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

썰/덷거미덷 2017. 7. 20. 16:03 |



잔상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있었던 것들이 남긴 잔해는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채 버려진 채였다.



Chapter 1_우산.



네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내 자린 거기야.


빛을 내지 않는 날에도 어둠 속에 달이 존재하듯,

네가 나를 보지 않는대도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어두운 밤, 달이 네 머리끝에서 떠나지 않듯, 그렇게.



 긴 그림자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키고 선 태양 덕에 끈질기게 땅에 들러붙은 여름날이었다.


 평소와 같은 하루를 마친 그의 머리 위에선 나무 어딘가에 붙은 매미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드높였고, 얼기설기 얽어진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그림자는 희미하게 올라온 어둠에 섞여 뭉그러진 모양새로 그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띵똥]


 익숙한 알람음에 핸드폰을 꺼내 연 그는 주르륵 늘어선 문자 중 가장 아래쪽에 있는 문자 내용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수고했어, 오늘도.」


 간결한 내용으로 주르륵 늘어선 문자들은 답 하나 없이도 매일 같이 같은 시각 그의 핸드폰으로 날아왔고, 어째선지 유독 이 문자만 비활성화 되는 차단탭에 열불을 낼 기운조차 잃은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버스 정거장에 섰다.


 그리고, 그가 버스 정거장을 알리는 표지판 옆에 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급작스레 쏟아진 폭우에 조용히 욕설을 뱉은 그는 내일 당장 제출해야 하는 노트북이 있는 가방을 끌어안은 채 오늘따라 늦는 버스가 올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우산이 없나봐요?”


 기척 없이 다가온 사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우산을 그의 쪽으로 기울여주었고, 이 낯선 사람의 친절을 받아들일지 말지 잠시 고민하던 피터는 이미 반쯤 젖은 가방에 어설프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그러게요. 갑자기 비가 이렇게 올 줄은 몰랐거든요.”

 “여름비가 늘 이런 건 아니죠. 보통은 이이이렇게 찌푸리고 있다가 와장창 쏟아지니까요, 그쵸?”


 말쑥한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은 사내는 피터가 웃음을 터트리자 비죽 웃은 뒤 멀찍이서 모습을 드러낸 버스를 가리켰고, 아무생각 없이 탄성을 지르며 도로를 향해 한발자국 내디뎠던 피터는 자신이 사내에게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대해 말한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이게 제가 타려는 버스인 줄은 어떻게 아셨죠?”

 “전 그냥 버스가 오길래 가리킨 건데요.”

 “아하.”

 “운 좋게 맞췄나보네요.”


 씩 웃은 사내는 우산을 씌워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버스에 오르려는 피터를 잡아 세운 뒤 쓰고 있던 우산을 피터의 손에 쥐어줬고,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말했다.


 “전 우산이 하나 더 있거든요.”

 “그럼 왜-”

 “잘생긴 남자 보면 씌워주려고 일부러 숨기고 있었죠. 잘 가요, 잘생긴 청년.”

 “어, 네. 감사합니다.”

 “거, 탈거요, 말거요?”


 버스 문을 연 채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성질이 난 듯 둘을 향해 외쳤고, 버스 문이 닫히기 직전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피터가 서둘러 버스 창문으로 향했지만 사내는 이미 버스 정거장에서 등을 돌린 채 어디론가 걸어 사라지고 있었다. 있다던 우산도 쓰지 않은 채로.


 [피터 파커. 수고했어, 오늘도.]



Chapter 02_연락.


끝나지 않는 이야기란 없어.

끝을 모를 이야기라면 또 모를까.


 사내의 단서를 찾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집에 도착해 탁한 하늘빛의 우산을 접던 피터는, 우산을 돌돌 말던 중, 우산에 달린 천에 적힌 전화번호를 한참이나 노려보다 잠금쇠를 채워 현관문 옆에 우산을 세워두었고, 여전히 차단이 되지 않는 발신자표시제한으로 날아오는 문자들이 띄워진 폰화면을 한참이나 톡톡 두들겼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 박힌 폰번호가 핸드폰에서 눌리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매일 같은 시각 날아오던 문자가 오는 일 또한 더 이상은 없었다.


