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그렇듯 쓰면서 들은 음악은 맨 아래에.


 햇볕이 따가운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뜬 태양은 아주 먼 곳에서 샛노란 점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있었고, 아직은 조금 쌀쌀한 바람이 조심스레 몸을 움직이며 막 자라나기 시작한 이파리 틈 사이로 지나다니는, 말하자면 날이 좋은 그런, 날이었다.


 [니들이 생각한 것 중 가장 멍청한 일이었어.]

 “그렇다고 해서 가치가 없었던 건 아니지.”

 [시체 치우기 반에 자처한 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누구의 시체냐의 문제지, 안 그래?”


 듣는 이라곤 없는 묘지에서 혼자나 들을 법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흰 박스에 대답한 데드풀은 가슴에 꽂고 있던 노란 장미를 관 위에 던져 넣은 뒤 조용히 흙을 덮기 시작했고, 그가 흙을 다 덮고 묘비를 세운 뒤까지도 말이 없던 노란 박스가 그답지 않게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장은 별로야. 특히 검은색 정장은.)

 [장례식에 그 우스꽝스러운 수트를 입고 올 순 없잖아.]

 “오, 그 말을 들으면 노란 박스가-”

 (그래도 우린 데드풀이라고. ‘그’라면 이해했을 거야.)


 데드풀의 예상을 깨고 노란 박스는 흰 박스의 우스꽝스러운 수트, 란 표현은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로 시무룩하게 중얼거렸고, 조심스레 묘비에 새겨진 이름을 손가락으로 쓴 데드풀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라면 이해했겠지.”


 노란 박스의 말에 조용히 대답한 데드풀이 검은 색 대리석 위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차원 이동기를 작동시켰고, 이번만큼은 노란 박스나 흰 박스 둘 다 침묵을 지킨 채, 다음 세계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장례식


 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밝은 회색이었던 아스팔트는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고, 가느다란 빗방울이 견딜만 했던 거리의 사람들이 아직 우산을 펼쳐들지 않은 거리는 퇴근시간이 맞물려 복잡해지고 있었다. 학교 과제도 끝낸 뒤라 한가했던 피터는 건물 옥상에 다리를 흔들며 스파이더 센스가 울릴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고, 만일, 거리 한쪽 구석에서 특이한 정장 입은 사내 곁에 붙어 시시덕거리는 웨이드를 보지만 않았더라면 나름대로 평화로운 오후가 될 수 있었을 터였다.


 거리 끝 쪽에서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던 두 사람은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는 듯 했고, 처음엔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던 피터가 웨이드에게도 친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납득하려는 찰나, 무언가에 격분한 듯 고함을 치기 시작한 웨이드가 정장을 입은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웨이드가 멱살을 움켜쥐었을 때만 해도 사태를 더 두고 보려던 피터는 웨이드가 총을 꺼내자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고, 피터가 그 둘 사이에 끼어들자마자 입을 굳게 다문 웨이드는, 움켜쥐었던 멱살은 순순히 풀었으면서도 장전한 총은 여전히 상대에게 겨눈 채로 그들 사이에 끼어든 피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또 다시 한숨을 내쉰 피터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웨이드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웨이드, 제발 좀. 여긴 대로변이라고요. 내가 살인하지 않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죠? 그리고- 어,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만나서 반가워, 스파이더맨. 아니면 뭐-”

 “그 망할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망할 데드풀 선생.”

 “만나서 인사도 못하다니 야박하기 그지없네, 안 그래? 봐 바, 얘가 네 연인이라는 건, 내 연인도 된다는 소리라고. 이참에 우리 3P나 한 판 뜨는 건 어때? 멀쩡히 살아있는 스파이더맨을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손맛이 그리웠던 참이거든.”


