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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Crown #07

썰/덷거미덷 2017. 11. 25. 19:26 |


Chapter 07_Nightmare


 그의 앞엔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이 굳건히 서 있는 채였다.


 똑. 똑. 똑.


 그리고 그는 수십번을 반복한 짓을 여전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은, 아직도 열리지 않은 채였다.


 현관에서 이어진 복도 끝 방의 울음소리는 그의 귀 바로 옆에서 울리고 있었고, 넓게 난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붉었다. 해가 지고 있는 건지 뜨고 있는 건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거였고, 그는 손을 들어 다시 문을 힘차게 두들겼다.


 분명, 자신이 내는 소리가 문 건너편에 전달되지 못해서일 터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문이 열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건 한낱 놀이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언제고 지켜지던 약속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문은 ‘아직’ 열리지 않은 것뿐이었다.


 [병신아, 이제 그만해.]


 머릿속에 울린 나지막한 목소리는 동정보단 비난에 가까웠고, 흰 색이었던 문에 난 붉은 자국들은 짙은 색을 내며 나무문을 태우고 있었다.


 [니가 그런다고 니 아버지가 돌아올 것 같냐.]


 귓가에서 맴돌던 울음소리는 흐느낌으로 변해갔고, 하늘은 여전히 어두워지지도, 밝아지지도 않은 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쩌면 아직 돌아올 시간이 아닐 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방금 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니 이야기가 아니었어. 다른 세계 사는 다른 놈 이야기였다고. 모든 걸 받아주는 사랑? 그게 가당키나 해?]


 낮은 고도 탓에 길어진 그림자가 그의 시야를 가렸고, 타오른 문 밖엔 아무도 없었다. 흐느낌은 멎어있었다. 그림자에 물든 적막이 그 빈 공간을 타고 차오르기 시작했다. 바닥부터 차오른 적막은 금세 그의 가슴께로 차올라 그의 숨통을 조여 왔고, 잠시간의 휴식에 움직임을 멈췄던 폐가 고통에 숨을 토해냈다.


 깊게 몰아쉰 숨과 함께 돌아온 시야엔 엉망진창인 욕실 천장이 담겼고, 욕실 타일 벽에 진득하게 눌러 붙은 머리를 천천히 뗀 그는, 현실로 돌아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3일 예약한 호텔 스위트룸을 이르게 체크 아웃하는 이유를 묻는 직원의 시선은 처음을 제외하곤 그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 소년이 챙겨가지 않은 옷가지들은 그나마 깨끗한 침실 침대 위에 올려진 채였다. 어쩌면, 혹시라도 그 옷을 되찾아가기 위해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딱 봐도 돈 많게 생겼던데 그깟 옷 하나 찾으러 오겠냐.]


 일말의 희망조차도 짓밟은 흰 박스가 킬킬거리며 웃었고, 노란 박스는 아까부터 데스를 중얼거리며 이렇게 끝내선 안 된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욕실 바닥에 떨어진 총에는 아직 4발의 총알이 남아있었다. 아직 뻐근한 머리를 짚은 채로 그가 다른 손으로 욕실 바닥의 총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조금 흐릿했던 시야가 완벽하게 돌아왔고, 열어놓았던 욕실 문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눈치 챈 웨이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총을 집어든 뒤 재빨리 문 앞의 누군가에게 총을 겨눴다.


 “옷이나 찾으러 왔는데 집 주인한테 말은 하고 가야 할 거 같아서 기다렸더니 돌아오는 게 총알이에요?”


 총이 겨눠지거나 말거나 아무렇지 않게 말한 피터가 손에 들린 쇼핑백을 흔들어보였고, 공이를 푼 웨이드가 걸려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려다 이미 개판인 수건 상태에 욕을 내뱉자 웃음을 터트렸다.


 “준비도 안 하고 다짜고짜 머리를 터트리는 거 하나만큼은 똑같네요. 자요.”


 어디서 꺼내온 건지 모를 수건은 깨끗했고 약하게 느껴지는 섬유유연제 냄새에 그가 킁킁거리는 모습을 보고 다시 웃음을 터트린 피터가 문에서 비켜섰다. 엉망인 얼굴을 대충 닦고 나오던 그는 그제야 자신이 빨래할 것이 귀찮아 맨 몸으로 머리를 날렸단 사실을 깨닫곤 황급히 수건을 허리에 둘렀고, 뒤에서 웨이드가 그러거나 말거나 앞서 가던 피터가 그를 식탁으로 불렀다.


 집은, 그가 머리를 날리기 전의 모습과 사뭇 달랐고, 깔끔하게 정리된 집의 모습에 웨이드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던 피터가 팬케이크 접시 두 개를 식탁 위로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무기는 무기 거치대에, 빨래는 코인 세탁방에 가서 건조까지 끝내서 정리했고, 바닥 닦는 건 좀 힘들더라고요. 청소 로봇을 쓴지 꽤 됐거든요. 자요. 핫케이크 말고 팬케이크.”


 깔끔하게 구워진 팬케이크 위엔 아무것도 토핑 되어 있지 않았고, 이 모든 상황에 할 말을 잃은 웨이드가 멍하니 식탁 옆에 서 있는 사이 부엌에 들어갔다 나온 피터가 생크림, 딸기잼, 메이플 시럽을 식탁 위에 올렸다.


 “당신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요. 보통 제 웨이드는 딸기잼을 바르고 메이플 시럽 범벅을 한 다음에 생크림까지 산처럼 쌓아서 먹었거든요.”


 부드럽게 웃은 피터는 다른 접시 앞에 앉아 메이플 시럽을 접시에 뿌리다 웨이드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 눈빛에 밀려 웨이드는 얼결에 피터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무심코 딸기잼을 집었다가 피터의 눈치를 보았다.


 웨이드가 식탁에 앉을 때 이미 메이플 시럽을 다 뿌린 피터는 첫 번째 팬케이크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고 있었고, 밖은 이미 해가 진 듯 켜진 전등이 식탁 위를 밝히고 있었다.


 “집에 가서 벤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웨이드가 있었으면 금방 웃게 해줬을 텐데 난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여기선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학교만 끝나면 토니의 랩에 가서 밤늦게까지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웃기야 웃는데 일기도 더 이상 안 쓰고…….”


 말끝을 흐린 피터가 여전히 깔끔한 웨이드의 팬케이크를 보다 비식 웃었고, 딸기잼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괜찮아요. 원래 취향이 그럴 수 있죠. 같은 유전자라는 게 무섭긴 하네요.”


 웨이드가 봉해져 있는 딸기잼 뚜껑을 따는 사이 생크림 캔을 집어든 피터가 열심히 캔을 흔든 뒤 팬케이크 위에 생크림을 잔뜩 올렸고, 웨이드의 시선을 느낀 듯 말을 이었다.


 “세 개 다 바르면 전 너무 달더라고요.”

 “그 쪽 세계 스파이더맨은 우리 스파이더맨과 다른가보지?”


 웨이드의 질문에 생크림을 그어 내려가던 포크가 멈췄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마는 듯 피터의 입술이 몇 번이고 벌어졌다 다물어졌지만 웨이드는 아무 말 없이 메이플 시럽을 집어 들었다.


 “글쎄요. 이 쪽 스파이더맨으로서 말씀드리자면 다를 건 없죠. 신분 보장에 예민하고, 사건을 보면 앞 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그러다 다치고, 누군가를 다치게 만들고, 누군가가 그래서 또 죽고, 그 쪽 스파이더맨 인생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 인생은 꽤나 기구해서 말이에요.”


 담담한 어조로 말한 피터가 자신 쪽에 있던 생크림을 몇 번 흔들어 뜻밖의 말에 멍하니 있는 웨이드의 손에 쥐어주었고, 무심코 위쪽을 눌렀던 웨이드는 식탁 위에 흩뿌려진 생크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신분 보장에 너무 예민해서 벤에게 말을 안 한 건 잘못한 일인 거 같아요. 혹시나 애가 말실수를 해서 위험해질까봐 말을 안 한 건데, 멍청했죠. 이제 와서 네가 그렇게 원망하는 사람이 바로 나야! 할 수도 없고.”

 “최소한 자기 아빠가 널 구하다 죽었다는 건 알겠지.”

 “그럼 원망하지 않게 될까요?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사건이었을지도 몰라요. 그 자리엔 캡틴도 있었고, 토니도 있었고-”

 “내가 아는 스파이더맨이도 그런 건 상관 안하고 뛰어들었을 것 같은데.”

 “그쵸. 그리고 내가 아는 웨이드도 자기 몸은 신경 안 쓰고 날 돕겠다고 뛰어들 사람이었고요. 그걸 왜 몰랐을까요.”


 씁쓸하게 웃은 피터가 식탁 위에 놓여져 있던 냅킨으로 생크림을 닦아냈지만 흰색의 유분기는 식탁 유리에 눌러 붙은 채 닦이지 않았고 행주를 가지러 일어나는 피터를 웨이드가 붙잡았다.


 “애초에 그렇게 깨끗한 식탁도 아니었어. 잘 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깨끗해질 이유가 없지도, 깨끗해질 수 없는 것도 아니죠.”


 자리에서 일어난 피터는 부엌에 들어가 집에서 본 적 없던 행주를 가져와 생크림을 닦아냈고, 잠시간 식탁 위에 머물렀던 물방울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 쪽이 스파이더맨이라는 건, 그럼 우리 세계 스파이더맨도-”

 “그건 저도 모르죠. 어쨌거나 같은 세계가 아니라 평행 세계니까요.”


 웨이드의 말을 빠르게 끊은 피터가 식탁 위에 놓여있던 생크림을 쭉 짜내 웨이드의 팬케이크 위에 올렸고, 콘 아이스크림 모양새로 올려진 생크림을 보던 웨이드가 포크로 생크림만 떠내 입에 넣었다.


 “설마 내가 진짜로 옷 가지러 여기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럼?”

 “우리 세계로 올래요, 웨이드?”


 입안의 생크림은 빠르게 녹아 단맛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췄고, 할 말을 잃은 채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웨이드를 빤히 쳐다보던 피터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웨이드 대체품으로 쓸 생각은 없어요. 그냥 거래를 하자는 거예요. 난 당신을 통해 데이터를 얻고 당신은 나를 통해 그 암과 힐링 팩터를 컨트롤할 방법을 찾고요. 그게 거의 끝나갈 즘에 웨이드가…….”

 “못 살게 되었다고?”


 피터가 끝맺지 못한 말을 웨이드가 끝내주었고, 웨이드의 말을 들은 피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피터가 무엇 때문에 웃음을 터트린 건지 알지 못하는 웨이드가 어정쩡한 표정을 짓다가 생크림 째로 팬케이크를 입에 쑤셔 넣었고, 금세 웃음을 멈춘 피터가 웨이드에게 깨끗한 냅킨 하나를 건넸다.


 “웨이드도 늘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죽었다라던가 죽인다는 말은 너무 폭력적이라나 뭐라나.”

 “데드풀들만의 유행어지. 좀 있으면 모든 작가들이 쓰게 될 걸. 그리고, 네 웨이드 말인데, 만약에 너네가 메인 유니버스면 곧 살아 돌아올 거야. 걔네는 우리가 죽어있는 꼴을 못 보더라고.”

 “그도 늘 그렇게 말하곤 했어요. 언제나 돌아올 거라고. 근데 그거 알아요? 그게 벌써 2년째예요. 요만하던 꼬맹이가 이만큼 커서 이 쪽으로 넘어올 텔레포트 벨트를 만들어낼 정도의 기간이요.”


 식탁 아래 언저리로 손을 내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웨이드의 곁에서 재잘거리던 소년만큼 손을 올렸던 피터가 정장 재킷 안쪽에서 손목시계를 꺼내 식탁 위로 올려놨고 웨이드의 시선이 시계에 닿는 걸 보고 잠시 기다렸지만 포크를 쥔 웨이드의 손이 시계에 닿는 일은 없었다.


 “당신이 결정해요, 웨이드. 아니면 그냥 별 생각 없이 놀러 와도 좋고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벤이 당신을 많이 보고 싶어 하거든요.”

 “당신이 말하지 않았나, 헛된 희망을 가지게 하지 말라고?”