 그 다음 날 바로 버스 정거장을 바꾼 그로서는 사내가 또 다시 그 버스 정거장에 왔는지 알 방법이란 없었다.


 [띵동.]

 [번호 일부러 남겼는데 우산, 안 돌려줄 건가 봐요?]


 갑작스레 울린 핸드폰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피터는 꺼져있던 핸드폰 화면에 뜬 문자 미리보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 순간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여튼, 수고했어요, 오늘도.]


 익숙한 문구에 섬짓함을 느낀 피터는 여전히 울리지 않는 스파이더 센스를 탓하며 핸드폰과 우산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우산 하나 버렸구나 했어요, 사실.”


 그 날과 마찬가지로 말쑥한 차림새를 한 사내는 갑자기 튀어나오라는 그의 말에도 순순히 그러겠다 응했고, 잠시 망설이던 피터가 순전히 심술로 고른 피터집 근처의 24시 카페의 위치만 물어봤을 뿐이었다.


 어두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내의 취향인 듯 보이는 후드가 달린 검은색 양복과 빨간 와이셔츠, 그리고 검은 넥타이는 피터의 눈에 익숙했고, 피터의 시선을 의식한 듯 어깨를 으쓱인 사내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집에 얌전한 옷이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근데 또 어울리기도 해서 그냥 똑같은 걸로 잔뜩 사버렸어요.”

 “똑같은 걸로요?”

 “네. 한 7벌 정도?”

 “7벌?”

 “일주일에 하나씩 일곱벌. 갈아입긴 해야 되니까요. 속옷은 헷갈릴까봐 색깔별로 요일을 정해놓긴 했는데-아. 너무 사적인 이야긴가요?”


 머리를 긁적인 사내는 때마침 맹렬하게 울리기 시작한 진동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빈자리 곁에 기대어진 하늘색 우산을 응시하던 피터는 더 이상 사내에게 말려들지 않겠다 다시 다짐한 후 천천히 테이블로 다가오는 사내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아, 내 이름은 웨이드 윌슨일 거예요. 아마?”

 “아마라고요? 자기 이름도 몰라요?”

 “음…말하자면 긴데, 기억상실증이라서 앞쪽 기억이 훅 날아갔지 뭡니까, 하하. 어느 날 일어나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남아있는 거라곤 그 날 테이블에 놓여져 있던 내 이름, 내 신상, 뭐 이런 거였고, 몇날 며칠 어디로 우산을 가지고 나가라, 작별인사는 뭐라 해야 한다 이런 것 뿐이었어요. 가령 피터 파커. 수고했어, 오늘도. 라던가.”


 그제야 가볍게 던지는 인사치곤 어색한 끼가 다분했던 작별인사를 떠올린 피터는 그게 외워서 나온 인사여서 그렇다는 걸 깨닫곤 이 사내가 어느 빌런이 보낸 미끼일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어색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내가 피터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잘생겼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어요, 피터. 당신 이름이 맞죠? 피터 벤자민 파커.”

 “최근에 접촉한 사람이 누구죠?”

 “접촉한 사람이요? 애초에 제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서-”

 “당신을 챙겨주는 사람 정도는 있을 거 아니에요?”


 피터의 질문에 눈썹을 치켜 올린 사내는 뭔가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 양복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고, 반사적으로 사내의 손목을 잡아챈 피터는 사내의 손에 잡힌 꼬깃꼬깃한 종이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뭐죠?”

 “펴보시면 아시겠네요. 안 그래도 당신 주려고 꺼내던 거였어요.”


 몇 번이나 보고 다시 접었는지 꼬깃꼬깃해진 종이 안쪽엔 이름부터 시작해 사내의 신상정보로 추측되는 것들이 주르륵 적혀 있었고, 맨 마지막 문단에 이른 피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갑작스레 쏟아지려는 눈물들을 참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7월 중순 언젠데 언제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니까 매일 우산을 챙겨 나가도록. 갈색머리에 어벙하게 생긴 애가 비를 맞고 있을 건데 우산 씌워주고 말도 좀 걸어주고 웃게 해줘. 작별인사도 폼나게 해주라고. 가령-」


 “피터 파커, 수고했어, 오늘도.”


