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덷거미덷

지난번에 떠올렸던 소재로.

Spideypool 2016. 4. 18. 20:58



01.


 시간, 그의 고유한 권리는 무참히 살해당한지 오래였다.



02.


 사내에게 있어 시간이란 그저 상실의 다른 단어일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 시간, 세월은 약탈자이자 착취자였고, 그에게서 젊음을 앗아가는 대신 다른 모든 것을 앗아가는 빌런이었다.



03.


 웨이드 윌슨. 그는 아직까지도 그것이 자신의 진짜 이름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름의 진위를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짓이었고, 그의 연인이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를 때부터 그 이름은 그의 진짜 이름이 된 지 오래였다.



0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짜 이름을 알려달라는 연인의 부탁에 그 이름을 내뱉는 입안에 번지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05.


 웨이드.



06.


 애처롭게 떨리는 손을 끌어당겨 품에 안은 그는, 파리해진 입술이 벌어지는 모양새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에도 새하얗게 질린 손은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07.


 미안해요.



08.


 그의 연인은 끝까지 그의 심장을 짓씹어 삼키길 원하는 것 같다고,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지만 그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점차 풀려가고 있는 동공에서 빛이 꺼지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앰뷸런스는, 아직이었다.



09.


 유언 같은 소릴 할 거라면 이미 변호사에게 넘기지 않았냐는 그의 농담은 허공으로 흩어졌고, 그의 농담에 웃음을 쏟아놓을 듯했던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는 짙은 그림자를 남기며 땅바닥으로 떨궈졌다.



10.


 단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그쵸?



11.


 그의 연인의 흉부는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가녀린 움직임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고, 그는 그 언젠가 자신이 무심코 지나쳤던 로드킬을 당했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미세하게 떨리던 손이 아주 천천히 그의 손을 움켜쥐어 왔다.



12.


 사랑해요. 사랑해요, 웨이드.



13.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던 호흡을 끌어 모아 나온 말은 이내 입술에서 흘러나온 입김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고, 미소를 지을 듯 하던 입술은 이내 움직임을 멈춘 채 침묵했다.



14.


 늘 그렇듯, 시간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옛날부터 오늘, 지금 바로 이 시간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