 “당신이 제 웨이드랑 같은 경험을 했다는 가정 하에 말할게요. 그래서 그 헛된 희망 때문에 당신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나요? 가끔은 가짜 희망이라도 곁에 두는 게 나을 때가 있죠.”

 “그럼 나더러 가짜가 되라고-”

 “웨이드.”


 웨이드의 말을 끊은 피터가 포크를 쥐고 있던 웨이드의 손을 끓어 감쌌고, 침묵 속에서 잡힌 자신의 손을 쳐다보던 웨이드는 고개를 들어 피터와 눈을 맞췄다.


 “나나 벤도 당신 입장에선 헛된 희망 아닌가요? 웨이드는 늘 그랬어요. 자기는 운이 너무 좋다고요. 원래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이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누군가의 입장에선 웨이드가 돌아올 거란 내 꿈도 말도 안 되는 허상에 불과할 거고요. 근데 말이죠.”


 웨이드의 손을 감싸 쥔 피터의 손가락엔 아마도 그의 취향일 듯한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반지 중앙엔 푸른 색 보석이 이따금 전등 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난 그 허상이 허상으로 남지 않게 노력할 참이에요. 우리 웨이드가 돌아와서 왜 살려냈냐고 원망을 해도, 혹은 당신을 보고 바람이라도 핀 거냐며 난리를 쳐도 그만 돌아온다면 상관없을 것 같아요. 분명 제가 할 법한 짓은 아니지만 이미 그런 짓을 세자면 밑도 끝도 없어요. 가령, 스파이더맨 노릇을 관둔다거나 하는 거요.”

 “내가 아는 스파이더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관두겠죠. 하지만 난 당신이 아는 그 스파이더맨과는 달라요. 겪어도 안 될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죠.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세상을 구할 거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만 그러면 도대체 큰 책임에 따라오는 큰 권리는 어디로 간 거죠? 책임이 있다면 분명 권리도 있을 텐데 난 최소한의 행복할 권리도 잃은 거 같거든요.”


 말을 마친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싱크대로 가져갔고, 초록색 빛이 점멸하고 있는 손목시계를 쳐다보던 웨이드는 조심스레 손목시계로 손을 뻗었다.


 [안녕하세요, 웨이드 윌슨씨. 전 당신을 안내할 캐런입니다.]

 “캐런, 이번엔 일단 나한테 맡겨줘.”

 [그러죠, 주인님.]


 손목시계 화면에서 솟아올랐던 인영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고, 어느 새 식탁 옆에 서서 주머니에 한 쪽 손을 꽂아 넣은 피터가 나머지 손을 웨이드를 향해 내밀었다.


 “나랑 같이 갈래요, 웨이드?”


 공교롭게도 내민 손은 반지가 끼워져 있던 왼 손이었고 얇다란 은색 금속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던 웨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시계를 손목에 찬 채로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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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ideyp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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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Crown #06

썰/덷거미덷 2017. 11. 25. 19:25 |


Chapter 06_Grief


 그는 여전히 엉망진창이었던 웨이드, 아니 데드풀과의 첫 번째 팀업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소리를 지르거나말거나 안전제일을 외치며 끊임없이 던져버려도 어디선가 나오는 총을 난사하던 데드풀의 모습이나, 결국 모든 총을 빼앗기자 등 뒤에 쟁여두었던 카타나를, 카타나마저 빼앗기자 단도를, 그마저도 빼앗기자 땅에 떨어져 있던 적의 총을 주워 쓰려다 조금 헤매는 듯하더니 그걸 둔기처럼 휘두르던 데드풀의 모습은 그의 스타일과는 도무지 맞지를 않았고, 다시는 보지 말자는 그의 말에 데드풀은 엉망진창이었던 싸움만큼이나 엉망이 된 몸을 추스르지도 않은 채로 키들거리며 다음에 꼭 다시 보자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었다.


 그 말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데드풀은 끊임없이 그의 곁을 맴돌았고, 꼭 가야만 하는 출장이 아니라면 뉴욕시를 떠나는 일이 없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태양이 작열하던 날이나, 혹은 눈발이 거세 거미줄이 잘 들어먹지 않던 날, 혹은 그가 가장 행복했던 그 어느 날이나 아니면 그의 인생의 최저점이라고 자부할 만큼 우울했던 날에도 그의 곁엔 데드풀이 있었고, 그의 그림자의 곁에 데드풀의 그림자가 겹쳐지는 날이 늘어갈수록 그는 혼란스러웠었다.


 그는 여전히 왜 그토록 데드풀이 자신의 곁을 맴돌았는지 알지 못했다.


 몇 번이고 물어봤지만 데드풀의 답은 늘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는 그 단순한 대답은 여전히 그의 가슴 속에 남아있었고, 데드풀의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도 그가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은 그게 다였다.


 그 또한 데드풀의 똑같은 질문에 같은 답 외의 다른 답을 내놓을 수는 없었고, 그가 그의 질문에 답한 데드풀의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답을 내놓을 때면 데드풀은 늘 같은 얼굴로 웃었다.


 문제의 그 날에도 데드풀은 늘 하던 일을 했고, 피터의 운명 또한 늘 하던 일을 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그림자가 데드풀의 얼굴 위에 드리워졌던 날 또한 그는 잊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데드풀을 떠나가게 만든 자신을 용서치 못했고, 그는 종종 데드풀의 그림자는 여전히 자신의 발치 어딘가에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늘 그랬듯, 떠난 듯 보여도 그의 곁엔 데드풀이 있었고, 영영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연락이 닿지 않았던 그 어느 날처럼, 자신이 사랑을 고백하기 전 그 길게만 느껴졌던 공백처럼, 이건 그냥 그런 부재일뿐이고 언젠가 언제 사라졌냐는 듯 다시 나타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데드풀은 영영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아 보여도 기다리면 언젠가 떠오를 태양과도 같았기에 그는, 여전히 웨이드 윌슨, 그의 연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벤자민에게 있어 벤자민이 태어난 이후 뉴욕시 밖으로 떠난 적이 없던 웨이드의 부재란 낯설기 그지없는 것이었고, 벤자민이 스파이더맨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드러낼 때면 그는 갈 곳을 잃은 채 헤매야만 했다.


 그나,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똑똑한 벤자민 또한 웨이드의 힐링 팩터가 서서히 그 기능을 잃고 있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최대 난제는 항암치료가 다였다.


 그는 때때로 웨이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유일한 이가 자신이란 느낌이 들 때면 벤자민이 잠든 방에서 가장 먼 서재의 앨범들을 뒤졌다. 여전히 자리를 찾지 못한 뼛가루가 든 납골 항아리는 데드풀이 가장 좋아하던 서재 소파 위에 있었고, 그의 흐느낌을 듣는 것 또한 그 납골 항아리가 유일했다.


 벤자민이 다른 세계의 아빠를 찾겠다고 떠들던 걸 말리지 못한 채로 데드풀의 텔레포트 벨트만 숨긴 건 아마도 그래서였을 터였다. 다른 세계의 데드풀은 우리의 웨이드 윌슨과 다르다고 수십번을 말해도 벤자민의 말은 한결 같았다.


 그래도 유전자는 같으니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것 뿐이라고.

 다른 사람이라는 건 자기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다른 세계의 웨이드 윌슨 품에 안긴 채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있는 벤자민의 얼굴은 밝았고, 그 둘과 조금 거리를 둔 채 걸어가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는 후드에 박혀있는 채였다.


 “윌슨씨.”


 그의 조그만 부름에도 사내의 고개는 빠르게 자신을 향했고, 사내의 어깨 너머로 올라온 벤자민의 얼굴을 향해 미소 지은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가봐야 될 것 같아요. 토니가 아마 지금쯤이면 온갖 걱정에 미쳐가고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아빠~”

 “안 돼, 벤. 약속했잖아. 방법을 찾으면 얼굴만 보기로. 근데 만나기까지 했잖아.”

 

 그의 딱딱한 어조에 울상을 지은 벤자민이 말없이 웨이드를 쳐다보았지만 대답 대신 벤자민을 땅에 내려놓고 손을 잡은 웨이드의 눈이 그를 향했다.


 “텔레포트 벨트를 충전하려면 3일이 걸린다고-”

 “그건 토니와 이 녀석이 개조하기 전 이야기죠. 사실 충전할 필요가 없거든요. 벤자민 네이튼 파커-웨이드. 거짓말까지 했어?”


 엄한 표정을 짓는 그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벤자민을 쳐다보던 웨이드가 천천히 그에게 벤자민의 손을 넘겼고, 벤자민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이내 울음을 참아낸 듯 활짝 웃었다.


 “잘 있어요, 웨이드 아저씨!”

 “오냐.”


 벤자민의 말에 짧게 대답한 웨이드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허리를 숙여 벤자민의 귀에 속삭였고, 그 말이 다음을 기약하는 것임을 깨달은 그가 한숨을 내쉬며 웨이드의 어깨를 짧게 두드렸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윌슨씨. 왜인지는 당신도 잘 알 테죠.”


 그의 말에 결국 벤자민이 울음을 터트렸고, 머슥한 표정으로 벤자민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린 웨이드가 차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은데.”

 “애라고 괜한 거짓말로 거짓 희망을 주는 것도 못할 짓이죠.”

 “가령 죽은 아빠가 돌아온다던가?”


 웨이드의 말에 벤자민의 울음이 그쳤고, 자신과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오는 걸 느낀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그의 말을 받았다.


 “데드풀이잖아요. 돌아올 겁니다.”

 “안 그런 세계 투어라도 시켜줘?”

 “웨이드!”


 그가 시큰둥한 얼굴로 되묻는 웨이드에 소리를 질렀고 처음으로 이름이 불려 놀란 웨이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분노한 그가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벤자민이 그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앞으로 나섰고, 그제야 벤자민의 존재를 깨닫고 웨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리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요. 우리 아빠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하지 말고요.”

 “벤, 나는-”

 “벤자민이라고 부르시죠. 아니면 파커나 웨이드도 괜찮고요, 웨이드씨.”


 차갑게 말한 벤자민이 가방에서 벨트를 꺼내 몸에 두른 뒤 그의 손을 잡아끌었고, 어째선지 울 것처럼 보이는 웨이드의 얼굴을 잠시간 쳐다보던 그는 벤자민의 채근에 못 이겨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작동 버튼을 눌렀다.


 골목 끝에 큰 그림자가 그들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마도, 그의 착각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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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덷거미덷 2017. 11. 25. 19:21 |


Chapter 05_Illusion


 만지면 사라질 것만 같던 청년의 손은 따스했고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웠다. 자기도 모르게 오래 잡고 있었던 탓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놓은 웨이드는 다가갔던 만큼 뒷걸음질 쳐 그에게서 멀어졌고, 청년의 등 뒤에 서있는 토니가 크게 헛기침 소리를 내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우리 둘이 할 이야기가 있을 거 같은데, 핏.”

 “파커라고 부르셔도 돼요, 스타크씨. 당신이라면 토니보다는 이편이 더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자비스?”

 [네.]

 “당신 주인님이 우리 벤자민더러 호칭을 어떻게 하라던가요?”

 [스타크씨로 하라고 하셨죠.]


 자비스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 청년은 안을 쭉 둘러보더니 크게 숨을 내쉰 뒤 주머니에서 작은 패드를 꺼내 따닥였고, 흥미롭게 쳐다보는 토니의 시선을 피해 패드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이 뭘 궁금해 하는지는 대충 알아요. 근데 문제는 알려드릴 수가 없네요. 저작권이나 특효권이 저한테 있는 게 아니라 스타크 인더스트리에 있는 거라서요. 텔레포트 벨트는 정확히는 제 아들이랑 스타크씨가 공동 소유하고 있고요.”

 “아까 그 꼬맹이 이야기 하는 거야, 설마?”

 “그 꼬맹이가 제 아들이거든요, 스타크씨?”


 청년의 설명에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던 토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고개를 까닥인 청년이 잠시 토니를 쳐다보다 데드풀을 피해 구석으로 끌고 가 한참을 속닥이더니 둘이서 툭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산타가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오랜만에 맞는 소리하네.]

