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oken Crown #07
썰/덷거미덷 2017. 11. 25. 19:26 |Chapter 07_Nightmare
그의 앞엔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이 굳건히 서 있는 채였다.
똑. 똑. 똑.
그리고 그는 수십번을 반복한 짓을 여전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은, 아직도 열리지 않은 채였다.
현관에서 이어진 복도 끝 방의 울음소리는 그의 귀 바로 옆에서 울리고 있었고, 넓게 난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붉었다. 해가 지고 있는 건지 뜨고 있는 건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거였고, 그는 손을 들어 다시 문을 힘차게 두들겼다.
분명, 자신이 내는 소리가 문 건너편에 전달되지 못해서일 터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문이 열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건 한낱 놀이에 불과했지만 동시에 언제고 지켜지던 약속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문은 ‘아직’ 열리지 않은 것뿐이었다.
[병신아, 이제 그만해.]
머릿속에 울린 나지막한 목소리는 동정보단 비난에 가까웠고, 흰 색이었던 문에 난 붉은 자국들은 짙은 색을 내며 나무문을 태우고 있었다.
[니가 그런다고 니 아버지가 돌아올 것 같냐.]
귓가에서 맴돌던 울음소리는 흐느낌으로 변해갔고, 하늘은 여전히 어두워지지도, 밝아지지도 않은 채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쩌면 아직 돌아올 시간이 아닐 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방금 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니 이야기가 아니었어. 다른 세계 사는 다른 놈 이야기였다고. 모든 걸 받아주는 사랑? 그게 가당키나 해?]
낮은 고도 탓에 길어진 그림자가 그의 시야를 가렸고, 타오른 문 밖엔 아무도 없었다. 흐느낌은 멎어있었다. 그림자에 물든 적막이 그 빈 공간을 타고 차오르기 시작했다. 바닥부터 차오른 적막은 금세 그의 가슴께로 차올라 그의 숨통을 조여 왔고, 잠시간의 휴식에 움직임을 멈췄던 폐가 고통에 숨을 토해냈다.
깊게 몰아쉰 숨과 함께 돌아온 시야엔 엉망진창인 욕실 천장이 담겼고, 욕실 타일 벽에 진득하게 눌러 붙은 머리를 천천히 뗀 그는, 현실로 돌아와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3일 예약한 호텔 스위트룸을 이르게 체크 아웃하는 이유를 묻는 직원의 시선은 처음을 제외하곤 그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 소년이 챙겨가지 않은 옷가지들은 그나마 깨끗한 침실 침대 위에 올려진 채였다. 어쩌면, 혹시라도 그 옷을 되찾아가기 위해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딱 봐도 돈 많게 생겼던데 그깟 옷 하나 찾으러 오겠냐.]
일말의 희망조차도 짓밟은 흰 박스가 킬킬거리며 웃었고, 노란 박스는 아까부터 데스를 중얼거리며 이렇게 끝내선 안 된다고 중얼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욕실 바닥에 떨어진 총에는 아직 4발의 총알이 남아있었다. 아직 뻐근한 머리를 짚은 채로 그가 다른 손으로 욕실 바닥의 총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조금 흐릿했던 시야가 완벽하게 돌아왔고, 열어놓았던 욕실 문에 누군가가 있는 것을 눈치 챈 웨이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총을 집어든 뒤 재빨리 문 앞의 누군가에게 총을 겨눴다.
“옷이나 찾으러 왔는데 집 주인한테 말은 하고 가야 할 거 같아서 기다렸더니 돌아오는 게 총알이에요?”
총이 겨눠지거나 말거나 아무렇지 않게 말한 피터가 손에 들린 쇼핑백을 흔들어보였고, 공이를 푼 웨이드가 걸려있던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려다 이미 개판인 수건 상태에 욕을 내뱉자 웃음을 터트렸다.
“준비도 안 하고 다짜고짜 머리를 터트리는 거 하나만큼은 똑같네요. 자요.”