 잘빠진 정장을 차려입은 게 아쉬울 정도로 줄줄이 읊는 말의 내용들은 저속하기 짝이 없었고, 졸지에 두 명의 데드풀 사이에 끼여 어리둥절해 하던 피터는 천천히 웨이드의 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는 웨이드의 팔을 잡아 내린 뒤 속삭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예요? 당신 말을 못 믿었다는 게 아니라, 음, 내 말은, 그러니까,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저 사람은 도대체, 그리고 옷이 마치, 장례식에나 갈 법한 거 같은데.”

 “응급상황이야, 스파이더맨. 아마도 넌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그 망할 입 닥치라고 하지 않았나? 닥치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지.”


 피터에게 잡힌 팔 대신 반대 팔을 재빨리 올린 웨이드가 다리 옆에 꽂고 있던 나이프를 날려 정장을 입고 있던 데드풀 얼굴 정 가운데에 명중시켰고,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시체를 본 피터가 식겁을 하며 널부러진 시체에 다가서려는 걸, 웨이드가 잡아 밀며 고개를 저었다.


 “허니, 이런 말 하긴 싫은데 이건 말 그대로 ‘우리’끼리의 일이라서 말이야.”

 “웨이드, 잠깐만요!”

 “나 없는 동안 바람피지 말고 몸조심해, 허니.”


 윙크까지 날린 웨이드는 널부러져 있던 시체를 껴안은 채로 사라져버렸고, 졸지에 이 모든 상황을 경찰에 설명할 상황에 놓인 피터가 머리를 감싸 쥐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늘 그렇듯 이삼일이면 다시 나타날 거라는 피터의 예상과 달리, 그렇게 사라졌던 웨이드는 며칠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며칠 후, 피터를 찾아온 건 예상치도 못했던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들이었다.


* * *


 “그러니까, 이게 모두 다-”

 “스파이더맨들의 무덤이라는 거지. 시체를 찾아오는 것조차도 힘들 정도였어.”


 줄줄이 늘어선 묘비엔 피터 파커부터 시작해서 오만가지 이름과 함께 각 세계의 이름들이 박혀 있었고, 순서대로 그 묘비들을 걸어가던 웨이드는 자신의 세계에 속한 피터 파커 자리가 만들어져 있는 걸 보곤 다시 총을 빼들었다.


 “넣어두는 게 좋을 거야, 웨이드.”

 “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내’ 피터 파커 밖에 없어.”

 “그리고 그 피터 파커는 한낱 시나리오의 소모품으로 소비되겠지. 애초에 너희랑 관련된 코믹스는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더 쉬울 거고.”


 처음부터 장전조차 되지 않았던 총을 빼들었던 웨이드의 팔이 힘없이 떨궈지는 것을 본 데드풀은 여전히 할 말이 많은 듯한 박스들은 무시한 채로 그에게 다가섰고, 텅 비어있는 빈 구덩이를 응시하던 웨이드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자,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했던 일은 모두 의미 없는 짓이었어.”

 “그 모든 살인들 말이지.”

 “그래, 그 모든 살인들. 어벤져스를 몰살하고, 울버린도, 자비에 교수도,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인물들을 죽였던 그 모든 일들 말이야. 심지어 그, 스파이더맨의 죽음조차도.”


 입을 굳게 다문 채 눈만 굴리던 웨이드는 그제야 자신의 앞에 선 데드풀의 정장을 찬찬히 훑어보았고,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붉은 색의 기미조차 없는 검은 색 정장에 히죽 웃은 웨이드가 입을 열었다.


 “난 늘 정장이 싫었어. 특히 검은색 정장은 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의 장례식이라면 어쩔 수가 없었겠지, 안 그래? 뭐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상관없을 테지만.”

 “네가 아는 피터 파커라면 네가 피칠갑을 하고 나타난대도 별 상관하지 않을 걸. 그저, 그저 네가 한 또 다른 어이없는 짓에 기가 차하면서도 널 위로하는 게 다겠지. 이렇게 혼자 두게 되어서 미안하다고 말이야.”