 「그도 그럴게 산타는 지난번에 우리가 다 쏴죽였잖아.」

 “하나쯤 남아있을 수도 있지.”

 [어쨌거나 그 골칫덩어리하고도 안녕이군.]

 

 청년은 여전히 토니와 열띤 토론 중이었고, 청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웨이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이랑 결혼했다고?”

 「우리가 뭐 어때서? 엉덩이? 이정도면 합격, 몸매? 끝내주지. 밤일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얼굴은 왜 빼먹냐.]

 「사람이 어떻게 얼굴만 보고 사냐, 병신아. 명언 중에 그거 몰라? 가난이 창문 틈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대문으로 나간다는 거? 우린 그 구멍들을 벤자민 프랭클린 얼굴로 막고 살 수 있는 인간이라고!」

 “웨이드, 박스들한테 닥치라고 전해줘요.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 세계 데드풀, 그러니까 웨이드 윌슨이랑 결혼한 건 맞아요.”


 토니와 한창 대화중이었던 듯 보이던 청년이 갑작스레 뒤를 돌아 웨이드를 향해 말했고, 벙찐 그의 표정을 보더니 키득거리며 제가 귀가 좀 밝거든요, 라고 덧붙인 뒤 토니의 등을 떠밀어 엘리베이터에 태워버리곤 웨이드를 향해 걸어왔다.


 “그래서, 벤자민은 어디 있죠?”

 “스파이더맨이랑 같이 내보냈는데, 토니가.”


 웨이드의 대답에 눈썹을 치켜뜨고 웨이드를 쳐다보던 청년은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고 대충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눈치 챈 웨이드가 그에게 물었다.


 “벤자민은 왜 스파이더맨을 싫어하지?”


 웨이드의 질문에 입을 오물거리던 청년은 대답 대신 웨이드의 뒤에 있던 소파에 주저앉더니 웨이드를 쳐다보며 자신과 조금 떨어진 자리를 툭툭 쳐 앉으라는 시늉을 해보였고, 웨이드가 앉을 때까지 기다린 뒤 입을 열었다.


 “제 세계에서도 당신은 데드풀이었고, 음, 당신이랑 조금 다른 점이라면 히어로였다는 거겠네요. 그리고 스파이더맨이랑 상당히 친했어요. 상당히요.”


 거기까지 말한 청년이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 애매한 표정으로 웃으며 코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냥 짧게 말하죠. 제 남편은 스파이더맨을 구하다 죽었어요.”

 「좋은 죽음이었다, 웨이드 윌슨. 스파이더맨의 완벽한 엉덩이 라인과 허벅지를 살리고 넌 죽은 거야.」

 [이런 남편을 두고 따질 엉덩이와 허벅지가 있다면 말이지.]

 「어쨌든 둘 다 세상에 남긴 거잖아.」

 “그 전까지는,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는, 뭐, 말 안 해도 되겠죠.”


 씁쓸하게 말을 마친 청년이 말을 마친 뒤 웨이드의 얼굴을 살폈고 웨이드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년은 여전히 뒤에 앉아있었고, 그를 등진 채로 센세등을 밝히기 시작한 창문을 쳐다본 웨이드가 청년의 눈앞에 손을 흔든 뒤 창문을 가리키자 청년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에 섰다.


 “이번에 오면 진짜로 혼내주려고요. 토니도 마찬가지예요. 그 동안 방관하다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애가 오지 않는다면서 죽을 상 하고 오기나 하고 말이죠.”

 “너한테 안 알리고 그 쪽 토니가 왔으면 더 웃겼을 텐데 말이야. 아쉽게 됐어.”


 아까보다 더 빠르게 점멸하는 불빛을 보며 갑작스레 대화가 끊긴 게 자신의 탓인가 싶어 웨이드가 청년이 와서 아쉬웠단 소리가 아니였다고 변명해야 되나 고민할 때쯤 그의 옆에서 앞으로 와서 선 청년의 갈색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웨이드가 보고 싶은 건 벤자민 뿐이 아니거든요. 설사 그 마음 때문에 저지른 일로 그 이에게 미안해진다고 해도 말이에요.”


 갑작스런 말에 당황한 웨이드가 답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사이 자꾸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스파이더맨 때문에 만든 자동 개폐식 창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찬바람이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잠시 멈칫했던 스파이더맨이 조심스럽게 벤자민을 내려놓았다.


 “벤자민.”


 혼내줄 거라는 종전의 말과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벤자민을 부른 청년은 그를 향해 뛰어온 아이를 번쩍 안아들더니 아이가 건넨 봉투를 확인하곤 웃음을 터트렸다. 봉투 바깥에 찍힌 로고가 스파이더맨이 자주 가는 핫도그 가게임을 눈치 챈 웨이드가 스파이더맨이 데려갔나보다, 짐작하고 있을 때 청년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가 가방을 앞으로 끌어 열더니 그에게 갈색 봉투와 흰 봉투를 건넸고 그것이 자신의 단골 타코 가게 런치 세트임을 눈치 챈 데드풀이 놀라 쳐다보자 벤자민이 속삭였다.


 “이 쪽 스파이더맨은 생각보다 안 나쁜 거 같아요. 흰 색은 스파이더맨 아저씨 거예요.”


 스파이더맨은 사실 핫도그를 더 좋아한다고 말해줘야 하나 싶던 웨이드는 봉투를 건네자마자 신이 나서 청년과 떠드는 아이의 모습에 곧 떠날 판에 굳이 이야기 해줄 필요가 없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고, 시선을 자신들에게 향한 채로 뒷걸음질 치고 있는 스파이더맨을 불러 세웠다.


 “허니, 아니, 스파이디. 당신 앞에서 다른 사람한테 허니라고 하면 좀 그런가?”

 「그대여, 그 바람 피지 마오.」

 [삑. 제 남편이 아닙니다.]


 무심코 평소대로 스파이더맨을 부른 웨이드는 허니라고 부르기가 무섭게 자신을 향하는 벤자민의 시선에 움찔해 말을 뱉었지만, 말을 받아야 할 청년은 자신과 피터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을 뿐이었고, 애초에 그가 애칭을 부르던 아이언맨에게 성이나 부르자고 못 박던 걸 떠올린 웨이드는 어깨를 으쓱인 뒤 스파이더맨을 향해 흰 봉투를 던졌다.


 “하긴 내가 당신이랑 결혼한 것도 아니고. 스파이디, 이거 받아.”

 [딩동댕. 우린 아직 솔로라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솔로.]

 「데스 보고 싶은 건 나뿐? 레알로 나뿐?」


 데스를 부르짖는 노란 박스의 말에 입을 비죽인 웨이드는 이제 신이 나서 자신이 해준 팬케이크와 핫케이크의 다른 점에 대해, 과학적인 측면에서 떠들고 있는 벤자민으로 시선을 돌린 채로 집 안에 남은 총알 수를 기억해내려 애썼고, 그가 집에 남은 총알 수를 다 기억해냈을 때엔, 창문 앞에 서 있던 스파이더맨은 이미 모습을 감춘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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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Crown #04

썰/덷거미덷 2017. 11. 25. 19:19 |


Chapter 04_핫도그와 타코.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벤자민은 뒤의 피터가 따라오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로 정문을 향해 달렸고, 갑작스런 벤자민의 질주에 당황해 벤자민을 앞질러 뛴 뒤 그의 앞을 가로막은 피터는 씩씩거리는 벤자민을 붙잡은 뒤 키를 낮춰 벤자민과 눈을 맞췄다.


 “벤자민, 좀 있으면 끝날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자.”

 “놔줘요!”

 “뛰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놔줄게.”

 “놔, 달, 라, 고, 요!”


 있는 힘껏 소리 친 벤자민 덕에 1층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된 피터는 재빨리 벤자민을 잡고 있던 손을 놓는 대신 거미줄을 쏴 간접적으로 벤자민의 손을 잡았고, 불쾌한 표정으로 거미줄을 쳐다보던 벤자민이 포기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좀 있으면 타코 가게 런치 타임인데.”

 “뭐?”

 “타코 가게 런치 타임이라고요! 런치 스페셜이 나온단 말이에요!”


 의아한 표정으로 벤자민의 말을 듣던 피터는 벤자민이 나타났던 거리에 데드풀이 자주 가는 타코 가게가 있다는 걸 떠올리곤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며 벤자민 옆에 쪼그리고 앉았고, 샐쭉한 표정으로 벤자민이 피터를 노려보았다.


 “나랑 같이 가면 대화가 끝나기 전에 갔다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웨이드 아빠 것도 사야 돼요.”


 데드풀을 ‘아빠’라고 칭하는 말에 잠시 멈칫했던 피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깊은 한숨을 내쉰 벤자민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피터의 품에 안겼다.


 “벌써부터 안길 필요는 없어.”

 “아, 네.”

 “장난이야, 벤자민.”


 정색을 하며 떨어지려는 벤자민을 한 손으로 안은 피터는 빠른 속도로 건물 밖을 향해 달린 뒤 뛰어올랐고, 자신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이 가해지는 걸 느끼며 속도를 늦췄다.


 가는 길에 사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해봤자 소매치기, 좀도둑이 다였고, 빠른 속도로 해치운 피터는 간신히 제시간에 맞춰 타코 가게에 벤자민을 들여보낸 뒤 주변을 살폈다.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한 거리는 밤이면 더 아름다울 터였다. 어젯밤엔 너무 늦은 밤이었던 탓에 조명이 다 꺼진 시각이었고, 설사 켜져 있었더라도 할렘가에서 지름길로 가는 바람에 그 광경을 보지 못했을 거란 생각에 피터가 오늘 밤에 둘을 데리고 어디 건물 옥상에라도 갈까 생각하고 있을 때 피터의 가슴께에 무언가가 들이밀어졌다.


 “뉴욕 타코의 런치 스페셜이에요. 어제랑 오늘 택시 값이요, 스파이디 택시 기사씨.”


 아이의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온 것과 닮은 새하얀 김이 흰색 봉투 밖으로 피어오르고 있었고, 아이의 손에 쥐어진, 조금 더 큰 갈색 봉투를 응시하던 피터가 봉투를 받는 대신 거미줄을 뿜어 그물 가방을 만들어냈다. 가방을 완성한 피터가 벤자민이 조금이나마 웃지 않을까 싶어 자랑스레 가방 입구를 벌려 벤자민 앞으로 들이밀었지만 시큰둥한 표정으로 피터를 쳐다보던 벤자민은 등 뒤로 메고 있던 가방을 끌러 열었고, 피터가 머쓱한 표정으로 거미줄을 대충 감아 쓰레기통으로 처박았을 때 벤자민의 입 밖으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아.”


 텔레포트 벨트를 챙겨 오랬다던 토니의 말을 들은 피터는 빈손이었던 데드풀을 떠올리곤 벤자민을 향해 그거라면 나중에 보여줘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타코 봉투를 가방에 쑤셔 넣은 벤자민이 난감한 표정으로 피터를 보더니 다급하게 물었다.


 “여기서 제일 맛있는 핫도그 집이 어디예요?”


 의외의 질문에 피터가 당황할 틈도 없이 재빨리 가방을 등에 멘 벤자민이 피터에게 안기며 채근했고,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빡이던 피터는 이내 단골 핫도그 집 방향으로 거미줄을 쏴올렸다.


 웬 꼬마와 나타난 스파이더맨의 모습에 잠시 당황하는 듯 했던 핫도그 가게 사장은 인심 좋게 서비스까지 넣어 벤자민에게 건넸고, 핫도그를 품에 안은 벤자민은 다시 피터의 품으로 뛰어올라 피터를 재촉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

 

 피터의 조심스런 질문에 벤자민이 두 눈을 더 굳게 감았고, 피터가 대답 듣기를 포기 했을 때 벤자민의 입이 벌어졌다.


 “아빠가 온 거 같아요. 통신기에 수신 이력이 남아있는데 아직 못 봤어요.”

 “아빠?”

 “네, 피터 벤자민 파커요! 당신이 죽인 웨이드 아빠 말고 피터 아빠요!”

 “뭐?”


 피터의 거듭된 질문에 짜증이 난 듯 크게 외쳤던 벤자민은 피터의 되물음에도 입을 굳게 다물었고, 피터는 삐끗하려던 균형을 재빨리 잡은 뒤 다시 스타크 타워를 향해 거미줄을 쏴올렸다.


