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면서 들은 노래

https://youtu.be/wlDEC0Ln4vI

https://youtu.be/LkE5OjjHaCg

https://youtu.be/zbAyUEaz370


 네 모든 걸 내게 줘.


 네가 이 땅 위에서 숨 쉬는 그 모든 날들,


 그리고


 네가 이 땅 위에서 더 이상 숨 쉬지 않을 그 모든 날들까지도.




덷거미덷 Abeliophyllum 단편.

 이상과 현실 사이.



Chapter 01. Greeting


 그는, 반복되는 시계(視界) 속에서 무언갈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기 전에 그 무언가는 익숙한 거리 속으로 숨어들어갔고, 이내 짙은 색의 음료에 빠진 이물질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그럼에도 입안을 감도는 껄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평소처럼 정해진 정류장에서 내린 그는, 온통 회색으로 범벅이 된 거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침부터 내리던 소낙비는 어느 새 그쳐 있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 뒤에서 언제고 고개 내밀 준비가 되어있던 태양은, 비가 발걸음을 물리기가 무섭게 회색의 장막이 걷힌, 푸르기만 한 그 하늘 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은 빗방울이 완전히 마르지 않은 우산을 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바쁘게 걸어가던 피터의 발걸음을 멈춘 것은, 최근 들어 잦아진 빗물 덕에 보도블록 틈새 사이로 고개를 내민 들꽃이었다. 이름조차 모를 그 들꽃은 도시가 선사한 아주 자그마한 자비에도 제 온 힘을 다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잎을 펼친 끝에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고, 아직은 축축한 아스팔트는 언제까지나 그 여린 꽃에게 자신의 틈을 내어줄 것마냥 무르디 무른 색으로 물든 채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태양 아래에서 바싹 메말라 가고 있었다. 하마터면 자신의 발에 밟힐 뻔한 들꽃은 여전히 그 짧고 알량한 줄기 끝에 매달린 채 하늘거리고 있었고, 제각기 자신들의 앞길 보기에 바쁜 사람들의 시선은 그 꽃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 들꽃을 막고 선 자신이 떠나고 나면 언제 밟혀 짓이겨져도 이상치 않을 그 꽃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 피터는, 제 알바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힘겹게 발걸음을 띄었고,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을 머금은 채 휘청이고 있던 들꽃은, 여전히 희디 흰 꽃잎들을 자랑스레 펼쳐놓은 채 멀어져 갔다.


 피터가 다른 곳보다 조금 후한 월급에 혹해 선택한 타코 가게는 다른 음식점들과 마찬가지로 대로변에 위치해 있었고, 어느 새 시야에 들어온 화려한 간판에 절로 움츠러든 어깨를 애써 편 피터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외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퇴근 시간의 타코 가게는 적당히 바빴다. 피터는, 첫 근무를 시작하고 한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른 곳보다 조금 더 후했던 월급이 하는 일에 비하면 결코 후한 편이 아니란 사실을 금세 깨달았고, 타코 가게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맛보기는커녕 들어보지도 못했을 식재료에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알바를 시작하고 장장 6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알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피터는 최근엔 자주 오는 손님 얼굴과 추가 주문을 거즌 외운 채였고, 그랬기에 얼굴을 다 가린 채로 계산대에 와서 다짜고짜 평소 먹던 걸로 10개를 달라는 사내의 주문은, 피터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네?”

 “평소에 먹던 걸로, 10개.”


 피터의 되물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답한 사내는 바닥 쪽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고, 후드 집업 모자에 눌린 검은 모자의 챙 아래에 드러난 얼굴을 본 피터는 숨을 들이쉰 뒤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엉망으로 구겨졌을 피터의 얼굴을 한참이나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던 사내는 이내 모자챙을 손으로 잡아 눌러 더 깊숙이 모자를 쓴 채 계산대에서 멀어졌고, 뒤늦게 피터가 계산대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것을 멀리서 발견한 매니저가 계산대를 향해 뛰어왔지만, 사내는 이미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후였다.


