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mour has it.
썰/덷거미덷 2016. 8. 18. 11:43 |Rumour has it.
Chapter 01.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아직 하지 못한 말도, 해야만 했던 말들도.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산산이 조각이 나 머리를 부유하는 탓에 굳어버린 혀는 입천장에 눌러 붙은 채 침묵하고 있었고, 그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손 틈 사이로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스파이더맨.]
온통 회색빛인 곳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린 시간들보다도 더 검붉은 색의 옷을 입은 사내의 입 꼬리가 올라간 듯 마스크가 비틀렸고, 기괴한 모양새로 찌그러진 마스크는 산산조각이 나버린 그의 말들보다도 엉망인 채였다.
[피터 벤자민 파커.]
혀는 여전히 답답하게도 제자리를 지킨 채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있었고, 흘러가는 시간만큼이나 빠르게 차가워진 체온은 지나치리만큼 비현실적이었다.
[그 어느 것도 네 잘못인 건 없어. 그저, 다들 제 명줄대로 사는 거지. 그렇게 치면 나보다 일찍 죽은 놈들은 다 억울해서 두 번 뒈졌겠네, 안 그래?]
평소라면 거친 숨 속에서 뱉어진 말들에 기가 찬 웃음이라도 뱉었던 입술에서 터져 나온 것은 울음이었고, 가느다랗게 떨리며 들어 올려진 손이 뺨에 닿고서야 자신이 아까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움츠러들자, 사내의 손은 빠른 속도로 떨어져나갔고, 손을 붙잡는 대신 이마를 맞댄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구급차가 올 거야. 배너 박사님도 올 거고, 토니도, 그리고, 그게 누구건 올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그 때까지만 버텨줘. 그러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아냐. 그래, 그렇다고 하자. 쓸데없는 걸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아무래도, 아무리 나라도, 이번만큼은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거든. 사랑해, 피터 파커. 피터, 사랑해.]
찢어진 마스크 사이로 희미하게 떠져 있던 눈꺼풀이 감기는 걸 본 그가 발작이라도 하듯 더 크게 울음을 터트리자 낮게 웃음을 터트린 사내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끝까지 말해줄 순 없는 거지, 그치? 그래, 그래……. 그래……그거면, 됐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빨대를 입에 문 채 말간 눈으로 쳐다보는 청년의 얼굴을 밝았다. 좁은 화면 너머로 보이는 벽엔 익숙한 포스터들, 메모판이 어렴풋이 보였고,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은 그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상대가 보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오랜 버릇만큼은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아냐, 계속 이야기 해.”
“그러니까! 애초에 과학부인 저한테 왜 문학부 일을 시키나 이거죠. 애초에 그 작가 소문이 얼마나 안 좋은데요. 담당자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그러지, 그 퇴사한 담당자들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다 그러지. 진짜 얼굴을 못 본 건지, 비밀 유지 서약 때문에 고소 당할까봐 말을 못 하는 건지. 아, 일하기 싫다.”
“그래? 작가 이름이 뭔데?”
“데드풀이요. 이름도 웃기지 않아요? 데드풀이라니-”
“데드풀이라고? 본명은?”
“어, 그게, 음, 아무도 모르는데-”
그의 격한 반응에 청년이 어리둥절해하거나 말거나 다급해진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며 빠르게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고, 이상한 침묵에 표정을 굳힌 청년이 막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책상 옆 스탠드 스위치에 손을 올린 그가 다급히 말했다.
“그 인터뷰, 내가 가면 안 될까.”
“네?”
“그 인터뷰 내가 가고 싶다고 했어. 질문이야 네가 뽑아주면 되고, 나도 이쪽으론 경험이 있으니까-”
“에이, 그건 안 되죠. 일 하기 싫은 게 맞긴 한데 잘리고 싶단 소린 아니……였거든요…….”
청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등 스위치를 킨 그는 사색이 되어가는 청년의 얼굴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고, 그 잠깐 사이에 진정한 청년이 적대적인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 누구예요?”
몇 번이고 연습한 상황이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모든 준비를 끝내놓은 그였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어려웠다.
“만나서 반가워, 피터 파커. 내 이름은 피터 벤자민 파커, 다른 세계의 너야.”
Chapter 02.
자신을 다른 세계의 피터 파커라고 소개한 사내는 이내 그가 인터뷰 하려는 작가와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고, 자세한 설명 없이는 어려울 것 같다는 그에게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보다도 더 믿긴 힘든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좋아요. 당신이 사랑을 찾아서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까지는 믿을게요. 근데 뭘 믿고, 아니, 다른 세계의 피터 파커가 당신을 안 도와주면 어쩌려고 그런 도박을 했어요? 당신이 진짜 저라면 그 정도는-”
“피터 파커잖아. 핏.”