 “좋아, 다 좋다고! 그래서, 굳이 들어봤자 소용도 없는 소식을 전하러 온 저의나 말해보지 그래? 우리 둘 다 시간낭비나 쓸 데 없는 감정소모는 싫어하잖아, 안 그래? 우린 망할 데드풀이라고. 멜로는 우리 장르가 아니지. 우리, 장르가, 아니라고.”


 끝에 가서 씁쓸하게 중얼거린 웨이드가 마스크까지 검은 데드풀을 노려보며 입술을 짓씹었고, 잠시 말없이 그를 쳐다보던 데드풀이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적힌 쪽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멜로가 우리 장르가 아닐지는 몰라도, 맥없이 당하는 것도 우리 장르는 아니잖아. 뭐,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이게 뭐라고요, 장의사 양반?”

 “네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해두지. 아주 잠깐뿐이 안 될 거야.”

 “거기까지 와서 고작 도우려는 게 마지막 인사라고?”


 또 다시 목소리를 높인 웨이드의 손에 쪽지가 구겨졌고,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에서 쪽지를 빼어 펴서 다시 건넨 데드풀이 그에게 말했다.


 “너희 둘 모두가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내 말은. 적어도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사랑을 이룬 또 다른 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이니까 그렇게 험하게 다루지 말아줄래, 달링? 내 마음이 구겨지는 느낌이거든, 그거.”


 데드풀의 말에 눈을 빛낸 웨이드가 종이에 쓰여진 코드를 한 번 읊조리곤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그가 남기고 간 발자국을 한참이고 쳐다보던 데드풀도 곧 모습을 감췄다.


* * *


 이동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긴박한 상황이라는 게 빈말은 아니었던 듯, 다짜고짜 나타나 빠르게 말을 쏟은 검은색 수트의 스파이더맨은 그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그의 뒷덜미를 잡아 차원 이동을 해버렸고, 자신이 속한 세계가 점점 멀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웨이드를 떠올린 피터는, 그들이 설명한 상황을 걱정하기보다는, 나중에 돌아올 웨이드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다 그라면 오히려 그 싸움에 끼지 못했다는 것을 더 안타까워하리라는 걸 떠올리곤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내내 구석에 서서 홀로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웃음을 터트린 걸 본 다른 스파이더맨이 그에게 다가갔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응?”

 “다들 저렇게 싸우기 바쁜데, 혼자 웃고 계시길래요. 당신도 피터 파커라고 했죠? 전 마일즈 모랄레스예요. 늘 그렇지만 또 다른 피터 파커를 만나는 일은 아-주 신나죠.”


 자신을 마일즈 모랄레스라고 표현한 소년은 마스크를 벗었고, 생각보다 어린 나이로 보이는 얼굴에 흠칫했던 피터는, 이내 자신이 히어로 노릇을 시작한 것도 그 나이 때쯤일 거라는 것을 떠올리곤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그냥. 내 연인이 여기 있었다면 아주 신나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흠. 그웬 스테이시? 아니면 MJ?”

 “이런. 그웬은 그렇다 쳐도, MJ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여튼 둘 다 아냐. 웨이드 윌슨. 너도 알려나 모르겠네.”


 말하면서도 이 현장에 있었다면 싸인 받기 바빴을 자신의 연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키득거린 피터와 달리 연인의 이름이 웨이드 윌슨이란 소리에 혼란에 빠진 마일즈가 미간을 찌푸렸고, 아무래도 그들이 대화하는 와중에 상황이 정리된 듯 어느 새 고요해진 무리들을 본 피터가 마일


----- 60분 -----


마일즈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 무리 쪽으로 걸어 가버리자 자신이 생각한 그 사람일 리가 없다며 머리를 턴 마일즈도 마스크를 뒤집어 쓴 채 무리로 합류했다.


