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all 05
썰/스파이디 2016. 5. 11. 12:39 |Chapter 05_the Date.
에이미의 구출은 의외로 쉬웠다. 피터는 계속해서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황당해하는 데드풀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는 의자 위에서 기절한 듯 축 늘어져 있는 에이미를 안아 밖으로 빼내었고, 한참이나 그런 피터 옆에서 불만을 토해냈던 데드풀은 피터의 마지막 주먹에 기절했다 일어난 이후론 말이 없었다. 그대로 에이미를 안아 토니의 타워 안 의무실로 옮긴 피터는 에이미가 깨어날 때까지 그 곁을 지켰고, 침대 옆에 둔 의자에 앉아 잠깐 졸았다가 그 사이 깨어난 듯 보이는 에이미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헛기침을 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어,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네요, 스파이디. 오늘은 부디 안전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행복한 하루도요.”
부드럽게 미소 지은 에이미가 침대에서 일어나 병실 한쪽 구석에 있던 자신의 코트를 걸치기 시작했고, 얼른 의자에서 일어난 피터가 에이미의 곁으로 붙어 서며 말했다.
“아직 더 있어야 돼요, 아멜리아 허니 오스왈드양. 데드풀이 쓴 마취제가 독한 거라-”
“보통은 허니라고 불리면 좀 그런데 당신한테 허니, 라고 불리니 듣기 좋네요. 다음에도 계속 허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구출해주신 분인데 그 정도는 괜찮겠죠.”
에이미의 말에 놀라 멍해져 있는 피터의 볼을 에이미가 쿡 찔렀고,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은 피터가 황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 제 말은 그 허니가 아니라, 당신 이름 허니요.”
“스펠링이 같은 건 알죠? 그보다 그 표현은 어디서 들은 거 같은데…….”
“흔한 표현인데요, 뭐. 많이 들어봤을 거 아니에요? 이름이 허니인 이상 말이죠.”
“그런 의미로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확히 그 문구로 말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죠.”
입술을 모으며 눈을 가늘게 뜬 채 피터를 노려보던 에이미가 그를 아래위로 훑으며 고개를 외로 꼬았고, 쭉 내려가다 고정된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렸던 피터는 언제 터졌는지 알 수도 없는, 종아리 옆쪽의 터진 솔기를 보곤 작게 신음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여 애써 그 틈새를 이어 붙이려고 손가락을 움직이다 그대로 굳은 채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에이미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었고, 그녀를 따라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던 피터는 곧 이어 나온 그녀의 말에 얼굴을 굳혀야 했다.
“설마 본명이 피터 벤자민 파커이고 그렇진 않죠?”
“하하. 재밌네요.”
“어느 부분이요?”
피터의 어색한 웃음 흉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에이미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아쳤고, 잠시 할 말을 잃고 입을 조금 벌린 채 있던 피터는 서둘러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제 사촌이 저라니 웃기잖아요.”
“오, 사촌이라.”
“넵. 졌네요. 피터 벤자민 파커가 제 사촌입니다. 어머니쪽 사촌이죠.”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한 피터가 무색하게 찌푸려진 에이미의 미간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고, 졸지에 신상이 털릴까 두려워진 피터는 잔뜩 긴장한 채 에이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어깨를 으쓱인 에이미는 그대로 문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못마땅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이제야 피터가 당신 사진을 왜 그렇게 잘 찍을 수 있었는지 잘 알겠네요. 근데 스파이더맨, 사촌 동생이 당신 사진을 그런 기사에 쓰는 건 괜찮나보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피터는 어느 새 병실 문 밖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에이미에게 얼른 따라 붙었고, 피터에게 길 안내를 해달라고 한 에이미 앞으로 걸어가며 대답했다.
“사진 몇 장으로 사촌 생계유지비가 나온다면 그것도 나쁠 건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 사진을 파는 게 당신 본인이라면 괜찮다고 말할 입장이 되지만, 본인이 아니라는 게 문제겠죠? 전 도저히 피터가 좋은 사촌 동생이라고 할 수는 없겠네요.”
심상한 어조로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면, 이란 가정을 한 에이미와 달리 그녀의 말에 신경이 곤두선 피터가 발걸음을 재촉했고, 서둘러 밖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에이미를 안내한 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보고 희미하게 웃은 에이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고 졸지에 머쓱해진 피터가 손을 거두자 이번엔 에이미가 먼저 손을 내밀곤 말했다.
“예의범절에 미숙한 건 가족 내력인가 보죠?”
“네?”
“여성이랑 악수할 땐 여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거예요, 피터.”
“아, 그랬죠! 잠깐만! 전 피터가 아니라니까요!”
“아. 그랬죠.”
피터와 같은 문구로 대꾸한 에이미가 빙긋 웃으며 피터의 손을 움켜쥐어 악수했고, 두어번 흔든 뒤 미련 없이 그의 손을 놓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더니 악수한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강철 문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에이미의 모습이 문 틈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열렬하게 손을 흔들던 피터는 문이 닫히자마자 황급히 돌아서서 자신의 핸드폰으로 토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토니의 목소리 대신 익숙한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전화기에 대고 자비스의 이름을 부르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네, 피터 도련님.]
“자비스, 스파이더맨. 그리고 얼른 피터한테 사촌형을 미친 듯이 좀 만들어봐.”
[도련님, 그건 공문서 위조로-]
“제발 좀. 사망한 사람이라도 갖다 붙여줘. 이러다가 내 비밀스런 신상이 다 까발려지게 생겼다고.”
[네, 알겠습니다.]