 종종 와서 대량 주문을 하는 손님이라는 매니저의 설명을 듣던 피터는 방금 전 봤던 사내의 얼굴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멍한 얼굴로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매니저가 어느 덧 한산해지기 시작한 가게 안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여자 손님은 이틀에 한 번꼴로 오시는 분인데 소스 맛만 조금 바뀌어도 알아채고 시비를 트고 무슨 가게 골수 단골처럼 굴지만 실제로 오기 시작한 건 6개월이 조금 안 됐고, 저 쪽 테이블에 앉은 저 둘은, 너도 알다시피 네가 알바를 시작하고 나서 자주 들르기 시작한 사람들이고, 그 외에도 우리 가게 단골이야 무수히 많지. 그리고 까탈스러운 손님들도 수두룩하고 말이야. 거기다 여긴 뉴욕이라고. 패션? 말할 것도 없지. 깔끔한 겉모습으로는 이 미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도시라고. 하지만 핏, 내가 장담하건대 내가 아는 한 여기 들렀던 모든 단골들 중에 으뜸은 아까 그 손님만한 분은 없었어.”

 “단골이요?”

 “뭐, 이상하게 요새 발걸음이 뜸하긴 했지만, 단골이야. 그 전엔 진짜 미친 듯이 타코만 사가서 우리가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우스꽝스럽게 눈썹을 찌그러트린 매니저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손님들이 엉망으로 쟁반을 반납하고 간 픽업대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잠시 빈 계산대를 쳐다보며 고민하던 피터도 매니저의 곁으로 가 선임이 건넨 쟁반을 닦기 시작했다.


 “때는 5년 전 여름이었지. 내가 처음 알바를 시작했을 때였는데, 너는 모르겠지만 그 때 우리 매장 매니저가 미친 개였거든? 난 막 들어온 신입이었고, 넌 진짜 지금 매니저가 나인 거에 감사해야 돼. 나도 그 때 저 사람 보고 굳어서 딱 너처럼 굴었는데, 그 때 그 매니저가-”


 한참 흥분을 해 말을 잇던 매니저는 언제 왔을지 모를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손님을 발견하곤 피터에게 쟁반을 넘긴 뒤 계산이 끝남과 동시에 타코 주문지를 주방에 넘겨준 뒤 다시 피터에게 와 이번엔 자기가 쟁반을 받아 닦기 시작했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피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여튼 대차게 까일 위기였는데 그 때 딱 끼어들어서 구해준 게 바로 그 손님이었어. 생긴 건 무슨 호러 무비 살인마처럼 생겼는데, 솔직히 그렇잖아. 여튼, 목소리가 얼마나 친절하던지, 진짜 눈물 날 뻔 했다니까.”


 고개까지 저어가며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을 해보인 매니저가 피터를 향해 비죽 웃어보였고,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은 피터는 마지막 쟁반을 그에게 넘긴 뒤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물론,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다음에 오면 그냥 딱 보통 손님들 대하듯 해줘. 그 손님이 평소에 먹는 주문은 내가 이따가 알려줄게.”


 어깨를 으쓱인 매니저가 피터의 어깨를 두어번 다독인 후 주방에서 나온 쟁반을 받아 서빙하기 위해 테이블들 너머로 멀어져갔고, 매니저의 말을 곱씹던 피터는 때마침 온 손님을 받기 위해 계산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Chapter 02. Happy Ending


 [니가 생각하는 해피 엔딩은 뭔데?]


 사내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고, 머리칼을 넘기는 손길은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반쯤 감은 그는 자꾸만 늘어지는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애썼다.


 [당신이랑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


 낮은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고, 아까 전부터 그의 등을 다독이던 손길은 그에게 잠들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나랑?]


 어딘가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말없이 올라간 입꼬리에 와 닿은 거친 손가락을 잡은 그는 조용히 그 손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이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당신이 내 곁에 있고, 내가 당신 곁에 있었다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게 해피 엔딩이 아닐까.]


 잠에 빠져든 귀는 웅얼거리듯 들리는 목소리에 담긴 단어를 헤아리는 것을 거부했고, 사내의 손을 붙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박동은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학생! 종점이야!”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었던 탓에 손님으로 넘쳐났던 가게에서 혹사당한 몸은 잠깐의 휴식을 놓지 못한 채 그를 수마로 이끌어갔고, 버스 창밖으로 늘어선 버스들에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서둘러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피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막차조차 끊긴 것은 물론 부재중 통화 옆에 찍힌 꽤나 많은 숫자에 혀를 찬 피터는 숙모에게 상황 설명이나 할 요량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이내 연속해서 자동 응답으로 넘어가는 전화에 아마 숙모도 잠들었겠거니 하며 집을 향한 발걸음을 서둘렀다.


