걸어 나가 버렸고, 그를 위로할 타이밍도, 붙잡을 타이밍도 놓친 피터가 서둘러 병원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데드풀은 이미 거리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