 그 둘이 스타크 타워에 도착했을 땐, 품에 안긴 벤자민도, 핫도그도 아직 따뜻한 채였고 서둘렀던 벤자민을 배려해 토니가 그토록 싫어하는 창문으로 들어가기를 시전한 피터는, 그들이 떠날 때와 숫자는 같지만 사람은 다른 건물 내부 상황에 당황해 하며 벤자민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벤자민.”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청년은 데드풀과 뭔가 진지하게 대화를 하다 자동으로 열린 창문으로 들어선 그들을 향해 돌아섰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아이를 안아들더니 벤자민이 건네는 봉투를 받아들곤 웃음을 터트렸다.


 깔끔한 정장에 깨끗하게 넘긴 머리카락, 다정한 목소리를 한, 자기 자신과 똑같아 보이는 사람을 쳐다보다 그 옆에 서서 벤자민이 주는 타코 봉투를 받아드는 데드풀을 쳐다보던 피터는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뒷걸음질 쳤고, 그 때, 데드풀이 그를 불렀다.


 “허니, 아니, 스파이디. 당신 앞에서 다른 사람한테 허니라고 하면 좀 그런가?”


 데드풀의 말에 피터를 흘깃 쳐다본 청년이 미묘하게 웃으며 데드풀에게 고개를 저었고, 피터나 청년과 다른 의미로 그걸 받아들인 데드풀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내가 당신이랑 결혼한 것도 아니고. 스파이디, 이거 받아.”


 데드풀이 벤자민에게서 받은 흰 색 봉투는 피터를 향해 던져졌고, 깔끔하게 타코 봉투를 받아든 피터는 그 뒤로 무언가 말이 쏟아져 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 뿐이었다. 데드풀의 시선은 피터가 타코 봉투를 받아낸 순간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벤자민과 청년을 향해 돌아갔고, 피터가 그대로 뒷걸음질 쳐 밖으로 뛰어내릴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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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Crown #03

썰/덷거미덷 2017. 11. 25. 19:17 |


Chapter 03_해후.


 깨끗한 하늘 아래의 뉴욕은 밤중에 내린 눈에 덮여 새하얬고, 널따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그간의 추위를 모두 몰아낼 듯 강렬했다.


 토니는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피터 덕에 그간의 이상 현상에 대한 답을 얻은 뒤 기계로 기록되어졌던 데이터를 피터의 눈앞에 늘어놓았지만 피터는 평소와 달리 스크린들에 집중하지 못한 채 스크린을 대충 훑어보더니 스크린 앞을 떠나 창밖을 쳐다 볼 뿐이었다.


 “평행세계란 게 수도 없이 많아서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라. 그리고 너와는 상관도 없는 일이고.”

 

 피터의 침묵과 평소와 다른 행동을 참다못한 토니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고, 창문에 입김을 불어 발자국 모양을 만들던 피터가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둔 채 대답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토니.”

 “아니면 뭐, 진짜로 걔네 세계 스파이더맨이 쳐들어올까봐, 그거라도 걱정 돼서 그래? 이야기 들어보니 그 쪽 데드풀은 죽은 것 같고 그래봤자 피터 파커잖아, 피터. 잘 설명하면 다 해결될 문제라고. 애도 데드풀도 봤겠다, 돌아가면 될 문제고. 한 번 이랬으니 잘 단속하겠지.”

 “토니, 왜 그 애가 스파이더맨을 적대할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토니가 입을 열어 무언가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고, 그가 피터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자비스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데드풀과 벤자민 네이튼 파커-웨이드가 건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주인님.]

 “약속대로 해줘요, 토니.”


 창문에서 떨어진 피터가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머리에 뒤집어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토니가 미리 준비해둔 기계를 가동시키며 대답했다.


 “네, 분부대로 합죠, 스파이더맨.”


 토니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한숨을 내쉰 피터가 초조하게 손가락을 놀리며 소파에 앉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에서 어제와 다른 옷에 똑같은 가방을 멘 벤자민과 사복을 입은 데드풀이 내렸다.


 건물 내부를 대충 둘러본 벤자민은 피터를 흘깃 쳐다본 뒤 데드풀에게 뭐라 속삭였고, 낮게 웃은 데드풀이 안을 살피다 어느 쪽을 가리키자 벤자민이 웃음을 터트리며 구석에 서 있던 더미를 향해 뛰었다.


 “아는 사이라는데.”


 벤자민의 모습을 웃으며 쳐다보던 데드풀이 토니를 향해 걸어오다 그의 못마땅한 표정에 질문이 떨어지기도 전에 대답한 뒤 팔을 걷었고, 온통 흉터 투성이의 팔에서 시선을 돌려 벤자민을 쳐다본 토니가 혀를 찼다. 벤자민은 그 사이에 더미와 친구가 된 듯 이해하기 힘든 행동으로 더미를 놀리고 있었고, 만약 더미가 기계가 아니었더라면 벤자민이 동생이라도 놀리는 것처럼 보일 법한 행동에 고개를 저은 토니가 주사기를 손에 들며 말을 받았다.


 “쟤랑 아는 사이인 더미는 여기 없어.”

 “거기선 당신이 쟤 대부래.”


 불친절한 토니의 태도는 관심도 없다는 듯 제 할 말만 하는 데드풀의 시선은 벤자민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고, 토니는 그런 데드풀을 유심히 살펴보다 있는 힘껏 데드풀의 팔로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토니의 의도와는 달리 데드풀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로 채혈을 마쳤고, 이미 뽑아놓은 피터의 데이터와 분석 중인 데드풀의 데이터를 허공에 띄운 토니가 턱짓으로 벤자민을 가리켰다.


 “알겠지만 쟤 것도 뽑아야 돼.”

 “당연하고 지당하신 말씀이시고요, 벤?”


 데드풀의 부름에 벤자민이 한달음에 토니와 데드풀의 곁으로 달려왔고 뒤쪽 소파에 앉아있던 피터가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피터가 그들 곁으로 다가오기가 무섭게 은근슬쩍 피터에게서 조금 더 먼 쪽으로 발을 옮기는 벤자민을 본 토니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미리 준비한 의자에 벤자민을 앉혔고, 벤자민의 뒤로 데드풀이 섰다.


 “벤자민, 난 토니 스타크고-”

 “토니 삼촌이라고 불러도 돼요?”

 “뭐?”

 “사실 거기선 토니라고 부르는데 안 된다고 할 거잖아요. 스타크씨는 너무 딱딱하고 토니 삼촌 어때요? 토니하고 나중에 내가 아들을 낳으면 미들 네임을 토니라고 주기로 했거든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아!”


 벤자민이 신나서 떠드는 사이 바늘이 벤자민의 팔로 파고들었고, 데드풀의 힐난하는 눈초리를 피해 기계에 채혈한 혈액을 넣은 토니가 벤자민에게 말했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난 네가 아는 그 토니 스타크가 아니고 그런 사람이 될 생각도 없어, 벤자민 네이튼 파커-웨이드군. 그러니까 그냥 스타크씨라고 불러. 자비스?”

 [네, 주인님.]

 “여기 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결과 알려드려.”

 [네. 벤자민 도련님의 유전자와 피터 벤자민 파커, 그리고 웨이드 윌슨, 일명 데드풀의 유전자가 일치합니다.]

 “애 상태랑 위협요인이 있는지도.”

 [상태는 매우 양호하고 위협요인은 현재로선 딱히 없군요.]


 자비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벤자민과 데드풀이 하이파이브를 한 뒤 이상한 주먹치기를 마쳤고, 데드풀이 벤자민을 의자 아래로 내려주었다. 착잡한 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토니는 시선의 끝에서 여전히 멀뚱멀뚱 서 있는 피터를 발견하곤 결심한 듯 셋이 모여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가 데드풀을 잡아끌었다.


 “나랑 이야기 좀 하지, 데드풀. 스파이디, 꼬마 좀 데리고 나가 있어. 스타크 타워 구경이라도 시켜주던가.”


 토니의 말에 무언가 말을 하려던 벤자민은 토니의 무시무시한 표정에 말을 삼킨 뒤 피터를 내버려둔 채로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엉거주춤 서 있던 피터가 그 뒤를 따랐다.


 애초에 그 층에 멈춰서있던 엘리베이터의 문은 금세 열렸고, 불쾌한 표정으로 토니를 쏘아보던 벤자민은 문이 닫히기 직전 토니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뒤 피터와 함께 문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기함을 하는 토니와 달리 키득거리던 데드풀은 딱딱하게 굳은 토니의 표정에 웃음을 멈추었고, 그런 그의 앞으로 토니의 손이 내밀어졌다.


 “텔레포트 벨트.”

 “천하의 아이언맨도 실수를 할 때가 있나보네. 내 손 빈 거 안 보여? 당연히 애 가방에 있지.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랬어?”


 토니의 말에 능글맞게 웃은 데드풀이 소파에 털썩 앉더니 대뜸 더미를 불러 ‘스카치 온 더 락’을 외쳤고, 끼잉거리며 바로 가고 있는 더미를 막은 토니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데드풀의 앞에 서서 말했다.


 “쟤가 스파이더맨을 싫어하는 이유가 뭐야?”

 “3일이면 갈 앤데 그걸 물어봐야 되는 이유는 뭘까요~”

 “쟤가 네 아들이 아닌 건 알지?”

 “자비스!”

 [네, 데드풀씨.]

 “됐어, 자비스. 내 이야기가 그게 아닌 건 알잖아.”


 모자도 모자라 후드 집업의 후드까지 뒤집어쓴 데드풀의 얼굴은 한낮의 태양도 비출 수 없었고, 애꿎은 그림자만 토니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그의 발치를 피해 비스듬히 몸을 눕혔다.


 “고작 3일이야. 예수가 죽었다 살아난 3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닿지도 못하는 3일 말이야, 토니.”


 조금은 날카로워진 데드풀의 목소리가 적막 속에 울렸고, 여전히 허공에 띄워진 스크린을 향해 돌아갔던 얼굴이 토니의 키를 넘어 위로 향했다.


 “가족을 가진 적도 없고 가진 기억도, 가질 가능성도 없으니 이번 기회에 아빠 노릇 좀 해보려는 게 나빠? 난 올해엔 좀 얌전히 지냈더니 산타가 이런 선물이라도 주려나 싶어 넙죽 받을 생각인데?”

 “크리스마스 선물은 크리스마스에 받는 게 산타가 주는 거고, 이건-”

 “제 아들을 두고 악마가 준 선물이라고 하면 서운할 거예요, 토니.”


 토니의 말을 막고 실내로 울려 퍼진 목소리는 토니에겐 익숙했고, 데드풀에겐 조금 낯선 것이었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을 본 둘은 그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챘다.


 뒤쪽으로 부드럽게 넘겨진 머리칼은 딱 봐도 벤자민의 것과 같은 색의 것이었고, 그 아래 웃음기 어린 눈매는, 하룻밤 사이에 데드풀의 눈에 박히도록 봐온 것과 몹시도 닮아있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젊은 청년은 둘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사이 건물 내를 천천히 걸으며 허공에 떠올라 있는 데이터들을 살피다 정확히 2주 간격으로 감지된 이상 현상이 담긴 데이터 앞에서 멈춰 서서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데이터를 한 손으로 날려버렸고, 당황한 토니가 다가오자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이번이 처음 가출이 아닌가 보죠?”

 “애 관리가 소홀한가봐, 그 쪽 피터 파커는.”

 “이쪽 피터 파커한테 애가 있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있나보죠?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리고 그건 이쪽 세계 당신 탓도 있어요, 스타크씨. 매번 벤자민이 하는 짓이라면 감싸주고 보거든요. 그래야 성장이 빠르다나 모라나. 품안의 자식이라고 보호만 해선 못 쓴다고 말이죠.”