 잠깐의 휴식이 줬던 안락함이나 어딘가 씁쓸했던 꿈의 여운은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 이후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잠시간 스스로가 무슨 꿈을 꾸었던가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느닺없이 울린 핸드폰에 잡생각을 떨궈야만 했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해온 것은 그의 오랜 친구인 MJ였고,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그녀는 진정하고 말을 해보라는 그의 다그침에 숙모가 집에 홀로 있다 괴한의 습격을 받았고, 지금 병원 응급실에 있으며 아주 위급한 상황이란 사실을 알려왔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MJ가 말한 병원으로 돌린 그는 텅 빈 대로변 곁에 서서 혹시나 올지 모르는 택시를 기다리는 대신 뛰어가는 길을 택했고, 그 사이에도 그의 핸드폰은 수없이 울렸다.


 흰 색으로 점철된 병원은 오만가지 이유로 병원을 찾은 사람들의 흐느낌, 절규로 가득 차 있었고, 콧속을 파고드는 알싸한 향에 몸을 떨며 숨을 고른 그는, 새빨간 색으로 쓰여있는 안내표지를 따라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로 들어서자마자 붉은 머리부터 찾은 그는 온갖 기계줄을 매단 채 잠들어 있는 숙모 위로 엎어져 있는 친구를 일으켜 집으로 보낸 후에야 숙모를 처음 봤다는 응급실 의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의사의 말은 단순 명료했다. 


 복부에 딱 두 발. 그게 다였다. 딱 죽지 않을 위치를 겨냥하고 쏜 총알들은 숙모를 정확히 죽지 않을 만큼 위급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고 아마 범인이 건 전화가 아니었더라면 그날따라 늦은 피터가 집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을 거라는 것.


 피터의 손을 감싸쥘 대면 늘 온기가 흘러넘치던 손은 파리해진 채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MJ의 성화에도 고수하는 백발은 땀에 젖은 채 베개에 흩어져 있었고, 굳게 다물린 입술 위에 덮어진 산소마스크는 일정한 박자로 습기에 젖어 흐릿해졌다 투명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회보장번호와 보험을 물으러 온 간호사 앞에서 절절매던 피터는 이내 그가 집안 재정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입술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고, 사무적인 태도로 건네진 영수증에 적힌 금액과 자신의 계좌에 남은 돈을 대조해보다 이내 깊은 절망감에 휩싸인 채 대기실 의자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그리고, 피터의 핸드폰이 다시 울린 건 바로 그 때였다.


 다급한 목소리로 무어라 외치던 통화는 비명과 함께 끝이 났고,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본 피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다시 자신의 자리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그는, 뉴욕시에 그토록 많은 히어로들과 달리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고, 그의 연인의 비명과 함께 통화가 끝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신고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가 핸드폰 화면을 다시 열었을 때 진동음과 함께 화면에 MJ의 엄마의 번호가 떴고, 그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전화는 끊겼다.


 또 다시 늘어난 부재중 통화 앞에 그가 갈팡질팡 하고 있는 사이 다시 짧게 울린 핸드폰은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려왔고,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열람한 그는 다정스레 숙모의 현재 상태를 묻는 글자들 끝에 달린 물음에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근데 핏, MJ가 도착할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혹시 나랑 통화하고 다시 병원에 있기로 한 거니? 그런 거면 전화 좀 해달라고 할래? 이 녀석이 통 전화를 안 받는 구나.]


 섬뜩한 문구에 그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을 때 요란스레 울리며 들어온 앰뷸런스 두 대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을 쳐다보던 그는, 천천히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이동 침대 중 하나엔 비명과 함께 전화가 끊겼던 그의 연인이, 나머지 하나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도 병원에 있겠다며 고집을 부렸던 그의 친구가 누워있었다.




Chapter 03. Suspect


 온통 은회색으로 이뤄진 벽을 따라 움직이던 피터의 시선은 전면이 거울로 된 곳에 이르러서야 멈춰 섰고, 그 때까지 그를 말없이 쳐다보던 수사관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네, 저기 너머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은 범인을 잡는 게 급선무겠죠, 안 그래요?”


 조금은 지친 듯한 기색으로 서류철에 든 사진을 넘겨 살피던 수사관은 여전히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피터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한참만에야 거울에서 시선을 뗀 피터는 여전히 서류철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수사관에게 물었다.


 “제가 뭘 말해줘야 되죠?”

 “원한 관계 같은 거죠, 뭐. 의사가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셋 다 정확히 같은 부위에 같은 종류의 총알을 두 발씩 맞고 왔어요. 그것도 하룻밤에. 셋의 공통점이라곤 댁밖에 없고요. 사실, 평범한 보복 범죄와는 좀 다른 양상이긴 한데-”

 “좀, 다른 양상이라고요?”