늘 그렇듯 담담한 자비스의 음성이 울려 퍼지고 나서 전화가 끊겼고, 까맣게 암전된 화면을 응시하던 피터는 건물 출입구 쪽으로 난 창문에 기대어 에이미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여전히 미친 듯이 울리고 있는 스파이더 센스를 잠재우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 때 등 뒤로 던져놓았던 피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 허니.”
[이제야 제 핸드폰 번호를 등록해놨나 보네요, 피터.]
“지난번엔 명함이 든 바지를 그냥 빨아버려서 저장 못한 거였어요. 또 그 날 저녁엔 진짜로 일이 있어서-”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아, 그래서 말인데, 피터-]
“우리 저녁이나 한 번 같이 할래요?”
피터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잠시 침묵이 흘렀고, 에이미의 대답을 기다리다 거절의 대답이 나올거나 생각에 눈을 질끈 감은 피터가 막 바쁘면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 핸드폰 너머로 에이미의 대답이 들려왔다.
[저녁, 좋죠. 어디서 볼까요?]
그 뒤로는 일사천리로 약속 시간과 장소가 잡혔고, 나름 깔끔하게 입는다고 입고 나왔던 피터는 생각보다 더 격식 있어 보이는 식당의 외관에 기가 눌려 지금이라도 옷을 갈아입고 와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 채 주소지를 받고서 검색 한 번 없이 온 자신을 원망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은 이미 10분도 채 남지 않은 채였고, 이대로 택시를 타고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갔다가 오면 적어도 30분은 넘게 걸릴 터였다. 피터가 잡생각에 빠져 핸드폰 홀드 버튼을 연속으로 누르는 사이 도착한 에이미가 숨을 죽인 채 그의 뒤로 접근했고, 갑작스레 울린 스파이더 센스에 반응해 공격적으로 몸을 돌렸던 피터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친 에이미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색하게 웃었다.
“오, 안녕하세요, 허니.”
“이런, 이래서는 장난도 못 치겠네요. 얼굴 좀 펴요, 피터. 누가 보면 제가 당신을 죽이려 든 줄 알겠어요.”
생긋 웃은 에이미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 피터의 곁으로 다가가 팔짱을 꼈고, 갑작스런 스킨쉽에 피터가 놀란 사이 식당 쪽으로 그를 이끌며 말했다.
“옷 때문이라면 걱정 말아요. 자주 오는 식당이라 괜찮을 거예요.”
“편집장이 좋긴 좋나 보네요.”
“그러게 저희 회사로 오라니까, 안 온 당신이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찬 거죠, 피터.”
“그 제안 다시 해줄 수는 없나 보죠?”
피터의 장난스런 어조에 멈춰 선 에이미가 눈썹을 치켜 올렸고, 멋쩍어진 피터가 침음을 내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비단 일 문제가 아니더라도 제가 두 번의 기회를 주는 경우는 없어요. 영광인 줄 알라고요. 당신의 그 형편없는 변명을 믿어준 거에 대해서 말이에요.”
“허니, 그건 진짜로-”
“두 명이요.”
피터의 말을 무시한 채 입구에 서 있던 직원에게 인원수를 말한 에이미가 눈을 찡긋해보였고, 자주 오는 식당이란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듯 피터의 복장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웨이터는 에이미가 ‘오늘 하루쯤은 그냥 넘어가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쉽사리 수긍하며 그들을 창가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에이미는 피터의 의사를 물으면서 익숙하게 주문했고, 그런 에이미의 모습이나 메뉴판에 적힌 가격들에 기가 눌린 채 질문에 답하던 피터는 무심코 쳐다본 창밖 너머 건물 틈 사이로 피어오르기 시작한 연기를 발견하고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설마 이번에도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할 참은 아니겠죠, 피터?”
신경질적으로 올라간 목소리에 멈칫했던 피터는 하늘 위로 가르고 지나가는 섬광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감았던 눈을 뜬 뒤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에이미에게 두 손을 모아 사죄했다.
“정말 미안해요, 허니. 그치만 제가 진짜로 급한 일이 생겨서요…….”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여전히 눈썹을 치켜 올린 채로 피터의 등 뒤로 시선을 옮긴 에이미가 신경질적으로 물었고, 피터가 속으로 멍청하게 핸드폰을 확인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자신에게 원망의 말을 쏟던 찰나, 깊은 한숨을 내쉰 에이미가 그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퇴짜를 놓을 거면 좀 일찍 말해줘요. 여기 코스 요리가 장난 아니게 비싸거든요. 적어도 주문하기 전에는 퇴짜 놔줬으면 좋겠네요.”
“허니, 정말 미안해요. 믿기 힘들겠지만, 진짜로 일이 생겨서…….”
“그리고 잊지 마요, 피터 파커군. 한 번의 기회는 당연히 줄 수 있어요. 뭐, 두 번까지도 두 눈 딱 감으면 못할 것도 없죠. 아주 드문 일이지만 상대에 따라 세 번도 못할 것도 없다 치자고요. 하지만 네 번이요? 이것만 알아둬요, 피터. 이번 일 외에는 제 사전에 삼고초려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단호하게 말을 끝낸 에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터 쪽에서 걸어온 웨이터의 손에서 빌지를 빼앗아 들다시피 하곤 피터를 지나쳐 계산대로 향했고,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갔던 피터는 자신의 카드를 빼들었다가 점원이 말한 가격에 놀라며 입술을 깨물며 카드를 다시 거둬야만 했다. 그런 피터에게 코웃음을 친 에이미는 결제를 마친 뒤 그녀를 붙잡으려는 피터를 무시하고 지나친 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웨이터를 향해 발렛 파킹 맡긴 차를 불러 달라 요청했고, 잠시 그녀와 점점 커져가는 연기 사이에서 갈등하던 피터는 이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채 그대로 뛰어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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