 

 부드러운 목소리로 토니의 말을 맞받아친 청년은 토니를 지나쳐 데드풀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고, 데드풀이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더니 멈춰 서서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제가 벤자민 네이튼 파커의 잘생긴 아빠를 맡고 있는 피터 벤자민 파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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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Crown #02

썰/덷거미덷 2017. 11. 25. 19:16 |

노래 올리는 걸 깜빡함



Chapter 02_Door


 그러니까 얘가 우리 아들이라고?」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아들은 아니지. 정확히는 우리 유전자를 반 받은 거지]

 「그럼 힐링 팩터도 있나?」

 [말 들어보니까 저쪽 데드풀은 죽은 거 같던데, 과연 그럴까.]


 박스들의 화제는 이제 힐링 팩터로 넘어가고 있었고, 잠시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웨이드는 흰색 시트 위에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잠든 벤자민의 가방을 등에서 벗겨낸 뒤 가방 지퍼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아마도 사진을 끼워왔을 일기장은 온갖 것들이 붙어있어 두꺼웠고, 대충 페이지를 넘기던 웨이드는 온통 얼룩이 져 알아볼 수 없는 페이지들에서 손을 멈춘 뒤 일기장 맨 뒤에 사진을 조심스레 끼워 넣곤 표지를 덮어 일기장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가방엔 생각보다 든 게 얼마 없었고, 조난 대비용이라 적힌 스낵 봉지를 마지막으로 가방 구경을 마친 웨이드가 다시 내용물을 넣기 위해 가방을 크게 벌렸을 때, 가방 바닥에서 붉은 빛이 반짝였다.


 아마도 가방을 크게 벌리지 않았으면 보지 못했을 아주 작은 빛은 가방 안감 아래에서 단 한 번 반짝였다 사라졌고, 매끄러운 안감 아래로 느껴지는 이물감에 잠시 고민을 하던 웨이드는 이내 가방 바닥에서 손을 떼곤 다시 내용물들을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낡아빠진 키티 가방의 옆엔 DP♡BP 가 새겨져 있었고, 그 문구를 보고 피식 웃은 웨이드는 뻑뻑한 지퍼를 조심스럽게 닫은 후 소년의 점퍼를 벗긴 뒤 텔레포트 벨트를 조심스레 풀어 살폈다.


 자신이 쓰는 것과는 달리 충전바 표시가 별도로 없는 벨트 중앙은 녹색 빛을 은은히 발하고 있었고 충전이 다 되려면 3일은 걸릴 거라던 벤자민의 말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던 웨이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벤자민이 거짓말을 한 것일지 아니면 그 쪽은 충전바 표시 색이 다른 것일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벤자민의 입으로 정확히 듣지 않는 한 진실여부를 알 수 없는 고민은 나중으로 미뤄둔 데드풀은 깊은 잠에 빠져든 벤자민을 조심스레 호텔에 갖춰진 가운으로 갈아입힌 뒤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벤자민의 모습을 살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브루넷은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밀크 초콜릿색이었고, 심심찮게 드러나는 장난기는 자신의 것이었지만, 농담은 따지자면 스파이디의 것에 가까웠다. 놀랍도록 자신을 닮은 푸른 눈은 자신을 살필 때면 이따금 깊은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췄고, 소년의 발언으로 추측하건대, 그 쪽 세계의 자신은 이 귀여운 아들을 남겨둔 채 죽은 것이 분명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건 자연스러운 죽음은 아니었을 거고.


 문제는,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벤자민은 이야기가 그런 쪽으로 흘러간다 싶으면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우스웠던 이야기들로 화제를 바꾸어갔고, 웨이드는 굳이 소년에게 하기 싫은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은 채로 벤자민이 꺼낸 화제에 맞추어 이야기를 이었다.


 고작해야 3일이었다.


 아마도 벤자민의 기준에서 보호자에게 들키지 않고 자신의 곁에서 웨이드 아빠와 닮은 점을 찾아내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최장의 기간일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리 제멋대로 사는 자신일지라도 상도덕이라는 것이 있었고, 또 그의 경험상, 그러니까 그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감히 말하건대, 이런 건 절대로 한 번으로 끝날 수 없을 법한 일이었다.


 턱을 괴고 있던 오른손이 평소라면 버티고도 남았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뻐근하게 아파왔고, 턱을 떼고 흉터투성이의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피던 웨이드의 귓가로 흰 박스가 속삭여왔다.


 [얘도 언젠간 깨달아야 돼. 우리가 지 아빠랑 같지 않단 걸 말야.]

 “그렇겠지.”

 [남 이야기 하듯 하지 마. 우리가 하고 있는 짓을 보라고. 마치 우리가 얘 아빠라도 된냥 굴고 있잖아. 챙겨주고, 걱정하고, 손을 잡아주고. 그건 그냥 헛된 희망으로 애를 놀리는 거에 불과해. 쟤 앞에 있는 건 굳게 닫힌 문이야. 아무리 두드려도 울리지 않는, 문!]

 「가끔은 행복감에 젖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어린이한테는 꿈과 희망을 줘야 된다는 거 몰라?」

 [도대체 누가 행복감에 젖어있다는 건데? 우릴 볼 때마다 쟤가 행복해하는 거 같아? 아니면 우리가 행복하나? 다른 세계 누군가는 정상적인 사랑에 빠져서 정상적인 가정을 이뤘다는 생각에? 우리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시끄러.”

 [우리가 그토록 행복하게 살다 죽었다면 쟨 저런 어린 애가 아니었겠지! 다 커있었을 거고, 우리 죽음을 받아들일 나이였을 거라고! 가짜 지 아빠라도 볼 희망에 이런 위험한 짓을 할 일도 없었을 거고-]

 “시끄럽다고.”

 [우린 또 실패한 거야!]

 “시끄러워!”


 의자 손잡이를 내리치며 일어선 웨이드가 낸 소리에 놀라 벤자민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고, 놀란 벤자민을 달래기 위해 웨이드가 침대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 사이 흰 박스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세계가 바뀌어도 우리가 엉망이고 늘 실패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우린, 아니. 넌.]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거야.]


 마지막 일격을 가한 흰 박스가 마침내 침묵했고, 울기 일보 직전이었던 벤자민을 달랜 웨이드는 소년을 다시 침대에 눕힌 뒤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주곤 그 위로 손을 토닥였다. 침대 옆의 협탁엔 새까만 글록이 번들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의 안식처는 호텔에선 너무나도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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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Crown #01

썰/덷거미덷 2017. 11. 25. 19:12 |


Chapter 01_Dream come true


 한 밤 중의 뉴욕은 평화로웠다. 평화로운 모습과 달리 벌써 두 달째 원인 없이 울리는 스파이더 센스는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고, 두 달간의 기록을 기준으로 아예 미리 그 곳으로 와 잠복하고 있던 피터는 한 시간째 데드풀의 수다와 끊임없이 울리는 스파이더 센스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자기야, 내가 악몽을 꿨다는데 관심도 없어 보이네?”

 “그러니까, 그냥 꿈이잖아요, 데드풀. 그리고 애초에 전 당신 자기가 아니라고요! 데드풀?”


 참다 참다 소리를 지르던 피터는 건물 옥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던 자신의 곁에 와서 선 데드풀에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다음 순간, 데드풀이 휘청이더니-


 “여러분, 이 사람이 내 자기예요! 이러면서도 나에 대한 애정을 부정한다니까요!”

 “내일 여기 청소할 환경미화원 분이 불쌍해서 이러는 거예요! 제발, 좀!”

 “이제 그만 인정을-”


 추락하는 데드풀을 간신히 붙잡아 인도에 내려놓은 피터는 계속해서 쏟아질 데드풀의 수다에 귀를 막을 준비를 했지만, 피터의 예상과 달리 건물 사이 골목에 시선을 돌린 데드풀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서 있었고,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피터는, 골목 끝의 인영에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두컴컴한 골목 안의 가로등은 모조리 꺼져 있는 채였고, 어디선가 굴러들어간 낙엽들로 지저분했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골목 끝의 그 인영은, 검은 그림자의 모습으로 웅크린 채였다.


 흘려듣기는 했어도 요점은 다 기억하고 있던 피터가 데드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데드풀이 골목을 향해 발을 내딛었고, 피터의 손이 그를 가로막기도 전에 골목 안으로 총알이 발사되었다.


 적막하기만 했던 골목 안쪽의 창문 몇 개에 불이 켜졌고,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천천히 일어서는 걸 본 피터가 재빨리 데드풀의 손에서 총을 빼앗곤 어디서 나온 건지 다른 손에 들린 총마저 빼앗은 뒤 데드풀의 앞을 막아섰다.


 “그만해요! 그냥 꿈이잖아요, 데드풀.”

 “꿈? 이게 꿈이란 말이지? 그럼 너도 진짜가 아니겠네.”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린 데드풀이 카타나를 빼어들었고, 데드풀의 이상 행동에 질겁한 피터가 골목 안쪽으로 뒷걸음 쳤을 때 작은 아이 하나가 피터를 지나쳐 데드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빠!”


 앳된 목소리의 소년의 등엔 낡아빠진 분홍색 키티 가방에 메어져 있었고 풍성한 브루넷의 머리칼은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였다.


 “아빠?”


 갑작스런 소년의 포옹에 데드풀이 소년의 말을 중얼거리며 경계 태세를 푼 사이 피터가 그의 손에서 칼을 거둬갔고, 멀리서 들리기 시작한 사이렌 소리에 소년이 고개를 들어 데드풀과 눈을 맞춘 뒤 그를 재촉했다.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어디로든 가야되지 않을까요?”


 묻기는 데드풀에게 묻고 자신을 쳐다보는 소년의 눈빛에 한숨을 내쉰 피터는 경찰차를 피해 둘을 어떻게든 들어 언젠가 가보았던 데드풀의 집 근처 골목에 둘을 내려놔야만 했고, 스파이더 센스는 어느 새 잠잠해진 채였다.


 그 골목에서 데드풀 집 근처로 오기까지 문제의 소년은 말을 아끼며 데드풀의 품에 안긴 채 눈조차 감고 있었기에 데드풀이나 피터, 둘 다 아무런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나이도 어려보이는 소년을 데드풀의 집에 놓고 갈 수 없었던 피터가 결국 쪼그리고 앉아 데드풀의 한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있는 소년과 눈을 맞췄다.


 “부모님은 어디 계셔?”


 피터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소년은 데드풀의 손을 잡은 채로 데드풀의 다리 뒤로 숨어버렸고, 머쓱해진 피터가 일어나 데드풀에게 턱짓으로 소년을 가리키자 머리를 긁적인 데드풀이 소년에게 물었다.


 “꼬마야, 너 부모님은 어디있냐.”

 “여기예요.”


 해맑게 웃은 소년이 데드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머리를 부볐고, 난감해진 데드풀이 소년과 키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낮춘 뒤, 마스크를 벗었다.


 “니네 부모가 이렇게 생겼냐.”

 “네!”

 “데드풀, 진짜로 어디에 애 하나 있는데 나 몰라라, 한 거 아니에요?”

 “나야 모르지.”

 “아니거든요!”


 피터의 질문에 둘이 동시에 말했고, 성이 난 듯 데드풀의 손을 붙잡은 채로 피터 앞으로 나온 소년이 씩씩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빠는요! 엄청 대단한 히어로였어요! 세상도 구하고! 빌런도 무찌르고! 그리고 돈도 많이 벌고! 얼굴은 못 생겼지만, 다른 아빠가 잘생겨서 괜찮댔어요! 둘이 합치면 평균이랬다고요!”

 “다른 아빠?”


 소년의 말에 데드풀이 되묻자 소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데드풀의 손을 놓은 뒤 가방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더니 지퍼 끝까지 올리고 있던 점퍼를 벗었고, 소년의 가슴을 감싸고 있는 익숙한 벨트를 발견한 데드풀이 낮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텔레포트 벨트.”

 “아저씨가 내 진짜 아빠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지구 몇이냐, 도대체. 내가 남자랑 해서 이런 애를 낳았다고?”

 “정확힌 유전자 혼합이랬어요, 피터 아빠가 그러는데 그건 우리 세계에서만 된대요.”

 “피터 아빠? 그 피터가 설마 피터 벤자민 파커는 아니겠지?”


 소년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자신의 이름을 꺼낸 피터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고, 피터의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린 소년이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맞는데요. 그래서 제 이름도 벤자민 네이튼 파커-웨이든데요.”