 “그 정도 실력이라면 충분히 죽일 수도 있는데 굳이 죽이지도 않고 병원에 신고까지 했다는 점이 좀 다르네요, 피터 벤자민 파커씨.”


 귀찮은 어조로 말을 잇던 수사관은 자신을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는 피터를 향해 혀를 찼고, 슬슬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거울처럼 보이던 벽이 갈라지며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 정도로 해두는 게 좋겠군. 우린 지금 범인을 심문하는 게 아니질 않나. 그리고 설사 용의자더라도 그렇게 심문하고 있다면 고치는 게 좋겠군. 모든 용의자는-”

 “일단은 무죄라는 가정 하에 심문해야 한다 이거죠? 나 참, 그건 당신이나 가능한 거죠, 캡틴.”

 “그러니까, 바른 생활 캡틴 아메리카 말고 누가 그렇게 원리 원칙에 철저할 수 있겠어, 안 그래? 그것도 하룻밤에 아름다운 여인 셋이 습격을 당한 판에 말이야.”


 캡틴이라 불린 사내의 뒤를 이어 들어온 사람은 토니 스타크였고, 토니 스타크를 보고서야 단정한 인상의 사내가 누군지 깨달은 피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귀찮은 듯 수사관을 밖으로 내보낸 토니가 피터의 맞은편에 하나 놓여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래서, 진짜 원한 관계 같은 건 없어? 아니면 뭐 숨겨놓은 돈이라던가.”


 건들거리는 듯한 태도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나 눈매에서 분노를 읽은 피터가 그의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저었고, 낮게 침음을 뱉은 캡틴 아메리카가 책상 위에 덮인 채 놓여있던 서류철을 뒤져 크게 인쇄된 감시 카메라 영상 사진을 피터 앞으로 내밀었다.


 “이 자가 일단은 용의자일세.”


 여느 범죄자와 마찬가지로 온 몸을 검은 옷으로 감춘 범죄자는 감시 카메라의 위치조차도 잘 알고 있었던 듯 감시 카메라에 등을 돌린 채였고, 아마도 피터를 배려한 듯 인쇄물 속엔 MJ나 그웬이 잘린 상태였다.


 “있지, 이건 우리 사정상 비밀인데 내 데이터 베이스엔 모든 미국 거주자 데이터가 축적이 되어 있단 말이야. 그냥 단순히 사회보장서비스 번호 정도가 아니라 얼굴, 체형, 기타 등등의 정보가 다 등록되어 있다고. 혹시 오해할까봐 말하는 건데 나도 빌런 추적할 때 빼곤 열어보지도 못하는 정보야. 알다시피-”


 말을 거기서 끊은 토니 스타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캡틴 아메리카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다음 어깨를 으쓱인 뒤에 여전히 피터의 시선이 박혀있는 인쇄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근데 웃기게도 이 인간은 그 데이터베이스에 없어. 그러니까 셋 중 하나라는 소리지. 미국에 불법 입국한 놈이던가, 아니면 내 데이터베이스를 털 정도로 뛰어난 놈이던가, 그냥 신종 빌런이던가. 하지만 분명한 건 어쨌거나 이건 우리 소관이라는 거고.”

 “일단 그웬 스테이시양과 자네 친구, 그리고 숙모님은 스타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옮겼네. 사람들을 지키는 게 우리 일인데 그걸 제대로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우리 책임이질 않겠나.”

 “하지만-”

 “돈이라면 걱정하지 마. 어디까지나 보상 차원에서 하는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도 없고. 일단 급선무는 이 자식을 잡는 건데, 그래서 협조 요청을 하러 온 거야.”

 “협조 요청이요?”


 뜬금없는 협조 요청에 피터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피터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던 토니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여전히 자신의 곁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캡틴 아메리카를 쿡쿡 찔렀고, 그제야 토니와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쉰 캡틴 아메리카가 피터에게 대답했다.


 “우리와 함께 스타크 타워로 가주겠나? 자네 뇌를 스캔해서 그 범인 정보를 찾을 걸세. 어쨌거나 우리가 가진 마지막 단서가 자네라서 말일세. 물론, 꺼려지기야 하겠지만-”

 “가죠.”

 “뭐?”

 “캡틴 아메리카랑 아이언맨이잖아요. 미국을 두 지키는 두 영웅의 말이라면 믿어야죠.”