어디서 꺼내온 건지 모를 수건은 깨끗했고 약하게 느껴지는 섬유유연제 냄새에 그가 킁킁거리는 모습을 보고 다시 웃음을 터트린 피터가 문에서 비켜섰다. 엉망인 얼굴을 대충 닦고 나오던 그는 그제야 자신이 빨래할 것이 귀찮아 맨 몸으로 머리를 날렸단 사실을 깨닫곤 황급히 수건을 허리에 둘렀고, 뒤에서 웨이드가 그러거나 말거나 앞서 가던 피터가 그를 식탁으로 불렀다.
집은, 그가 머리를 날리기 전의 모습과 사뭇 달랐고, 깔끔하게 정리된 집의 모습에 웨이드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던 피터가 팬케이크 접시 두 개를 식탁 위로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무기는 무기 거치대에, 빨래는 코인 세탁방에 가서 건조까지 끝내서 정리했고, 바닥 닦는 건 좀 힘들더라고요. 청소 로봇을 쓴지 꽤 됐거든요. 자요. 핫케이크 말고 팬케이크.”
깔끔하게 구워진 팬케이크 위엔 아무것도 토핑 되어 있지 않았고, 이 모든 상황에 할 말을 잃은 웨이드가 멍하니 식탁 옆에 서 있는 사이 부엌에 들어갔다 나온 피터가 생크림, 딸기잼, 메이플 시럽을 식탁 위에 올렸다.
“당신이 뭘 좋아할지 몰라서요. 보통 제 웨이드는 딸기잼을 바르고 메이플 시럽 범벅을 한 다음에 생크림까지 산처럼 쌓아서 먹었거든요.”
부드럽게 웃은 피터는 다른 접시 앞에 앉아 메이플 시럽을 접시에 뿌리다 웨이드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 눈빛에 밀려 웨이드는 얼결에 피터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무심코 딸기잼을 집었다가 피터의 눈치를 보았다.
웨이드가 식탁에 앉을 때 이미 메이플 시럽을 다 뿌린 피터는 첫 번째 팬케이크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고 있었고, 밖은 이미 해가 진 듯 켜진 전등이 식탁 위를 밝히고 있었다.
“집에 가서 벤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웨이드가 있었으면 금방 웃게 해줬을 텐데 난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더라고요. 여기선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학교만 끝나면 토니의 랩에 가서 밤늦게까지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웃기야 웃는데 일기도 더 이상 안 쓰고…….”
말끝을 흐린 피터가 여전히 깔끔한 웨이드의 팬케이크를 보다 비식 웃었고, 딸기잼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괜찮아요. 원래 취향이 그럴 수 있죠. 같은 유전자라는 게 무섭긴 하네요.”
웨이드가 봉해져 있는 딸기잼 뚜껑을 따는 사이 생크림 캔을 집어든 피터가 열심히 캔을 흔든 뒤 팬케이크 위에 생크림을 잔뜩 올렸고, 웨이드의 시선을 느낀 듯 말을 이었다.
“세 개 다 바르면 전 너무 달더라고요.”
“그 쪽 세계 스파이더맨은 우리 스파이더맨과 다른가보지?”
웨이드의 질문에 생크림을 그어 내려가던 포크가 멈췄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마는 듯 피터의 입술이 몇 번이고 벌어졌다 다물어졌지만 웨이드는 아무 말 없이 메이플 시럽을 집어 들었다.
“글쎄요. 이 쪽 스파이더맨으로서 말씀드리자면 다를 건 없죠. 신분 보장에 예민하고, 사건을 보면 앞 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고, 그러다 다치고, 누군가를 다치게 만들고, 누군가가 그래서 또 죽고, 그 쪽 스파이더맨 인생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 인생은 꽤나 기구해서 말이에요.”
담담한 어조로 말한 피터가 자신 쪽에 있던 생크림을 몇 번 흔들어 뜻밖의 말에 멍하니 있는 웨이드의 손에 쥐어주었고, 무심코 위쪽을 눌렀던 웨이드는 식탁 위에 흩뿌려진 생크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신분 보장에 너무 예민해서 벤에게 말을 안 한 건 잘못한 일인 거 같아요. 혹시나 애가 말실수를 해서 위험해질까봐 말을 안 한 건데, 멍청했죠. 이제 와서 네가 그렇게 원망하는 사람이 바로 나야! 할 수도 없고.”