 소년의 말에 아연실색한 피터가 속으로만 욕을 하며 머리를 짚었고, 피터의 질문을 별 생각 없이 들은 데드풀이 소년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미들 네임이 네이튼이야? 애초에 니 이름은 그 세계 내 남편 미들 네임이고?”

 “벤자민은 할아버지 이름이랬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자고 한 건 웨이드 아빠였고요!”

 “내가?”


 데드풀의 질문에 신이 난 벤자민이 신이 나 이것저것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가방과 점퍼를 주운 피터는 자신을 닮은 브루넷과 마스크를 벗은 데드풀의 눈과 똑 닮은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불이 꺼진 건물들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소년의 말을 들어봐선 무슨 이유에서건 소년은 웨이드 아빠를 보지 못하는 상황인 듯 했고, 그를 보려고 몇 차례 이 세계에 온 듯 했다. 아마도 요 근래 원인을 찾지 못했던 스파이더 센스 발동 원인은 이 소년일 가능성이 높았다. 설사 아무 해를 끼칠 생각 없이 한 짓이라 할지라도 이 기현상을 감지한 게 비단 그 뿐만은 아닐 가능성 또한 높았고, 그 쪽 세계에 있을 소년의 보호자가 이 소년의 실종을 깨닫기까지 걸릴 시간이나 실종 원인에 대해 어떻게 추측할 지는 미지수였다.


 당장 보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묻기 전엔 모르는 일이었지만, 설사 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어린 소년을 이 한밤중에 저렇게 지친 상태로 보낸다는 것도, 엉망일 게 분명할 데드풀의 집에서 재운다는 것 또한 그의 기준에 있어선 옳지 못한 일이었기에 남은 선택지 앞에서 피터가 망설이는 사이 데드풀이 소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 뭘 상상하든 그 끝을 보게 될 테니까 각오해!”

 “우리 웨이드 아빠 방도 엉망이었어서 괜찮아요!”

 “그거보다 더할걸?”


 데드풀의 말에 소년이 키득거리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피터는 둘이 어느 한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리자 재빨리 둘의 앞을 가로 막아섰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데드풀이 피터의 손에서 가방과 점퍼를 받아갔다.


 “고마워, 스파이디. 아직 우리 자기가 누군지 모르지? 얘는 뉴욕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야, 벤.”

 “데드풀, 진짜로 당신 집에 얘를 데려가게요?”


 피터가 질문과 동시에 다시 가방과 점퍼를 빼앗아 들었고, 벤자민의 손에 잡혀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데드풀이 다시 가방과 점퍼를 빼앗았다.


 “그럼 애 아빠가 여기 있는데 애를 어디로 보내?”

 “정확힌 당신이 애 아빠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 몸은 성한건지도 모르고, 솔직히 말하면 정체도 알 수 없는 애를-”

 “저리 가시죠, 스파이더맨씨.”


 피터의 말을 끊은 벤자민이 자신의 가방과 점퍼로 향하던 피터의 손을 가로막으며 피터의 말을 끊었고, 싸늘한 벤자민의 어조에 피터가 멈칫한 사이 소년은 데드풀의 손에서 점퍼와 가방을 빼와 다시 몸에 걸쳤다.


 “이 사람이 내 진짜 아빠가 아닌 건 알아요. 그걸 착각할 만큼 어리지도, 멍청하지도 않고요. 난 그냥, 그냥 유전자만 같더라도 내 아빠랑 똑같은 사람이 살아있는 게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녹화되어지고 녹음되어진 게 진짜 사람과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여태 데드풀에 해맑게 웃던 모습과 생판 다르게 얼굴을 굳힌 벤자민이 등에 걸치기 전에 가방에서 꺼낸 사진을 피터에게 건넸고, 사진을 건네받은 피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마스크 덕에 그의 얼굴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난 그냥, 내가 기억하는 그 눈동자가 기록되어진 데이터대로 반짝이는 게 아니라, 지고 뜨는 빛에 의해 반짝이는 걸 내 눈으로 보고, 녹음되어진 대로 울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짜 성대에서 울려나오는 진짜 목소리를 내 귀로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 정체가 궁금하시다면 내일 스타크 타워로 가죠. 여기도 토니 스타크씨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 정도면 되나요?”

 “벤자민, 하지만 진심으로 말하는데 이 사람 집은 네가 잘 곳이 못 돼. 난 사실 그게 걱정이 돼서 말한 거야.”


 희미한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진 속엔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이 데드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었고, 그 데드풀의 품에 안긴 벤자민이 양 손으로 브이를 한 채 데드풀과 함께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벤자민에게 건네기 전 다시 한 번 사진을 본 피터가 앞으로 내밀어진 벤자민의 손에 사진을 얹어주었고, 조심스레 사진을 받아든 벤자민이 사진을 잠시 쳐다본 뒤 데드풀에게 건네곤 피터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그럼 어디 가서 잘까요? 설마 당신 집이라고 할 건 아니죠? 우리 세계 스파이더맨도 자기 정체 밝히는 일이라면 질색하거든요.”

 “아니면 스타크 타워라던가-”

 “토니 스타크씨가 아저씨도 타워에 들여 주신다면요. 근데 이 세계에서 데드풀은 그렇게 반갑지 않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스파이디, 정 걱정된다면 그냥 호텔에 가서 자는 방법도 있어.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이왕 여기 온 거 호화롭게 놀다 가자, 벤. 너네 아빠만 돈이 많은 게 아니라 나도 엄청 많이 벌거든!”


 어색한 분위기 틈바구니를 깨고 끼어든 데드풀이 벤자민의 가방을 열어 사진을 조심스레 넣은 뒤 벤을 품에 안았고, 익숙하게 소년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본 피터가 한숨을 내쉬며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데려다 드릴게요.”

 “새벽의 뉴욕이 택시가 잘 안 잡히기는 하지.”


 유쾌한 목소리로 피터에게 답한 데드풀이 스파이디 택시를 외치며 벤을 꼭 껴안았고, 데드풀의 품 안으로 파고드는 벤자민을 착잡하게 쳐다보던 피터가 둘을 거미줄로 묶은 뒤 뉴욕 상공으로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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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ken Crown #00

썰/덷거미덷 2017. 11. 25. 19:11 |


Chapter 00_Shadow


 짧아진 낮의 끝에 늘어진 그림자에 덮인 골목은 어두웠다. 지평선 아래로 떨어진 태양도, 지구의 그림자 속에 숨은 달조차 없는 하늘엔 붉게 물든 구름만이 하릴없이 떠다니고 있었고 하늘은 어느 새 붉은 빛조차 잃은 채 보랏빛으로 질려가고 있었다. 이른 시각 탓에 가로등은 꺼져있었고, 빛이라곤 없는 골목의 끝에 있는 덩어리진 그림자에 눈을 가늘게 떴던 그는 이내 앞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그의 그림자가 그의 발뒤꿈치를 쫓고 있었다.


 골목 끝의 그림자는 미동 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고, 어둠은 빠르게 골목을 덮어갔다. 침묵 속에서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가 빛이 남기고 간 빈 공간을 채웠고, 바싹 마른 낙엽이 바스라지며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여전히 그 그림자를 향해 걷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내 그가 평소라면 그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법한 거리에 이르렀을 때 어둠이 그 둘 사이를 완연히 채웠고, 여태껏 한 치의 움직임도 없던 그림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응시했다.


 [곧, 찾으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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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상

썰/덷거미덷 2017. 7. 20. 16:03 |



잔상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있었던 것들이 남긴 잔해는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채 버려진 채였다.



Chapter 1_우산.



네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내 자린 거기야.


빛을 내지 않는 날에도 어둠 속에 달이 존재하듯,

네가 나를 보지 않는대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어두운 밤, 달이 네 머리끝에서 떠나지 않듯, 그렇게.



 긴 그림자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선 태양 덕에 끈질기게 땅에 들러붙은 여름날이었다.


 평소와 같은 하루를 마친 그의 머리 위에선 나무 어딘가에 붙은 매미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드높였고, 얼기설기 얽어진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그림자는 희미하게 올라온 어둠에 섞여 뭉그러진 모양새로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띵똥]


 익숙한 알람음에 핸드폰을 꺼내 연 그는 주르륵 늘어선 문자 중 가장 아래쪽에 있는 문자 내용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수고했어, 오늘도.」


 간결한 내용으로 주르륵 늘어선 문자들은 답 하나 없이도 매일 같이 같은 시각 그의 핸드폰으로 날아왔고, 어째선지 유독 이 문자만 비활성화 되는 차단탭에 열불을 낼 기운조차 잃은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버스 정거장에 섰다.


 그리고, 그가 버스 정거장을 알리는 표지판 옆에 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급작스레 쏟아진 폭우에 조용히 욕설을 뱉은 그는 내일 당장 제출해야 하는 노트북이 있는 가방을 끌어안은 채 오늘따라 늦는 버스가 올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우산이 없나봐요?”


 기척 없이 다가온 사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우산을 그의 쪽으로 기울여주었고, 이 낯선 사람의 친절을 받아들일지 말지 잠시 고민하던 피터는 이미 반쯤 젖은 가방에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그러게요. 갑자기 비가 이렇게 올 줄은 몰랐거든요.”

 “여름비가 늘 이런 건 아니죠. 보통은 이이이렇게 찌푸리고 있다가 와장창 쏟아지니까요, 그쵸?”


 말쑥한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은 사내는 피터가 웃음을 터트리자 비죽 웃은 뒤 멀찍이서 모습을 드러낸 버스를 가리켰고, 아무생각 없이 탄성을 지르며 도로를 향해 한발자국 내디뎠던 피터는 자신이 사내에게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대해 말한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이게 제가 타려는 버스인 줄은 어떻게 아셨죠?”

 “전 그냥 버스가 오길래 가리킨 건데요.”

 “아하.”

 “운 좋게 맞췄나보네요.”


 씩 웃은 사내는 우산을 씌워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버스에 오르려는 피터를 잡아 세운 뒤 쓰고 있던 우산을 피터의 손에 쥐어줬고,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말했다.


 “전 우산이 하나 더 있거든요.”

 “그럼 왜-”

 “잘생긴 남자 보면 씌워주려고 일부러 숨기고 있었죠. 잘 가요, 잘생긴 청년.”

 “어, 네. 감사합니다.”

 “거, 탈거요, 말거요?”


 버스 문을 연 채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성질이 난 듯 둘을 향해 외쳤고, 버스 문이 닫히기 직전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피터가 서둘러 버스 창문으로 향했지만 사내는 이미 버스 정거장에서 등을 돌린 채 어디론가 걸어 사라지고 있었다. 있다던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피터 파커. 수고했어, 오늘도.]



Chapter 02_연락.


끝나지 않는 이야기란 없어.

끝을 모를 이야기라면 또 모를까.


 사내의 단서를 찾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집에 도착해 탁한 하늘빛의 우산을 접던 피터는, 우산을 돌돌 말던 중, 우산에 달린 천에 적힌 전화번호를 한참이나 노려보다 잠금쇠를 채워 현관문 옆에 우산을 세워두었고, 여전히 차단이 되지 않는 발신자표시제한으로 날아오는 문자들이 띄워진 폰화면을 한참이나 톡톡 두들겼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 박힌 폰번호가 핸드폰에서 눌리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매일 같은 시각 날아오던 문자가 오는 일 또한 더 이상은 없었다.


 그 다음 날 바로 버스 정거장을 바꾼 그로서는 사내가 또 다시 그 버스 정거장에 왔는지 알 방법이란 없었다.


 [띵동.]

 [번호 일부러 남겼는데 우산, 안 돌려줄 건가 봐요?]


 갑작스레 울린 핸드폰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피터는 꺼져있던 핸드폰 화면에 뜬 문자 미리보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 순간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여튼, 수고했어요, 오늘도.]


 익숙한 문구에 섬짓함을 느낀 피터는 여전히 울리지 않는 스파이더 센스를 탓하며 핸드폰과 우산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우산 하나 버렸구나 했어요, 사실.”


 그 날과 마찬가지로 말쑥한 차림새를 한 사내는 갑자기 튀어나오라는 그의 말에도 순순히 그러겠다 응했고, 잠시 망설이던 피터가 순전히 심술로 고른 피터집 근처의 24시 카페의 위치만 물어봤을 뿐이었다.