 피터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던 토니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고 그런 피터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던 캡틴 아메리카가 피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일세. 그냥 스티브라고 불러도 되네.”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에 잠시 망설이던 피터는 이내 캡틴 아메리카가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뒤늦게 캡틴 아메리카의 손을 마주 잡았고, 내가 누군지는 알지, 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 토니가 피터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후에 먼저 방으로 나섰다.




Chapter 04. Coma


 당장 스타크 타워로 피터를 데려갈 것처럼 굴었던 둘은 피터를 스타크 타워로 데려가는 대신 병원에 내려준 뒤 면회가 끝나면 알려달라는 말과 토니의 번호를 남긴 뒤 자리를 떴고, 얼결에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셋이 같이 입원해 있다는 병실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문고리를 돌렸다.


 옅은 하늘빛으로 색을 칠한 병실은 여느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조금 우습기는 해도 그 인테리어 탓에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피터는 세 침대가 제멋대로 놓여진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메이 숙모는 물론이고 나머지 둘조차도 전에 본 적 없이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있기는 해도 한결 안정된 모습으로 숨을 쉬고 있었고, 일정한 박자를 유지한 채 선을 긋고 있는 바이탈 사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피터는 메이 숙모 침대 옆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아 눈을 붙였다.


 [피터.]


 어둠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익숙했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읊조리고 있었다.


 [난, 처음 널 봤던 날은 기억하지 못해. 그런 로맨틱한 말을 하겠다고 거짓말 하는 게 내 전문이긴 하지만, 지금 그런 짓을 해본들 무엇하겠어? 네가 웃어주지도 못할 텐데.]


 멀리서 들리는 음악이 그러하듯 그의 귓가를 맴도는 듯 하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쓴맛은 그의 혀를 휘어 감기 시작했고, 그가 인상을 찌푸릴 때쯤 모습을 감췄다.


 [그러니까, 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널 되찾아 올 거야. 설령 그로 인해 네가 날 혐오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난-]


 그 뒤로 더 이어질 듯했던 말들은 요란하게 울린 핸드폰 소리에 자취를 감춰버렸고, 갑작스런 소음에 눈을 뜨고 나서도 한참을 눈을 껌벅이던 피터는 벨소리가 끝나고서도 켜져 있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나서야 오늘 근무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있단 사실을 깨닫곤 놀라 화면에 떠 있는 부재중 통화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평소 성실하게 근무했던 피터의 별다른 설명 없는, 집에 일이 생겨 한동안 출근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에 쉽게 수긍한 선임은 그에게 가게 걱정은 하지 말고 일보고 오라는 말을 남긴 뒤 전화를 끊었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피터는 여전히 잠자는 것처럼 보이는 메이 숙모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병실 밖으로 나섰다.


 전화를 남기라고 한 뒤 떠나놓고 바로 조치를 취한 건지, 병원 앞엔 이미 까만 색 승용차가 대기 중이었고, 차를 타란 말 외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기사의 뒤통수를 잠시 쳐다보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피터는 높다랗게 솟은 건물들 위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하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름의 하늘이란 변덕스러워서, 아침에 경찰서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은 어느 새 회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 같은 하늘에 우산이 없단 사실을 깨닫고 피터가 한숨을 내쉴 때쯤 차가 멈춰 섰다.


 자신을 프라이데이라고 소개한 안드로이드봇은 같이 따라다닐 거란 생각과 달리 피터를 홀로 엘리베이터에 태운 후 그대로 사라졌고, 외벽이 투명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캡틴 아메리카의 내밀어진 손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기시감에 신음소리를 낸 피터는 때마침 멈춰선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피터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 건물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마주친 로봇과 똑같이 생긴 로봇이 소리 없이 그에게 다가와 목례를 한 뒤 그대로 그의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로봇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걷던 피터는 로봇이 옆으로 비켜선 후에야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깨닫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피터가 올 때까지만 해도 누군가와 열띤 토론을 하고 있던 토니는 피터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공중에 떠 있던 화면을 점멸시켜버린 후 곧장 그에게 뛰어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왜, 나도 이거 하고 싶었다고. 아까야 시간이 없어서 그냥 와버렸지만. 안토니 에드워드 스타크. 토니라고 불러. 넌 피터 벤자민 파커 맞지? 알바 하는 가게에 연락한다는 게 깜빡해서 나중에 연락했더니 이미 안다고 하더라고. 자, 그럼 일단 여기 앉으시고.”