 처음 이동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팀은 신속하게 짜졌고, 그와 팀이 갈리게 된 마일즈가 막 열리기 시작한 차원 포탈들을 잠시 뒤로 한 채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가 궁금한 걸 못 참아서 그러는데, 그 웨이드 윌슨이 제가 아는 그 빨갛고 검은 수트를 입은 그, 웨이드 윌슨은 아니죠?”

 

 긴박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묻는 소년에 웃음을 터트린 피터 파커는 이미 이동하고 있는 그의 팀 쪽으로 마일즈의 등을 떠밀었고, 그의 손에 의해 순순히 떠밀려 가면서도 마일즈가 계속해서 묻자 또 다시 웃음을 터트린 피터가 그제껏 손에 들려있던 마스크를 얼굴에 뒤집어쓰며 말했다.


 “그래, 데드풀, 걔가 내 하나뿐인 연인이야. 입만 살아서 허구헌날 나불거리는 입만 산 용병. 알고 보면 귀여운 애니까 혹시 다시 만나면 아껴줘, 스파이더맨. 걔가 스파이더맨이라면 죽고 못 살거든.”

 “미쳤어요? 그 미치광이를-”

 “알고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사랑스러운 면도 있고. 그럼, 살아서 보자고, 웹 워리어즈.”


 웹 워리어즈란 단어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손을 흔든 마일즈가 그의 팀 중에선 마지막으로 차원 포탈을 타고 이동했고, 제일 마지막에 열린 자신의 팀 포탈로 발을 디딘 피터도 이내 다음 세계로 이동했다.


* * *


 몇 번의 실패 끝에 코드에 적혀있던 세계에 도착한 웨이드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적막하기 그지없는 도시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지어 올리던 건물들의 파편이 거리 여기저기에 늘어져 있었고, 수많은 시체들이 그 파편 밑에, 혹은 위에 널부러져 있었지만, 그것들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그가 파편의 흔적을 따라 넘어질 듯 달리고 있을 때 우회도로 너머에 있던 건물이 큰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마지막이라 이거지.]


 그와 피터가 연인이 된 이후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흰 박스가 조용히 읊조렸고, 늘상 그의 머릿속을 시끄럽게 만들던 노란 박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내, 온갖 모양의 수트를 입은 스파이더맨들이 있는 곳에 도달한 웨이드가 쓰게 웃으며 침음을 냈고, 입을 굳게 다문 그를 대신해 노란 박스가 그에게 말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우리 비상용 파우치에 있는 종이들이랑 펜이 남아나질 않았을 거야. 스파이더맨이 이렇게 많은데, 사인 받을 틈조차 없다니!)

 “아가리 닥치고 우리 피터나 찾아봐. 우리 목적을 잊지 말라고.”

 (피터 파커 납치 계획 말하는 거지? 그거라면 아마-)

 “젠장, 웨이드!”

 (봐, 피터 파커는 항상 우릴 찾아내잖아.)


 노란 박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하강한 피터가 재빨리 그를 잡아챈 뒤 이미 그들이 휩쓸고 간 거리, 그러니까 웨이드가 그토록 급히 달려왔던 거리에 있는 건물 옥상 중 하나에 착지했고, 피터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피식 웃은 웨이드가 피터의 마스크를 벗긴 뒤 이마에 입을 맞췄다.


 “웨이드, 일단 여길 좀 벗어나요. 나중에 설명해줄게요.”

 “지금은 안 되나 보지?”

 “웨이드.”

 “난 지금 설명을 듣고 싶은데, 자기야. 그냥 우리 둘이 잠깐만 벗어나서 설명해주면 안 될까? 알다시피 나한테는 차원 이동기도 있고-”


 웨이드가 말도 안 되는 일로 억지를 부릴 때면 늘 그렇듯, 미간을 찌푸린 피터가 팔짱을 낀 채 그를 응시했고,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감정을 애써 누른 웨이드가 짓궂게 웃으며 다시 옥상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피터를 잡았다.


 “핏, 그 전에 내가 물었던 질문 기억해?”