 마지막에 적힌 말을 중얼거리자마자 그 날의 비처럼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줄 몰랐고, 자신이 왜 우는지 모르는 피터의 뺨으로 사내의 손이 닿아왔다.


 “나도 내가 왜 그 날 거기로 가라고 했는지 몰랐어요. 그래도 어차피 기억도 잃고 할 일도 없어서 매일 그 근처 벤치에 앉아 버스 정류장만 쳐다봤죠. 그래서 당신이 그 갈색머리 어벙하게 생긴, 물론 이건 기억을 잃기 전 내 의견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게 당신이란 걸 알았죠. 그래서 그 버스 번호도 알던 건데, 아는 척하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당신 누구야!”

 “웨이드 윌슨-”

 “진짜 정체를 밝히라고!”

 “내가 아는 나는 이미 당신도 다 봤어요. 그게 다라고요. 번호도 거기에 적혀 있어서, 그래서 알 수 있던 게 다예요.”

 “도대체, 누구길래-”


 멀찍이서 들린 굉음에 말을 끊은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를 따라 일어선 사내가 황급히 피터를 쫓아와 팔을 잡아왔지만 그 팔을 손쉽게 떨쳐낸 피터는 카페 밖으로 나와 굉음이 들린 방향을 향해 몸을 띄웠다.


 눈물은 여전히 멎지 않은 채였다.



Chapter 3_인어공주.


하얀 거품으로 돌아간 인어공주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바다로도,

왕자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육지로도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밀어내는 바닷물에 떠밀리고

자신을 산산조각 내는 모래들에 흩어질 뿐이었죠.


 “그래서 그 인어공주가 누군지 아직도 못 알아냈어?” 

 “토니.”

 “아니, 그렇잖아. 천하의 스파이더맨을 구해줬으면 생색을 낼 법도 한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도 그렇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그렇고, 딱 인어공주지 뭐. 주변에 갑자기 나타난 말 못하는 친구 없어?”

 “없어요! 없으니까 캐낼 생각 그만 하시고 저리 가시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뭔가 말을 더 하려던 토니는 자신을 찾는 프라이데이에 피터의 어깨를 두들긴 뒤 발걸음을 돌렸고, 고개를 저으며 실험실에 들어간 피터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 날, 퀸즈까지 들렸던 굉음을 따라간 피터를 기다리고 있던 건, 뉴욕 상공을 덮은 고블린 떼였다.


 그 날따라 늦은 어벤져스 때문에 홀로 고군분투하던 피터는 미처 피하지 못한 홉고블린의 호박 폭탄에 맞아 추락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 때 어디선가 나타난 누군가가 익숙하게 피터의 손목에 있는 웹슈터를 조작해 추락속도를 늦췄고, 바닥에 닿아 의식을 잃기 직전 뭐라 속삭인 그 누군가는 찢어진 피터의 마스크를 벗겨낸 뒤 정체를 알 수 없는 멀쩡한 마스크로 바꿔 씌워놓은 뒤 사라졌다.


 투박한 빨간색 마스크엔 검은 색의 큰 포인트가 두 개 있었고, 그 가운데에 자그마한 눈구멍까지. 자신의 마스크를 따라한 듯 보이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마스크 모양새에 빨강과 검정으로 이뤄진 정장을 입고 있던 사내를 떠올린 피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실험실에서 뛰쳐나갔다.


 “웨이드, 지금 나 좀 만날 수 있어요?”

 [지금은 부재중이오니 삐 소리가 나면-]


 긴 수신대기음 끝에 들린 건 기계소리였고, 그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핸드폰을 내렸을 때, 익숙한 모습을 한 누군가가 그의 맞은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윌슨씨!”

 “어, 피터 파커?”

 “여긴 어쩐 일로 왔어요?”