 수선스럽게 빠른 속도로 말을 이은 토니는 피터를 긴 의자에 앉힌 후 머리에 팁 두 개를 붙인 뒤 모니터를 조작하기 시작했고, 삐빅거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긴장한 얼굴로 회색 천장에 시선을 올린 피터는 천장 위로 뜬 자신의 방 모습에 기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최소한의 프라이버시 존중이야. 내가 보는 걸 너도 봐야 내가 어디까지 뒤졌는지를 알지, 안 그래?”

 “하지만-”

 “꽤 정신없는 방이네. 오, 저 밴드는 나도 좋아하는 밴든데. 드럼이 예술이지, 안 그래?”


 눈을 찡긋한 토니는 그대로 화면을 빠르게 돌려버렸고, 연달아 에러음을 알리는 기계에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빠른 속도로 돌아가던 화면은 점점 느려지다 피터가 타코 가게에서 일하는 장면에서 정상 속도로 돌아갔고, 자신의 앞에 멈춰선 검은 모자챙에 피터가 멈칫했을 때, 인상을 찌푸린 토니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피터에게 물었다.


 “저 남자 알아?”

 “어,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고요. 저희 가게 단골손님이라는 건 아는데요.”

 “그게 다야?”

 “네.”


 피터의 대답에 다시 얼굴을 구긴 토니가 피터를 내버려둔 채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정상 속도로 돌아가는 화면 속에서 사내가 모습을 감춘 시점에서부터 다시 빠르게 돌아가는 화면에 고개를 저은 피터는 머리에 붙은 팁을 떼어낸 후 여전히 에러음을 울리고 있는 기계로 걸어갔다.


 [Coma]


 “아직 시제품이 아니라서 그래. 가끔은 토니 스타크 머리로도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거든.”


 어느 새 돌아온 토니는 화면을 꺼버린 채 피터에게 종이 뭉치를 건넸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종이를 받아든 피터는 종이 뭉치 가장 앞에 있는 남자의 프로필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나도 니가 무슨 기분인지 알아. 유령 본 느낌이겠지, 안 그래? 범인이 오래 전에 죽은 캐나다 용병이라니.”


 어깨를 으쓱인 토니는 피터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 뭉치들을 휙휙 넘기더니 특정 페이지를 펴주었고, 온통 뒷모습뿐인 사진들에 피터가 신음 소리를 내자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종이 뭉치를 가지고 가버렸다.


 “우선은 당분간 병원에만 있도록 해. 물론 네 숙모나 그 두 여성분이 위험해졌을 경우 곁을 지켜야 되는 것도 있긴 하지만 그나마 네 집보다는 안전할 테니까. 이 살인미수범이 다음엔 널 노리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경고조로 말한 토니는 어느 새 안에 들어와 피터의 곁에 서 있던 로봇에 눈짓을 했고, 로봇이 천천히 움직여 문 쪽으로 가는 걸 본 피터는 토니의 손에 들려있는 종이 뭉치를 잠시 응시하다 피터에게 대충 손을 흔들고 다시 꺼진 모니터를 켜서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한 토니 등에 인사를 남긴 후 스타크 타워 밖으로 나왔다.


 로봇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없이 그를 안내했고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가던 피터는 멀찍이서 보이기 시작한 정문 너머로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자마자 멈춰 선 로봇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검은 우산을 건넸고,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로봇을 빤히 쳐다보던 피터는 조용히 그 우산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피터의 인사를 받고도 고개만 까닥인 로봇은 말없이 다시 정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정문 앞까지 다다른 피터는 익숙한 검은 차가 대기하고 있음에 피식 웃은 후 우산을 펴들었다.


 비는, 여전히 매끈한 대리석 바닥을 향해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Chapter 05. the End


 너저분한 아파트에는 발 디딜 틈이 없어보였다. 다른 잡동사니를 둘 틈도 없이 모든 가구 위엔 잡다한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고, 낡아빠진 소파는 딱 두 사람이 앉을 만큼의 공간만을 남겨둔 채 옷가지 따위로 뒤덮인 채였다. 엉망진창인 집의 모습에 피터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의 등 뒤로 갑작스런 기척이 들렸고, 피터가 막 돌아서려 했을 때 다가온 두 손이 그의 두 눈을 가렸다.


 [허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장난스럽게 물은 상대의 손은 그의 눈 위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었고, 간지러움에 그가 웃음을 터트리는 동안에도 어느 새 그의 등 뒤로 움직인 상대는 천천히 그를 어디론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아마도 바닥에 즐비해있었을 잡동사니들이 그의 발에 채여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익숙하게 그 잡동사니들을 걷어차며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 걷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떼어졌다.


 [짜란!]


