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 마녀 입장으로.
끄적거림 2016. 5. 30. 12:17 |멀고 먼 옛날, 한 마녀가 살았어.
마녀는, 여느 소녀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꿈꿨고, 어느 아름다운 봄날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그 사랑을 만났다 믿었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네 계절을 지나며 그녀는 확신했어.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자신이 꿈꿔오던 바로 그 사랑이라고 말이야.
그녀는 확신에 찼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그렇듯 눈 뜬 장님이 되어 그 사계절동안 자신에 대한 대부분의 것들을 다 털어놓았어.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의 가장 귀중한 물건들은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부모들이, 선조들이 남긴 유품들은 어디에 있는지 말이야.
그녀가 사내의 꿈을, 소망을, 좋아하는 별자리나 계절에 대해 물을 동안 사내는 저런 것들을 물었지만, 사랑에 눈이 멀었던 그녀는 이상한 점을 깨닫지 못했고, 어느 겨울 아침 싸늘하게 식은 침대 안에서 홀로 깨어나고서야 내내 눈을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어낼 수 있었어.
눈 먼 사랑의 대가는 혹독했고, 그녀의 속사정엔 눈꼽만치도 관심이 없던 눈은 이미 사내의 흔적을 다 지워버린 뒤였어.
그녀에게 있어 사내가 훔쳐간 것들은,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그녀의 가문의 역사였고, 그녀의 선조가, 아니. 부모가 살아있었다는 증거이자 추억이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만 하는 것들이었기에 그녀는 아주 긴 세월동안 사내 뒤를 쫓았고, 마침내 그녀가 사내를 찾았을 때 사내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있었고, 일찍 어미를 잃은 두 아이의 병든 아버지가 되어 있었어.
긴 세월동안 그녀의 분노가 가라앉았던 건지, 아니면 순진무구한 두 아이의 눈망울들에 그만 연민을 느껴버린 건지는 몰라도 그녀는, 이미 병상에 누워있는 사내를 추궁하는 일조차 그만두고 그의 저택 근처에 자신의 집을 지었어.
그가 그녀에게서 앗아간 물건들 중엔 팔 수 없는 물건들도 많았고, 그녀는 그저 기다릴 셈이었어. 두 아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두 아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자신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나이가 될 수 있을 때까지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어.
자신의 아버지가 사악한 마녀를 물리친 용사라고 믿는 아이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그저 도둑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수 없었고, 이제는 그 두 아이에게도 단순한 재물이 아닌, 팔 수 있어도 팔지 않을 추억이 되어버린 것들을 자신의 것이니 돌려달라 말할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그녀는 또 다시 기다리기로 했어.
한 세대, 또 한 세대.
애초에 별 다른 능력도 없이 그 사내가 훔쳐간 재물만으로 세워졌던 저택은 시간이 흐를수록 추레해졌고, 재정상황은 형편없어졌으며 종내엔 그 사내의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이 그녀의 모든 재물들을 고물상에 팔아넘길 때까지도 그녀는 그 저택의 옆자리를 지켰어.
이제 그녀는 마을에 소문난 마녀가 되어 있었고, 아무도 찾지 않는 집에 홀로 남은 그녀는 사랑을 꿈꾸는 대신 그 사내의 아이들이 자라나 사랑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자신의 아이를 기르는 대신 정원을 가꿨지.
그녀에게 있어 정원에서 피어나고 자라는 모든 것들은, 잡초 하나까지도 소중했고, 그녀는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보다는 그 식물들 사이에서 더 평안함을 느끼곤 했다고 해.
그리고 너희들이 아는 그 부부가 여기서 등장하지.
임신한 부인의 투정을 못 이기고 무시무시하기로 소문난 마녀의 집 마당에 들어가 라푼젤을 훔쳐온 그 사내 말이야.
그녀는 처음 그 사내가 라푼젤을 뿌리채 뽑아갔을 때엔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했어. 라푼젤이 있어야 할 자리엔 텅 빈 구덩이뿐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했지.
하지만 사내의 도둑질은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에 이어 일주일간 계속되었고, 애초에 이파리만 떼어가도 될 걸 송두리째 뽑아가는 사내의 행태에 경고나 할 참으로 그 날 밤엔 밭을 지키고 있었어.
사실, 그녀조차도 그 사내가 그 거래에 응할 줄은 몰랐대.
그저 그녀가 원한 건 다신 오지 않겠다, 내 아내만은 살려달라, 정도였는데,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자신의 목숨 구할 궁리에 치중한 나머지 딸을 주겠다 약속하는 사내의 모습에 그녀의 오랜 분노가 다시 피어올랐어.
그 사내는, 제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를 쏙 빼닮아 있었고, 그 긴 세월간 그 저택의 아이들을 지켜보며 은연중에 쌓여왔던 애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어.
피는 속일 수가 없다던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벌벌 떠는 사내를 보며 이를 간 마녀는 딸아이를 그녀에게 준댔으니 이제 라푼젤은 얼마든지 먹어도 좋다고 승낙했고, 그 와중에도 아내의 잔소리를 피할 궁리에 급급한 사내는, 또 다시 라푼젤을 뿌리채 뽑아 달아났어.
그 뒤로 몇 달이 흐르고 아름다운 봄에 태어난 아이는, 정말이지 아름답게 자라났어. 햇살을 받으면 금사로 짠 듯 반짝이는 금발이나, 자신이 태중에 있을 때 먹었던 라푼젤이 가져온 참극은 모르는 듯한 푸른 눈, 그리고 그 상냥함이란.
아, 그 부부는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난 그런 덴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다들 그렇지 않아? 사건 진행에 급급해서 사후 이야기 같은 건 들여다보지도 않잖아. 분개하고, 동정하면 그만인 일 아닌가?
마녀는, 그 아이에게 자신과 같은 비극을 주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사람도 모르고, 사내도 모르게 높다란 탑에 가둬놓고 애지중지하며 키웠더랬지.
아동매매에 감금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은 다 입 좀 다물래? 애초에 동화잖아, 동화. 이건 무슨 사건 수첩 같은 게 아니라고. 도둑질 하지 말고, 나쁜 짓 하지 말라는 교훈만 주면 되는 동화에 불과하니까 조용히들 해.
여튼, 마녀의 소망과 달리 그 아이, 라푼젤도 결국은 마녀와 같은 소녀에 불과했고, 라푼젤 또한 사랑에 빠지고 말지.
아름다운 미청년 앞에서 그녀는, 마녀가 그 동안 자신에게 얼마나 헌신했느냐는 까맣게 잊었고, 마을의 평범한 소녀들은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의 십분지 일도 얻기 힘들단 사실은 단 하나도 알지 못했어. 그도 그럴 게, 라푼젤에게 있어 세상이란 마녀가 보여준 것이 다였고, 그 세상은 오로지 꿈과 희망, 말만 하면 이뤄지는, 우리가 보기엔 마법과 같은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모두 다 알다시피 마녀는 분노했고, 라푼젤은 절망했지.
눈이 멀어버린 미청년은 한참을 헤매다 마을 사람들에게 구출되어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갔고, 분노한 국왕이 마녀의 탑을, 집을 공격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라.
마녀의 집은 파괴되었고, 라푼젤은 ‘구출’되었어.
마녀는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어쨌거나 너희 입장에서 권선징악만 이뤄졌으면 악당이야 어떻게 되었건 간에 별 상관없는 이야기 아닌가?
물론, 왕자의 눈이 눈물 한 방울에 다시 돌아오는 마법과 같은 일은 없었지만, 라푼젤과 왕자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지는 못해도 누릴 건 다 누리다 죽었으니까, 된 거잖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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