 어두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내의 취향인 듯 보이는 후드가 달린 검은색 양복과 빨간 와이셔츠, 그리고 검은 넥타이는 피터의 눈에 익숙했고, 피터의 시선을 의식한 듯 어깨를 으쓱인 사내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 얌전한 옷이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근데 또 어울리기도 해서 그냥 똑같은 걸로 잔뜩 사버렸어요.”

 “똑같은 걸로요?”

 “네. 한 7벌 정도?”

 “7벌?”

 “일주일에 하나씩 일곱벌. 갈아입긴 해야 되니까요. 속옷은 헷갈릴까봐 색깔별로 요일을 정해놓긴 했는데-아. 너무 사적인 이야긴가요?”


 머리를 긁적인 사내는 때마침 맹렬하게 울리기 시작한 진동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빈자리 곁에 기대어진 하늘색 우산을 응시하던 피터는 더 이상 사내에게 말려들지 않겠다 다시 다짐한 후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오는 사내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아, 내 이름은 웨이드 윌슨일 거예요. 아마?”

 “아마라고요? 자기 이름도 몰라요?”

 “음…말하자면 긴데, 기억상실증이라서 앞쪽 기억이 훅 날아갔지 뭡니까, 하하. 어느 날 일어나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남아있는 거라곤 그 날 테이블에 놓여져 있던 내 이름, 내 신상, 뭐 이런 거였고, 몇날 며칠 어디로 우산을 가지고 나가라, 작별인사는 뭐라 해야 한다 이런 것 뿐이었어요. 가령 피터 파커. 수고했어, 오늘도. 라던가.”


 그제야 가볍게 던지는 인사치곤 어색한 끼가 다분했던 작별인사를 떠올린 피터는 그게 외워서 나온 인사여서 그렇다는 걸 깨닫곤 이 사내가 어느 빌런이 보낸 미끼일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어색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내가 피터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잘생겼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어요, 피터. 당신 이름이 맞죠? 피터 벤자민 파커.”

 “최근에 접촉한 사람이 누구죠?”

 “접촉한 사람이요? 애초에 제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서-”

 “당신을 챙겨주는 사람 정도는 있을 거 아니에요?”


 피터의 질문에 눈썹을 치켜 올린 사내는 뭔가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 양복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고, 반사적으로 사내의 손목을 잡아챈 피터는 사내의 손에 잡힌 꼬깃꼬깃한 종이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죠?”

 “펴보시면 아시겠네요. 안 그래도 당신 주려고 꺼내던 거였어요.”


 몇 번이나 보고 다시 접었는지 꼬깃꼬깃해진 종이 안쪽엔 이름부터 시작해 사내의 신상정보로 추측되는 것들이 주르륵 적혀 있었고, 맨 마지막 문단에 이른 피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갑작스레 쏟아지려는 눈물들을 참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7월 중순 언젠데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니까 매일 우산을 챙겨 나가도록. 갈색머리에 어벙하게 생긴 애가 비를 맞고 있을 건데 우산 씌워주고 말도 좀 걸어주고 웃게 해줘. 작별인사도 폼나게 해주라고. 가령-」


 “피터 파커, 수고했어, 오늘도.”


 마지막에 적힌 말을 중얼거리자마자 그 날의 비처럼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자신이 왜 우는지 모르는 피터의 뺨으로 사내의 손이 닿아왔다.


 “나도 내가 왜 그 날 거기로 가라고 했는지 몰랐어요. 그래도 어차피 기억도 잃고 할 일도 없어서 매일 그 근처 벤치에 앉아 버스 정류장만 쳐다봤죠. 그래서 당신이 그 갈색머리 어벙하게 생긴, 물론 이건 기억을 잃기 전 내 의견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게 당신이란 걸 알았죠. 그래서 그 버스 번호도 알던 건데, 아는 척하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당신 누구야!”

 “웨이드 윌슨-”

 “진짜 정체를 밝히라고!”

 “내가 아는 나는 이미 당신도 다 봤어요. 그게 다라고요. 번호도 거기에 적혀 있어서, 그래서 알 수 있던 게 다예요.”

 “도대체, 누구길래-”


 멀찍이서 들린 굉음에 말을 끊은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를 따라 일어선 사내가 황급히 피터를 쫓아와 팔을 잡아왔지만 그 팔을 손쉽게 떨쳐낸 피터는 카페 밖으로 나와 굉음이 들린 방향을 향해 몸을 띄웠다.


 눈물은 여전히 멎지 않은 채였다.



Chapter 3_인어공주.


하얀 거품으로 돌아간 인어공주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바다로도,

왕자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육지로도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내는 바닷물에 떠밀리고

자신을 산산조각 내는 모래들에 흩어질 뿐이었죠.


 “그래서 그 인어공주가 누군지 아직도 못 알아냈어?” 

 “토니.”

 “아니, 그렇잖아. 천하의 스파이더맨을 구해줬으면 생색을 낼 법도 한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도 그렇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그렇고, 딱 인어공주지 뭐. 주변에 갑자기 나타난 말 못하는 친구 없어?”

 “없어요! 없으니까 캐낼 생각 그만 하시고 저리 가시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뭔가 말을 더 하려던 토니는 자신을 찾는 프라이데이에 피터의 어깨를 두들긴 뒤 발걸음을 돌렸고, 고개를 저으며 실험실에 들어간 피터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 날, 퀸즈까지 들렸던 굉음을 따라간 피터를 기다리고 있던 건, 뉴욕 상공을 덮은 고블린 떼였다.


 그 날따라 늦은 어벤져스 때문에 홀로 고군분투하던 피터는 미처 피하지 못한 홉고블린의 호박 폭탄에 맞아 추락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 때 어디선가 나타난 누군가가 익숙하게 피터의 손목에 있는 웹슈터를 조작해 추락속도를 늦췄고, 바닥에 닿아 의식을 잃기 직전 뭐라 속삭인 그 누군가는 찢어진 피터의 마스크를 벗겨낸 뒤 정체를 알 수 없는 멀쩡한 마스크로 바꿔 씌워놓은 뒤 사라졌다.


 투박한 빨간색 마스크엔 검은 색의 큰 포인트가 두 개 있었고, 그 가운데에 자그마한 눈구멍까지. 자신의 마스크를 따라한 듯 보이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마스크 모양새에 빨강과 검정으로 이뤄진 정장을 입고 있던 사내를 떠올린 피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실험실에서 뛰쳐나갔다.


 “웨이드, 지금 나 좀 만날 수 있어요?”

 [지금은 부재중이오니 삐 소리가 나면-]


 긴 수신대기음 끝에 들린 건 기계소리였고, 그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핸드폰을 내렸을 때, 익숙한 모습을 한 누군가가 그의 맞은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윌슨씨!”

 “어, 피터 파커?”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

 “당신이 찾던 절 도와주는 사람이 여기 있거든요. 제 사례가 독특하다고 연구 대상이 되어주면 무료로 치료를 해주겠대서……. 그 보다 당신이 여기서 일할 줄은 몰랐네요.”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불쾌감을 드러내며 둘 사이를 막아선 토니가 고개를 내저으며 피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얜 우리 실험실에서 일하는 피터 파커. 그리고 여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웨이드 윌슨. 그게 다야. 더 알 필요도 없지. 오늘은 조금 늦었네? 알다시피 난 바쁜 사람이라고. 또 이러면 곤란해, 웨이드.”

 “토니, 이 사람하고 할 말이 있-”

 “다음에 해, 피터. 오늘은 이게 우선이거든. 안 그래?”


 이미 토니에게 팔이 잡힌 채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는 이내 그럼 그렇지, 란 표정의 토니에게 끌려가 버렸고, 멍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피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프라이데이?”

 [네]

 “웨이드 윌슨이 여기에 오기 시작한 게 언제지?”

 [그 사항은 기밀 사항으로 토니 스타크 외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웨이드 윌슨에 관련되어 나한테 공개할 수 있는 정보는?”

 [없습니다.]

 “토니가 왜 저렇게 웨이드 윌슨을 감추는지도?”

 [네.]


 프라이데이의 공허한 대답에 더 이상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답이란 없을 거라고 생각한 피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발걸음을 돌려 건물 밖으로 향했다. 여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고, 여름의 태양 또한 여전히 하늘 한 가운데서 그를 주시하고 있는 채였다.

Chapter 4_우연.


베틀에 걸린 실타래가 엉키는 일은 없었어.

그걸 빗어 내리는 손이 멈추는 일이 없는 한은 말이야.


 매일 같이 쓰던 일기는 어느 시점으로부터인가 비어있었다. 내용이나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가 어색했고 비어있을 뿐.


 그 이질감은 장장 3년간 지속되다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그 3년간의 기록을 계속해서 검토하느라 집중하고 있던 피터는 갑자기 울린 핸드폰 알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했었네요?]


 핸드폰은 무음으로 설정된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 문자를 노려보던 피터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자신의 홈페이지를 보다 답장을 보냈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 어때요?]

 

 답은 없었다. 자신이 보낸 문자 옆에 자그맣게 생긴 읽음 표시를 쳐다보던 피터는 옷을 챙겨 입은 뒤 집을 나섰다.


 여름의 짧은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거리와 함께 약속 시간이 다가 올수록 초조해진 피터는 애꿎은 테이블을 두들겼고, 나무 테이블 위로 미세한 균열이 생겨날 때쯤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예요?”

 “얼마 안 됐어요.”

 “그렇다고 치죠. 그보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죠?”


 의아해하는 사내의 의자 옆엔 하늘색 우산이 놓여졌고, 다른 말부터 꺼내야 싶어 한참이나 망설이는 피터를 대신해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토니 때문인가 보네요.”

 “네?”

 “전화가 온 건 그 전이라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안 그래요?”


 어깨를 으쓱인 사내는 다 식은 채로 놓여있던 커피 잔을 들어 입을 대었다 인상을 찌푸렸다 미소 지었다.


 “얼마 안 됐다고 하더니.”


 여전히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나타난 사내의 얼굴은 전형적인 서양 미남이었고, 푸른 눈은 어딘가 익숙했지만, 또 어딘가 달라보였다. 그 날 처음 만나고 이제 네 번째 만나는 이 사내에게서 오는 익숙함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알 수 없어 짜증이 난 피터가 인상을 찌푸렸고, 그걸 다르게 해석한 듯한 사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네요. 토니랑 약속한 거라서. 그냥 뇌파 검사 받고 뭐 이런 저런 약물 좀 맞고 그게 다예요. 보통 기억상실증은 저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미리 알기라도 하듯 글을 남겨놓는 것도 흔치 않고, 또 미리 글을 남겨놓은 걸 보면 한 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소리일 수도 있어서-”

 “그 옷 말고 다른 옷들은 어떻게 생겼어요? 전에 얌전한 옷이 그것밖에 없다고 했잖아요.”

 “음, 그게 진짜 괴이한 옷들이 많아서 도대체 전에 뭘 하고 살았는지-”

 “이런 거라도 있나 보죠?”


 한참이나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린 탓에 축축해진 마스크가 테이블 위로 올라갔고, 마스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던 사내가 처음으로 피터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걸 어떻게, 아니, 내 뒷조사라도 했나요? 설마 내 집에-”

 “그 날 카페에서 날 만나고 뭐했어요? 날 쫓아왔습니까?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요?”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요? 당신이야말로-”

 “이제 그만, 아가씨들. 웨이드 윌슨씨. 내가 우리 직원과 사적인 만남을 하라고 말한 적이 있나?”

 “토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피터의 어깨를 눌러 그대로 자리에 다시 앉힌 토니가 사내를 일으켜 세웠고, 사내의 발에 채여 쓰러진 우산을 흘깃 쳐다본 뒤 피터를 향해 말했다.


 “피터 파커. 잘 들어. 이건 네 선택이었고, 난 거기에 반대했는데 그걸 밀어붙인 건 너였어. 네가 기억을 하건 못 하건 그건 달라지지 않아. 애초에 그것도 네 선택이었잖아. 네가 까먹은 것 같아서 내가 다시 주지시켜주는데, 이 남자랑 붙어 있어서 하등 좋을 게 없어. 더 이상은 접근하지 말라고. 네가 싼 똥, 지금 내가 치우고 있는 거니까.”