 “당신이 찾던 절 도와주는 사람이 여기 있거든요. 제 사례가 독특하다고 연구 대상이 되어주면 무료로 치료를 해주겠대서……. 그 보다 당신이 여기서 일할 줄은 몰랐네요.”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불쾌감을 드러내며 둘 사이를 막아선 토니가 고개를 내저으며 피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개했다.


 “얜 우리 실험실에서 일하는 피터 파커. 그리고 여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웨이드 윌슨. 그게 다야. 더 알 필요도 없지. 오늘은 조금 늦었네? 알다시피 난 바쁜 사람이라고. 또 이러면 곤란해, 웨이드.”

 “토니, 이 사람하고 할 말이 있-”

 “다음에 해, 피터. 오늘은 이게 우선이거든. 안 그래?”


 이미 토니에게 팔이 잡힌 채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는 이내 그럼 그렇지, 란 표정의 토니에게 끌려가 버렸고, 멍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피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프라이데이?”

 [네]

 “웨이드 윌슨이 여기에 오기 시작한 게 언제지?”

 [그 사항은 기밀 사항으로 토니 스타크 외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웨이드 윌슨에 관련되어 나한테 공개할 수 있는 정보는?”

 [없습니다.]

 “토니가 왜 저렇게 웨이드 윌슨을 감추는지도?”

 [네.]


 프라이데이의 공허한 대답에 더 이상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답이란 없을 거라고 생각한 피터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발걸음을 돌려 건물 밖으로 향했다. 여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고, 여름의 태양 또한 여전히 하늘 한 가운데서 그를 주시하고 있는 채였다.

Chapter 4_우연.


베틀에 걸린 실타래가 엉키는 일은 없었어.

그걸 빗어 내리는 손이 멈추는 일이 없는 한은 말이야.


 매일 같이 쓰던 일기는 어느 시점으로부터인가 비어있었다. 내용이나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가 어색했고 비어있을 뿐.


 그 이질감은 장장 3년간 지속되다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그 3년간의 기록을 계속해서 검토하느라 집중하고 있던 피터는 갑자기 울린 핸드폰 알람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했었네요?]


 핸드폰은 무음으로 설정된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 문자를 노려보던 피터는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자신의 홈페이지를 보다 답장을 보냈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 어때요?]

 

 답은 없었다. 자신이 보낸 문자 옆에 자그맣게 생긴 읽음 표시를 쳐다보던 피터는 옷을 챙겨 입은 뒤 집을 나섰다.


 여름의 짧은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거리와 함께 약속 시간이 다가 올수록 초조해진 피터는 애꿎은 테이블을 두들겼고, 나무 테이블 위로 미세한 균열이 생겨날 때쯤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예요?”

 “얼마 안 됐어요.”

 “그렇다고 치죠. 그보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죠?”


 의아해하는 사내의 의자 옆엔 하늘색 우산이 놓여졌고, 다른 말부터 꺼내야 싶어 한참이나 망설이는 피터를 대신해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토니 때문인가 보네요.”

 “네?”

 “전화가 온 건 그 전이라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안 그래요?”


 어깨를 으쓱인 사내는 다 식은 채로 놓여있던 커피 잔을 들어 입을 대었다 인상을 찌푸렸다 미소 지었다.


 “얼마 안 됐다고 하더니.”


 여전히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나타난 사내의 얼굴은 전형적인 서양 미남이었고, 푸른 눈은 어딘가 익숙했지만, 또 어딘가 달라보였다. 그 날 처음 만나고 이제 네 번째 만나는 이 사내에게서 오는 익숙함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알 수 없어 짜증이 난 피터가 인상을 찌푸렸고, 그걸 다르게 해석한 듯한 사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네요. 토니랑 약속한 거라서. 그냥 뇌파 검사 받고 뭐 이런 저런 약물 좀 맞고 그게 다예요. 보통 기억상실증은 저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미리 알기라도 하듯 글을 남겨놓는 것도 흔치 않고, 또 미리 글을 남겨놓은 걸 보면 한 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소리일 수도 있어서-”

 “그 옷 말고 다른 옷들은 어떻게 생겼어요? 전에 얌전한 옷이 그것밖에 없다고 했잖아요.”