 얇게 구운 팬케이크들은, 거칠게 발라진 생크림에 덮여 있었고, 그 생크림 위엔,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위태롭게 버티고 선 딸기들이 꽤 정성스럽게 만든 듯 보이는 하트 모양새를 유지한 채 바들거리고 있었다. 새하얀 접시 위에 있는 팬, 케이크, 그러니까 아마도 케이크일 음식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의 등 뒤에 모습을 감춘 상대의 입에서도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설마 까먹은 건 아니지? 우리가 사귄지 10일째 되는 날을 까먹은 게 아니라고 말해줘!]

 [제발, 100일도 아니고 10일이잖아요.]

 [10일을 까먹는데 100일은 까먹지 말란 법이 있어? 오, 피터 파커가 이렇게 불성실하답니다, 여러분! 뉴욕시의 영웅 스파이더맨이 이렇게 연인한테 불성실하다고요! 사랑이 식었어! 식었다고! 저 접시 위의 팬케이크만큼-]

 [제발-]

 “-데드풀.”


 자신이 내뱉은 단어에 저도 놀라 파드득 몸을 일으켰던 피터는 어둠 속에서 메이 숙모의 침대 옆에 서 있는 인영에 놀라 얼른 침대 밖으로 내려섰고, 피터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던 듯 보이던 사내는 그가 무기가 될 법한 걸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고개를 숙여 메이 숙모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침대 옆에 있던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그 동안 링거대를 찾아 손에 쥔 피터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링거대를 사내에게 겨냥했고, 피터의 모습에 피식 웃은 사내가 침대 옆에 있던 전등을 킨 뒤 입을 열었다.


 “핏. 그걸로는 날 죽일 수 없어.” 

 “그래도 상관없어. 곧 경비들이 올 거야. 여긴 스타크씨 병원이라고.”

 “아, 그랬던가.”


 꿈이라도 꾸는 듯 아련하게 말한 사내는 아예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뒤 고개까지 뒤로 젖혀버린 채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링거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였고, 바싹 마르기 시작한 입술을 깨문 피터가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차마 죽일 수는 없었거든.”


 평온한 어조로 말한 사내가 내내 다리 위에 얹어놓고 있던 손을 꼼지락 거렸고, 그제야 사내가 총을 들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피터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을 때 사내의 고개가 들렸다.


 “저기 누워있는 MJ는, 조금 떽떽거리기고 자기중심적이긴 해도 너만큼이나 올곧은 여자였고, 그 옆에 누워있는 그웬 스테이시는, 나 같은 인간은 범접할 수도 없는 네 첫사랑이었는데다 그리고 메이 숙모는-”

 “닥쳐!”

 “나한테도 파이를 잘라 주시던 상냥한 분이셨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겠어, 안 그래, 핏?”

 “너한테 내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한 적 없어!”


 링거대의 무게가 슬슬 부담스러워진 그의 팔이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사내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이, 자신이 들고 있는 링거대로 향한 것을 본 피터가 뒷걸음질 쳤고, 꼼지락거리던 손을 움직여 총을 장전시킨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나도 많이 물러진 거겠지. 그도 그럴게 내 연인이 스파이더맨이었다고, 빌어먹을 스파이더맨.”


 총신은 어둠 속에 잠겨 눈에 보이지 않았고, 빛을 등진 사내의 눈은 이제 꺼멓게 죽어 있었다.


 “그래도 말이야, 조금은 섭섭했어. 네 환상 속에서 내 비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 그랬다가 이내 수긍했지. 네가 원하는 해피엔딩이라면, 아마 이럴 거라고. 내가 용병짓이나 하다가 그 빌어먹을 암도 없이, 지긋지긋한 힐링 팩터나 타노스의 저주도 없이 죽는 거. 그게 네가 생각한 ‘날’ 위한 해피엔딩일 거라고. 하지만, 피터 벤자민 파커. 이번엔 네가 틀렸어.”


 안정된 속도로 삐빅거리는 소음은 어느 새 네 개로 늘어있었고, 당황한 나머지 사내를 향하고 있던 링거대가 휘청이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로 피터가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사내의 손이 링거대를 잡아왔다.


 “내가 널 만나기 이전이었다면 모를까, 이젠 너 없이는 내 인생의 해피엔딩이라는 건 없다고.”


 거칠게 잡힌 링거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병실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고, 두 손이 빈 채 떨고 있는 피터의 어깨를 잡은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메이 숙모는 안전하게 잘 지내고 계셔. 저기에 누워있는 건 네 숙모가 아니라고.”


