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긴 침묵 끝에 온 말은 귀를 통해 흘러들어와 입안을 온통 씁쓸한 맛으로 물들인 후에야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다. 그 언젠가 저가 아무리 부정을 해도 사랑을 기어코 내뱉고야 말던 입술은 이제, 그 언젠가처럼, 말을 막으려는 그의 모든 노력을 무시한 채 기어코 이별의 말을 뱉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저 혀를, 입술을, 모두 도려내면 말을 못하지 않을까, 란 속삭임이 그의 머릿속으로 울려 퍼졌다. 그 속삭임에 혹해 잠시나마 가능성을 헤아려보던 그는, 제 앞에 서서 그냥 봐도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있는 상대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다. 제 연인이었던, 저 청년은 저를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축에 속했다. 물론, 연인이란 작자가 저를 잘 모르는 것도 우수운 일이 될 테지만. 구구절절한 이유들과 비교적 심상한 어조 끝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본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저 청년과 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도 그에겐 누군가의 연인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많고도 많았다. 하다못해 저 청년이 괜찮다 말하던 저의 외모까지도 거론된 마당에 연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없음이 분명했다. 그가 말을 끊을까, 혹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까 두려운 듯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냈던 청년의 놀란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젊음, 순수, 그리고 고결함. 그 모든 것이 어울리는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훑어본 그는 늘 그렇듯 환하게 웃었다. 처절한 비명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느냐 마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늘 비명을 지르는 이었고, 고통이라면 지긋지긋하다 못해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곳에 산재해 있었다. 무심코 쓸어내린 얼굴에서 묻어나는 진액은 끈덕지게 손으로 이어지다 마침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궈졌고 바닥에 짙은 얼룩이 된 후에도 그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제 연인이었던 청년이 질색하는 탓에 청년을 만날 때면 늘 벗곤 하던 마스크가 주머니에서 사부작거리고 있었다. 아, 마스크. 작은 탄성을 내지른 그의 손에 쥐어진 붉은 색의 마스크는 저의 연인이 움켜쥐고 있는 것과 비슷한 부류의 색이었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색일 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피부에서 스며나오는 진액과 피에 물들어 짙어진 마스크의 내부는 텁텁했고, 안락했다. 불어온 바람이 청년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는 모양새는, 이른 봄 막 피어오른 가지 끝의 꽃잎을 흩어재끼는 것과 같은 향을 띄고 있었고, 무심한 듯 불어와 잔인한 행태를 한다는 것에 있어선 그를 마주하는 대부분의 사람과 같았다. 여전히 눈물을 쏟아내며 저를 바라보고 있는, 언젠가,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 연인이었던 청년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그는 늘 그렇듯, 밝은 목소리로 청년에게 말했다. 그 동안 고마웠으며, 상대해주느라 힘들었겠다는 위로,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청년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다짐. 분명 바라는 말이라 생각하여 꺼낸 말은 청년의 얼굴을 더욱 희게 만들었고, 이제는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에 마음이 급박해진 그는, 몇 번이고 달싹거리다 다물기를 반복하는 입술을 뒤로 한 채 옥상 아래로 가볍게 하강했다. 여전히 다정스레 뺨을 스치고 가는 바람은 부드러웠고, 한 낮의 햇볕을 듬뿍 받아 따스한 아스팔트는, 아마도, 그의 피에 한층 더 온기를 더할 터였다.
- 걍 자다 일어나서 떠오른 첫문장 때문에 주절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