 

 박스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웨이드는, 그가 다치지 않을 정도의 힘을 주며 팔을 빼내려는 피터를 여전히 붙잡은 채로 피터와 눈을 마주치려 애를 썼고, 마침내 그에게서 빠져나가기를 포기한 피터가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그럼 내 대답도 기억하겠네요.”


 그들 뒤로는 여전히 치고 박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고, 웨이드가 처음 그 곳에 도달했던 때보다 현저히 줄은 스파이더맨들은, 피터가 싸움에서 빠져나온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기를 쓰며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 언젠가, 말도 안 되는 삼류 로맨스물을 보며 그가 던졌던 질문, 그러니까, 만일 나랑 일반인 누군가가 물에 빠졌다면 누굴 구할 거야, 라는 웨이드의 질문에 피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은 수영을 할 줄 알지 않느냐고 응수했었고, 그 당시의 웨이드는, 그조차도 피터답다는 말로 웃어넘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대답이 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늘 그렇듯, 피터는 알지 못했다. 늘 그렇듯.


 여전히 올곧기 그지없는 피터의 눈을 응시하던 웨이드가 피터의 팔을 붙잡은 채로 차원 이동기를 작동시키려는 찰나 이미 그가 뭘 할지 눈치 채고 있던 피터가 웹슈터로 그의 차원 이동기를 망가뜨렸고, 곧 이어 들릴 잔소리들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차원 이동기가 작은 소음을 내며 완전히 점멸할 때까지도 침묵하고 있던 웨이드가 피터가 다시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마스크를 뒤집어쓰며 말했다.


 “이런 전장에 연인을 두고 떠나는 건 내 타입이 아니지. 게다가 차원 이동기도 망가져버렸고.”


 어딘가 포기한 듯한 그의 어조에 멈칫했던 피터가 무언가 떠오른 듯 팔에 채워져 있던 무언가를 풀어내려고 하자 웨이드가 그의 손을 잡아 멈춘 뒤 키득거렸다.


 “네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도 알고, 네가 어떤 사람인지도 아주 잘 알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물을게, 피터.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그 질문을 다른 사람이 했어도 네 답이 같았을까?”


 몇 번의 공격에도 굳건히 버티고 섰던 건물은 이제 완전히 붕괴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불어온 바람이 그들이 서 있던 옥상까지 먼지바람을 몰아 왔다.


 “웨이드,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그보다 무슨 일 있었어요? 왜 그렇게-”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말하냐는 피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피터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그들이 서 있던 옥상 위로 다른 세계의 스파이더맨이 추락해 떨어졌고, 거의 그와 동시에 피터의 등을 노리고 날아온 공격을 막기 위해 웨이드가 팔을 놓자마자 피터가 돌아서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쪽으로 뛰어 들었다.


 [납치 계획은 실패고, 이제 어쩔 셈이야?]


 곳곳에서 날아오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몸동작으로 빠르게 전투 현장으로 다가가고 있는 피터를 보던 웨이드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메인 음악을 흥얼거리며 등에 꽂고 있던 카타나를 빼들었고, 머릿속에서 잠자코 있던 노란 박스와, 평소와 달리 그에게 아무런 딴지도 걸지 않은 흰 박스가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전투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것도 안 좋은 방향으로.


 “언제부터개들한테이런능력이있었던거야!”

 “그보다는, 꼬리-가 없, 다는 것! 부터가, 문제아냐?”

 “제가, 살던- 세계엔, 꼬-리가, 없는! 개도, 있, 었다-고요!”