 삐빅거리는 소음은 이제 다시 세 개로 줄어 있었다. 선명하게 귓가에 울리고 있는 하나와, 어느 새 멀찍이로 떨어져버린 두 개로.


 “MJ는, 너랑 헤어진지 오래고. 아, 꿈도 이뤘어. 끝내주는 여배우가 되셨거든.”


 무언가 더 말을 이으려던 사내는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고, 이제 삐빅거리는 소음은 두 개로 줄어 있었다.


 “그리고, 그웬 스테이시는 오래 전에 죽었어. 그린 고블린이 떨궜는데 네가 잡질 못했거든.”

 “닥쳐!”

 “그게 네 탓은 아니야, 핏. 하지만 죽은 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지.”

 “닥치라고!”


 삐빅거리는 소음은 이제 하나로 줄어있었고, 텅 비어버린 병실은 어느 새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하얗게 빈 공간 속에서 사내는 여전히 회색 후드집업 모자와 검은색 챙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였고, 사내의 손에 들린 총이 천천히 들려져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 피터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사내의 손이 그의 뺨을 감싸왔다.


 “그래, 꿈에서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가 죽는 거지, 안 그래? 하지만, 피터, 허니.”


 사람을 물기 직전의 개가 그러하듯 으르렁거리던 사내의 목소리는 어느 새 차분해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끝을 고할 듯 나직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피터 벤자민 파커를 죽일 수 있겠어. 내 사랑을, 어떻게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겠냐고.”


 천천히 눈을 뜬 피터는, 어느 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사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지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가 총구가 사내의 머리를 향하고 있단 사실에 기겁을 하며 사내의 손을 잡았고,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한테 난 죽어 마땅한 사람 아닌가? 꿈속이긴 해도 난 네 첫사랑을, 네 단짝 친구를, 그리고 메이 숙모를 거의 죽을 지경으로 몰아간 사람이잖아.”

 “죽어 마땅할지는 몰라도,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당신이 잘못했을지 몰라도, 그게 당신이 죽어야 된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제발, 그 총 좀 내려놔요!”

 “피터, 난 자기가 나한테 소리 칠 때가 제일 좋더라.”


 사내가 총을 잡지 않은 손으로 피터의 손을 감쌌고, 피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사내가 비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바보 멍청이라 자기를 죽이지 않고 꿈에서 깨울 방법이 이것뿐이 생각나지 않는데 어쩌지.”

 “안 돼요, 안 돼! 데드풀, 제발!”


 내뱉은 단어에 스스로 놀란 피터가 사내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고, 당황한 피터가 다시 손을 올리기 전에 한 손으로 피터의 두 손을 결박한 사내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럼 현실에서 봐, 달링.”


 그리고, 공허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Chapter 06.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옅은 하늘빛 천장이었다.


 곧 이어 들린 알람음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의 온갖 키스와 잔소리, 울음 속에서 눈동자만 굴리던 피터는, 이내 누군가 하나가 빠져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고, 사람들 무리 등 뒤에서 멀찍이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가 손을 뻗기가 무섭게, 그 사람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사라졌던 데드풀을 피터가 다시 본 건, 그가 깨어나고도 한 달이 지나서였고, 반죽음 상태로 온 데드풀 대신 그가 피터를 그렇게 만든 상대 쪽을 혼자서 털러 갔다는 말을 전한 토니는 피터의 주먹을 맞아야만 했다.


 “나 왔어요, 웨이드.”

 “다시 만나서 반가워, 허니.”


 아직 회복이 덜 된 탓에 입꼬리만 올려 웃는 데드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피터는 좀 있으면 또 다시 빠져버릴 머리칼을 한차례 쓸어 넘긴 뒤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정색했고, 긴장한 얼굴로 있는 데드풀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준 뒤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서 그웬에 MJ, 메이 숙모까지 쐈다 이거죠?”

 “하지만, 그 정도면 깨어날 줄 알았단 말이야. 메이 숙모를 쏠 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넌 모를걸.”

 “당신이요?”

 “물론, 울지는 않았지. 하지만, 눈에서 땀 정도는 났던 것 같애.”


 장난스럽게 울상을 지어보이는 데드풀의 코를 잡아당긴 피터가 다시 엷게 웃었고, 그를 따라 미소 지은 데드풀이 어느 새 다 회복된 팔로 피터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잘 돌아왔어, 피터.”

 “다녀왔어요, 웨이드.”

 

Posted by Spideypoo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