그의 말을 끊고 대답한 사내는 미묘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고, 사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그는 헛웃음을 짓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인터뷰 정도야 괜찮겠죠. 하지만, 제가 일자리 잃게 만드시는 건 안돼요. 아직 학자금 대출도 산더미거든요.”
“그래.”
“고맙다는 말은요?”
“고마워.”
지나치게 말을 아끼는 사내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는 상태였고, 괜한 짓을 했나 싶어 잠시 망설이던 피터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채팅창 상단에 있는 자신의 아이디를 보곤 고개를 내저었다.
피터 벤자민 파커.
반쯤 장난으로 시작한 랜덤 채팅 치고는 지나치게 정직한 아이디가 문제였을까. 여전히 희미한 불빛 속에서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내의 얼굴은 자신보다 조금 더 늙었을 뿐, 자신의 것과 똑같았고, 무심결에 학창 시절 3시에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괴담을 떠올린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기 위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화면을 응시했다.
“말만 하실 거예요?”
“뭐, 계좌로 돈이라도 쏴줄까?”
“나 참, 그게 아니라- 헐?”
“모르나본데 나도 얼굴 없는 유명인이라서 말이야. 얼마 전에 네가 취재한 회사? 거기 기술 고문이 나야. 덕분에 돈은 벌만큼 벌었어.”
입금 알림이 뜬 핸드폰 화면엔 생각지도 못한 금액이 떠있었고,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막 도대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에 대해 물으려는 찰나, 사내가 말을 이었다.
“여기가 내가 살던 세계의 평행세계라는 걸 잊지 마, 피터. 이상한 생각도 하지 말고. 그리고 비번은 바꾸는 게 좋을 걸. 그러다 한 번 털린다. 내가 그랬거든.”
비식 웃은 사내는, 문자로 자신의 번호를 보내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화면을 껐고, 화면이 꺼지기가 무섭게 또 다시 울린 핸드폰으로 딱 번호만 보낸 문자가 뜨는 것을 본 그는, 혀를 내두르며 약속 시간과 장소를 보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Chapter 03.
비가 올 것처럼 흐리던 하늘은 어느 새 맑게 개여 있었다. 여름의 끝에서도 발을 물리지 않은 더위는 도시를 녹여버릴 듯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었고, 예년이라면 애진작에 목소리를 죽였을 매미들의 소음은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낡은 철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그는, 피터, 그러니까 편의상 벤자민으로 부르자면, 벤자민이 챙겨준 질문지를 다 잡은 뒤 초인종을 눌렀고, 거친 쇳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피터, 벤자민, 파커.”
“안녕하세요, 데드풀씨.”
“그냥 데드풀이라고 부르지 그래요? 음료는 뭘로 할래요? 뭐가 좋을지 몰라서 일단 다 사와 봤는데.”
앞서 걸어가던 사내가 손짓으로 가리킨 식탁을 본 그는, 다 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식탁을 가득 메운 음료캔들 사이에서 망설이다 어색한 얼굴로 생수통을 집었고, 그가 식탁 앞에서 고민하는 사이 소파로 향한 사내는 집 안에서 회색 후드 집업에, 챙모자까지 눌러쓴 채였다.
“여기가 집이 아니신가봐요.”
“맞는데요. 왜요?”
“복장이 그러시길래요.”
우연찮게 온 히어로가 없는 세계에서조차 불행은 사내를 그냥 보내지 못한 듯 했고, 그의 말에 모자를 더욱 눌러쓰는 사내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그는 애꿎은 질문지를 움켜쥐며 사내의 옆에 자리 잡으며 말했다.
“좀 춥네요.”
“아, 온도를 높일까요?”
“그럼 덥지 않으시겠어요?”
그의 말에 망설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헛기침을 하며 질문지를 커피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그제야 그가 자신의 바로 옆에 앉아있다는 걸 깨달은 듯 화들짝 놀란 사내가 자리를 벌리자 멋쩍게 웃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죄송해요. 습관이라.”
“모르는 사람 바로 옆에 앉는 게요?”
당신 바로 옆자리에 앉는 게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걸 누른 그는 고개를 저으며 긴 소파 옆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고, 사내가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걸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후드 집업 정도는 벗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 그게-”
“그런 데 편견 없으니까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네?”
“이렇게 유명한 작가시면 공개 팬 사인회 정도는 해도 되는데 철저히 익명을 지키시는 걸 보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담담하게 말을 이은 그가 사내를 빤히 쳐다보다, 사내의 손에 들려 있던 에어컨 리모콘이 삐빅거리는 소음을 내기 시작할 때쯤 시선을 뗀 뒤 질문지를 끌어 사내의 앞에 놓았다.
“불편하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역시 기억하시나 보네요.”
“네?”
이번에 당황한 쪽은 그였고, 후드 집업을 벗은 사내가 이어 모자까지 벗은 뒤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웨이드 윌슨입니다. 데드풀은 가명이고요. 뭐, 그게 진짜 이름인 사람은 없겠죠. 다시 뵙게 돼서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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