 사납게 피터를 몰아세운 토니는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던 마스크를 집어 피터의 품으로 던진 뒤 사내의 팔을 잡아 밖으로 향했다. 잠깐의 소동사이 쏟아진 커피가 테이블을 타고 흘러 우산까지 닿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피터는 어느새 창밖으로 내리기 시작한 비를 보며 우산을 집어 들었다.



Chapter 4_꿈


 [그래서 넌 그러면 어쩔 건데, 응?]


 기대에 찬 목소리는 흐린 안개 너머에서 들려왔고,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했던 그는, 자신의 시선이 바닥에 박혀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고 이것이 꿈임을 깨달았다.


 [살겠죠.]

 [뭐?]

 [살아야지 어째요? 죽을 순 없잖아요, 그쵸? 그걸 바란 건 아닐 거잖아요.]


 심드렁하게 말을 받은 그는 눈 앞에 쓰레기를 한쪽 구석으로 던지기 시작했고, 둔탁한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와, 진짜 로맨틱하다, 자기. 살겠죠~죽을 순 없잖아요~ 그래! 배신이야, 배신!]

 [$%^!]

 [왜, 스파이더맨!]

 [진짜 이럴 거예요?]

 [진쫘 이뤌 거예요? 뭐~가~?]


 심통이 난 목소리에 한숨을 내쉰 그가 목소리를 향해 발을 내딛었고, 그만큼 짙어진 안개가 그의 앞을 가렸다.


 [방법을 찾을 거예요. 잊지 마세요, 토니 스타크만 천재는 아니거든요.]

 [흠. 흠. 진작 좀 그러지.]

 [그러러면 일단 이 병균 덩어리 소굴에서 당신을 구해야 할 것 같은데, 같이 치우기나 하시죠.]

 [뭐? 긴급사항이라고? 이런! 스파이더맨! 세계가 날 필요로 하다는 군! 난 이만!]


 뻗은 손엔 공허한 안개만 잡혀왔지만 허공으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만큼 공허하진 않았고, 짙어진 안개 반대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이라고요?]

 [미안.]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잖아요! $%^! 이리 와요! @#$ *&!]


 눈앞으로 다가온 검은 형체는 여전히 안개 건너편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고, 손 사이엔 또 다시, 잡을 수 없는 안개만 잡혀올 뿐이었다.


 [당신, 왜 이래요? 이건-]

 [왜, 맨날 못난 얼굴만 보다 이런 얼굴 보니까 갑자기 또 설레고 그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섞여 나온 울음은 이내 통곡으로 변했고, 분노에 찬 자신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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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ideypool
:

- 헤일럿님 트윗은 여기에.

https://twitter.com/he1lot/status/885183949781090304




 [당신은, 내가 스파이더맨이라서 좋은 거예요, 아니면 피터 파커인데 스파이더맨이라서 좋은 거예요, 그것도 아니면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서 좋은 거예요?]


 마스크를 집어던진 청년의 얼굴은 붉었다. 그것이 목소리에 담긴 분노 때문인지, 아니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끓어오른 혈기 때문인지 그 당시 그는 알 수 없었다.


 청년과 그 사이에 끼어든 박스들 때문에 그가 답하지 못한 사이 침묵 속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가장 최악의 답을 그의 대답이라 생각한 청년이 입술을 깨물고 돌아서 마스크를 집었고, 한여름, 가장 해가 높이 뜨는 때의 그 짙은 그림자 속에서 여전히 박스와 고군분투하고 있던 그는, 그가 겪었던 현실과는 달리 재빨리 청년을 잡아챘다.


 [핏, 나는-]


 따스한 바람과 함께 떨어진 물방울이 그의 잠을 깨웠고, 몸을 덮고 있던 꽃잎을 털며 일어선 그는 어느 새 시선이 닿기도 힘들 정도로 위로 뻗어버린 나뭇가지 끝을 보려 노력했다.


 소년의 나이와 같을 아몬드 나무는 봄이 오자 어김없이 꽃을 피워냈고, 옅은 분홍빛 꽃무리를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모두가 꿈꿔왔던 봄처럼 따스하게 그를 비췄다.


 아몬드 나무를 중심으로 포진한 식물들 중 여러 해를 살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소년의 나이에 맞춰져 있었지만 그의 시간은 매 해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한 해 살이 풀에 멈춘 지 오래였다.


 하루가 모여, 달이 되고, 달이 모여, 해가 되면 다시 삶을 시작하는 그들의 삶과는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간은 아몬드 나무가 퀸즈 한복판에 만들어진 이 정원에 뿌리를 박던 때에 멈췄고, 그 때부터 자라난 아몬드 나무는 물론이고 길을 마주보고 늘어선 미루나무들이 아름드리나무로 자라는 동안에도 정원의 풍경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이른 봄을 알리는 에리카가 그 붉은 잎을 틔우고, 그 붉은 잎이 흩어질 때쯤엔 아몬드화가, 아몬드화가 지고 여름을 알리는 태양빛 아래에 희디 흰 아스포델이 아몬드 나무 주변을 포진하고, 마침내 열기가 물러난 가을, 국화가 이젠 초록색에 불과한 에리카를 둘러싸고 흰색 꽃잎을 벌리는 동안에도 그의 하루는 달라지지 않았고, 그건 그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맨 처음에 그들 사이로 자리 잡은 잡초나 이름 모를 꽃따위를 열심히 뽑아내던 그는, 이내 그 소년이라면 그들조차도 사랑했을 거란 생각에 손을 거두었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정원을 둘러싸고 있던 높다란 벽은 그 해 아몬드화가 지기도 전에 그 소년의 이름으로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다.


 무미건조한 건물들 틈바구니에 끼인 정원을 반긴 이는 아이들이나 그들의 부모뿐만이 아니었고, 매일 같이 찾아오는 방문객들과 그들 때문에 쓰러진 꽃이나 긁힌 나무들, 그리고 쓰레기에 불평불만을 토하면서도 그는, 그 모든 것을 소년의 이름으로 해결해나갔지만, 그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나무들이 여름의 태양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그늘을 만들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혹은, 맨 처음 그가 심었던 화초들이 알아서 제각기 다른 때에 꽃을 피운 게 몇 년 째인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매해 꽃을 피우고 잎을 틔우는 나무가 해를 세지 않고, 오로지 사계절만 알 뿐 그 이상의 시간을 알지 못하는 화초가 그러하듯, 그는 아주 오래 전에 날 세기를 그만두었고, 모든 나무들이 그의 팔 둘레를 넘어선 이후부터 그는, 지금쯤이면 소년이 몇 살이 되었을지 어림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이 그렇다 한들, 그에게 소년의 나이는 상관없었다.


 그 소년이 몇 살이건 간에 그 소년은 늘 그에게, 처음 만났던 그 때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희망과 용기로 가득 찬 채로 뉴욕을 활보하던 그 어리고 여리던 소년은, 맨 처음부터 그리고 자신을 잘 알게 된 이후에조차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한 결같이 진심어린 걱정과 조언을 건네곤 했고, 그랬기에 그는, 다른 이가 말했더라면 대번에 코웃음 쳤을 고백이나 터무니없는 약속들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그 소년의 약속을 믿고 기다릴 셈이었다.


 이미 한껏 꽃을 피워내고 진 이에겐 내년이란 때가 있고

 지금 한껏 꽃을 피워내고 있는 이에겐 지금이 때이며

 아직 꽃을 피워내지 못한 이에게는 다음 계절이란 때가 있으니까


 그러니, 그 때 또한 다시 오리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가 아는 한 어차피 질 꽃이니 피워내지 않겠다는 나무는 없었고, 어차피 시들 운명이기에 싹조차 틔우지 않겠다는 씨앗은 없었기에, 그리고 긴긴 고독 속에서조차 찬란하게 빛나는 소년을 본 그였기에, 그는 수많은 시간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이 치들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작정이었다.


 설사 그 자리가 짙은 어둠 속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소년이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광원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은 한치의 빛도 없는 어둠이 아닌 소년의 빛 덕택에 생긴 그림자 속이라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여전히 그 그림자 속에서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을 찾는 이는 많았고, 그의 시선은 늘, 꽃밭을 온통 헤집는 아이들이나 길가에 다소곳이 선 미루나무 그늘을 즐기러 온 연인들이 아닌, 천천히 서로를 의지해 정원을 산책하는 노부부들을 향했고, 그 때만큼은 그의 박스들조차도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꽃을 떨궜다 해서 슬퍼하는 나무나 화초는 없었다.


 여러 해를 사는 나무들은 다음해면 또 다시 같은 때에 꽃들을 피워냈고,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마냥 사라졌던 꽃무리들마저도 따스한 봄이 다시 찾아오면 싹을 틔우고 잎을 벌려 꽃을 피웠지만 연분홍빛 꽃 무덤 속에 덮인 아몬드나무 뿌리 아래의 그 소년이 다시 그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설사 그가 그 소년을 찾아가려고 해도, 아주 오랜 기간 그를 외면하고 있는 그의 옛 연인은 여전히 연락이 없었고, 헛된 희망에 부풀어 날렸던 총알이 준 짧은 안식 후에 그는, 그 총알에 붙어 달아난 기억들이 있는지 없는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소년에게 받았던 수많은 약속들, 그에게 소년이 받았던 수많은 약속들이나 그와 소년의 행복했던 기억들, 혹은 그렇게 행복하거나 달갑지 않은 기억들이 그를 물고 늘어졌고, 폭풍우에 흔들리는 나무가 그러하듯, 그는 늘 약속이행과 그 자신의 행복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수많은 약속들과 이미 희미해지기 시작한 기억들뿐이었고, 빨간 복면 마스크를 벗어던지며 그의 품에 안겨들었던 그의 꿈속의 소년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를 제외한 그 소년을 기억하는 이들은 수없이 흐른 시간 속에서 죽은 지 오래였고, 그 소년의 이름이 기록되었던 매체나 기록 장치는 사장된 지 오래였으며, 기록 속에 남은 소년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당연하다 쳐도 역사 속에 남은 소년을 설명하는 문자는 너무나도 차갑고 딱딱해서 그는 도무지 그 활자 속에서 그 소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가 아는 소년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자신마저 사라진다면, 이 세상에 분명 존재했던 그 소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는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어깨를 마주한 채 걷는 노부부들의 모습에 귓가를 맴도는 어쩌면, 만약 따위의 환청이나, 뜸금 없이 떠오른 소년의 부질없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약속들에 화가 날 때 혹은 이따금 언젠가 자신이 소년을 오롯이 잊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올 때면 그는, 조용히 아몬드 나무 아래에 누워 눈을 감았다.


 나무는 때를 따라 변해갔고, 때를 따라 변해가는 그늘 속에서 그는, 그 소년이 수없이 그에게 속삭였던 약속을 곱씹었다.


 언제나 함께할 거라던 약속.

 반드시 찾아낼 거라던 약속.

 당신의 곁을 반드시 지킬 거라던 약속


 혹은, 그가 소년의 곁에 함께할 수 있게 할 거라던 그, 약속들을.


 그가 아는 소년은, 아니. 그의 연인은 거짓말을 하기엔 너무나도 올곧은 이었고, 헛된 약속을 한 적이 없기에 그는 여전히 소년의 때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진 채 다음 해를 기약하고 있는, 피처럼 붉은 꽃잎을 흩은 에리카처럼

 자신의 때를 맞아 수없이 견딘 해의 수만큼 수많은 연분홍빛 꽃을 피어내고 있는 아몬드처럼

 그리고, 곧 다가올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짙은 녹색 아래 흰 꽃잎을 숨긴 아스포델처럼.


 얇은 꽃잎을 통해 들어온 따스한 봄볕은 처음 사랑을 고백하던 소년의 볼만큼이나 붉었고, 조용히 눈을 감은 그는 그 어둠 속에서 수많은 것들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긴긴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아 나무가 피워낸 아몬드화는 여전히 작은 바람에도 부질없이 꽃잎을 떨구고 있었고, 그의 소년은 여전히 그 아래에서 조용히 잠든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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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pideyp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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