 “음, 그게 진짜 괴이한 옷들이 많아서 도대체 전에 뭘 하고 살았는지-”

 “이런 거라도 있나 보죠?”


 한참이나 주머니에서 만지작거린 탓에 축축해진 마스크가 테이블 위로 올라갔고, 마스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던 사내가 처음으로 피터를 향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걸 어떻게, 아니, 내 뒷조사라도 했나요? 설마 내 집에-”

 “그 날 카페에서 날 만나고 뭐했어요? 날 쫓아왔습니까?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요?”

 “그건 내가 할 말 아닌가요? 당신이야말로-”

 “이제 그만, 아가씨들. 웨이드 윌슨씨. 내가 우리 직원과 사적인 만남을 하라고 말한 적이 있나?”

 “토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피터의 어깨를 눌러 그대로 자리에 다시 앉힌 토니가 사내를 일으켜 세웠고, 사내의 발에 채여 쓰러진 우산을 흘깃 쳐다본 뒤 피터를 향해 말했다.


 “피터 파커. 잘 들어. 이건 네 선택이었고, 난 거기에 반대했는데 그걸 밀어붙인 건 너였어. 네가 기억을 하건 못 하건 그건 달라지지 않아. 애초에 그것도 네 선택이었잖아. 네가 까먹은 것 같아서 내가 다시 주지시켜주는데, 이 남자랑 붙어 있어서 하등 좋을 게 없어. 더 이상은 접근하지 말라고. 네가 싼 똥, 지금 내가 치우고 있는 거니까.”


 사납게 피터를 몰아세운 토니는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던 마스크를 집어 피터의 품으로 던진 뒤 사내의 팔을 잡아 밖으로 향했다. 잠깐의 소동사이 쏟아진 커피가 테이블을 타고 흘러 우산까지 닿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피터는 어느새 창밖으로 내리기 시작한 비를 보며 우산을 집어 들었다.



Chapter 4_꿈


 [그래서 넌 그러면 어쩔 건데, 응?]


 기대에 찬 목소리는 흐린 안개 너머에서 들려왔고,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했던 그는, 자신의 시선이 바닥에 박혀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고 이것이 꿈임을 깨달았다.


 [살겠죠.]

 [뭐?]

 [살아야지 어째요? 죽을 순 없잖아요, 그쵸? 그걸 바란 건 아닐 거잖아요.]


 심드렁하게 말을 받은 그는 눈 앞에 쓰레기를 한쪽 구석으로 던지기 시작했고, 둔탁한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와, 진짜 로맨틱하다, 자기. 살겠죠~죽을 순 없잖아요~ 그래! 배신이야, 배신!]

 [$%^!]

 [왜, 스파이더맨!]

 [진짜 이럴 거예요?]

 [진쫘 이뤌 거예요? 뭐~가~?]


 심통이 난 목소리에 한숨을 내쉰 그가 목소리를 향해 발을 내딛었고, 그만큼 짙어진 안개가 그의 앞을 가렸다.


 [방법을 찾을 거예요. 잊지 마세요, 토니 스타크만 천재는 아니거든요.]

 [흠. 흠. 진작 좀 그러지.]

 [그러러면 일단 이 병균 덩어리 소굴에서 당신을 구해야 할 것 같은데, 같이 치우기나 하시죠.]

 [뭐? 긴급사항이라고? 이런! 스파이더맨! 세계가 날 필요로 하다는 군! 난 이만!]


 뻗은 손엔 공허한 안개만 잡혀왔지만 허공으로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만큼 공허하진 않았고, 짙어진 안개 반대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이라고요?]

 [미안.]

 [미안하다는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잖아요! $%^! 이리 와요! @#$ *&!]


 눈앞으로 다가온 검은 형체는 여전히 안개 건너편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고, 손 사이엔 또 다시, 잡을 수 없는 안개만 잡혀올 뿐이었다.


 [당신, 왜 이래요? 이건-]

 [왜, 맨날 못난 얼굴만 보다 이런 얼굴 보니까 갑자기 또 설레고 그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섞여 나온 울음은 이내 통곡으로 변했고, 분노에 찬 자신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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