 자신의 옆으로 붙은 스파이더맨과 합을 맞춰 싸우던 피터는, 아까부터 말없이 칼만 휘두르고 있는 웨이드를 흘깃 쳐다보다 거의 맞을 뻔한 공격을 겨우 막아내곤 멀찍이 서서 싸움 구경만 하고 있는 여자를 노려보다 천천히 여자 쪽을 향해 이동했고, 대충 그의 의중을 파악한 이름 모를 스파이더맨 또한 그에 맞춰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는 스파이더맨의 전투라고 되도록 뒤로 물러나달라는 피터의 말은 무시한 채로 칼만 휘두르던 웨이드도 어느새 그의 곁에 와 되는 대로 칼을 휘두르거나 때때로 수류탄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졌고,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자신의 연인에 기가 질린 피터가 막 마지막 개를 해치웠을 때, 그제껏 그와 등을 맞대고 있던 스파이더맨이 여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파이더맨!”


 달려들었던 기세가 우습게 순식간에 제압된 스파이더맨은 기묘한 빛을 내며 문둥이와 같은 형체로 변한 채 쓰러졌고, 달려가려는 피터의 앞을, 웨이드가 막아섰다.


 “웨이드!”

 “허니, 잘 생각해봐. 저 여자상대로 나만한 사람은 없을 걸. 자기도 알다시피 난 죽지 못하잖아. 난, 죽지, 않, 는 다고!”


 칼을 들지 않은 한쪽 팔로 있는 힘껏 피터를 뒤로 밀친 웨이드가 그대로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렸고, 그를 붙잡아 당기려고 뻗은, 피터의 거미줄보다도 웨이드의 칼이 먼저 여자의 폐부를 찌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이건 먹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 구나. 그래, 생명력은 넘칠지 몰라.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야. 맛볼 가치도 없다고.”


 인상을 찌푸린 여자의 손이 칼을 쥐고 있던 웨이드의 팔을 잡아 비틀었고, 여자를 걷어차기 위해 올라갔던 웨이드의 다리가 반대로 꺾이는 걸 본 피터가 달려들자 그걸 예상이라도 한 듯, 웨이드가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카타나를 그의 발 앞으로 날렸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발등에 박혔을 칼에 멈칫한 피터를 보고 묘한 얼굴로 웃은 여자가 잡고 있던 팔을 끌어당겨 그의 목으로 머리를 향하며 피터를 응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입 안에 들어온 식사 거리를 낭비하는 건, 가훈에 어긋나거든.”


* * *


 그 묘지에 묻힌 모든 관들이 그렇듯, 너도밤나무로 만들어진 관의 색은 장례식에 어울리지 않게 밝았고, 금방 잘라낸 나무의 비명이 들릴 듯 생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제 장례식은 질색이야.)

 “입 좀 다물지 그래. 우린 지금 장례식 참석 중이라고. 어차피 곧 끝날 이벤트야.”

 [곧이라고?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쟤네 시간대에선 아니지.”


 평소와 달리 두 송이의 장미를 관 위에 던져 넣은 데드풀은 삽자루를 집어 들고 흙을 덮기 시작했고, 반복 노동에 지친 노란 박스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냥 걔네 전부를 ‘해방’시키는 건 어때?)

 [독자들이 싫어할 걸.]

 (그럼 그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을 죽이는 건 좋아해서 했다든?)

 “걔네가 신경 쓰는 건 오직, 자기들이 아는 ‘스파이더맨’들 뿐이라고. 얘네는 좋아하고 싫어하고 조차도 있을 수 없어. 지구 616의 수많은 가지들 중 하나일 뿐이니까.”


 데드풀이 무덤 주인들을 처음 만났던 날들처럼, 가벼운 봄비가 다정스레 흙 위를 두드리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흙을 퍼 덮은 데드풀은 빗방울들이 맺히기 시작한 묘비 앞에 서서 다른 무덤들과 달리 나란히 적힌 두 이름을 보기 위해 쭈그리고 앉았다.


 (걔 말이 맞아.)

 

 뜬금없는 노란 박스에 되묻는 이는 없었지만 그들 모두 노란 박스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후에 적막을 깨고 노란 박스가 그답지 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장르는 로맨스나 멜로가 아니지. 이제 누가 우릴 사랑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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