“최소한 자기 아빠가 널 구하다 죽었다는 건 알겠지.”
“그럼 원망하지 않게 될까요?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사건이었을지도 몰라요. 그 자리엔 캡틴도 있었고, 토니도 있었고-”
“내가 아는 스파이더맨이도 그런 건 상관 안하고 뛰어들었을 것 같은데.”
“그쵸. 그리고 내가 아는 웨이드도 자기 몸은 신경 안 쓰고 날 돕겠다고 뛰어들 사람이었고요. 그걸 왜 몰랐을까요.”
씁쓸하게 웃은 피터가 식탁 위에 놓여져 있던 냅킨으로 생크림을 닦아냈지만 흰색의 유분기는 식탁 유리에 눌러 붙은 채 닦이지 않았고 행주를 가지러 일어나는 피터를 웨이드가 붙잡았다.
“애초에 그렇게 깨끗한 식탁도 아니었어. 잘 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깨끗해질 이유가 없지도, 깨끗해질 수 없는 것도 아니죠.”
자리에서 일어난 피터는 부엌에 들어가 집에서 본 적 없던 행주를 가져와 생크림을 닦아냈고, 잠시간 식탁 위에 머물렀던 물방울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 쪽이 스파이더맨이라는 건, 그럼 우리 세계 스파이더맨도-”
“그건 저도 모르죠. 어쨌거나 같은 세계가 아니라 평행 세계니까요.”
웨이드의 말을 빠르게 끊은 피터가 식탁 위에 놓여있던 생크림을 쭉 짜내 웨이드의 팬케이크 위에 올렸고, 콘 아이스크림 모양새로 올려진 생크림을 보던 웨이드가 포크로 생크림만 떠내 입에 넣었다.
“설마 내가 진짜로 옷 가지러 여기 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그럼?”
“우리 세계로 올래요, 웨이드?”
입안의 생크림은 빠르게 녹아 단맛만을 남기고 자취를 감췄고, 할 말을 잃은 채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웨이드를 빤히 쳐다보던 피터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웨이드 대체품으로 쓸 생각은 없어요. 그냥 거래를 하자는 거예요. 난 당신을 통해 데이터를 얻고 당신은 나를 통해 그 암과 힐링 팩터를 컨트롤할 방법을 찾고요. 그게 거의 끝나갈 즘에 웨이드가…….”
“못 살게 되었다고?”
피터가 끝맺지 못한 말을 웨이드가 끝내주었고, 웨이드의 말을 들은 피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피터가 무엇 때문에 웃음을 터트린 건지 알지 못하는 웨이드가 어정쩡한 표정을 짓다가 생크림 째로 팬케이크를 입에 쑤셔 넣었고, 금세 웃음을 멈춘 피터가 웨이드에게 깨끗한 냅킨 하나를 건넸다.
“웨이드도 늘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죽었다라던가 죽인다는 말은 너무 폭력적이라나 뭐라나.”
“데드풀들만의 유행어지. 좀 있으면 모든 작가들이 쓰게 될 걸. 그리고, 네 웨이드 말인데, 만약에 너네가 메인 유니버스면 곧 살아 돌아올 거야. 걔네는 우리가 죽어있는 꼴을 못 보더라고.”
“그도 늘 그렇게 말하곤 했어요. 언제나 돌아올 거라고. 근데 그거 알아요? 그게 벌써 2년째예요. 요만하던 꼬맹이가 이만큼 커서 이 쪽으로 넘어올 텔레포트 벨트를 만들어낼 정도의 기간이요.”
식탁 아래 언저리로 손을 내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웨이드의 곁에서 재잘거리던 소년만큼 손을 올렸던 피터가 정장 재킷 안쪽에서 손목시계를 꺼내 식탁 위로 올려놨고 웨이드의 시선이 시계에 닿는 걸 보고 잠시 기다렸지만 포크를 쥔 웨이드의 손이 시계에 닿는 일은 없었다.
“당신이 결정해요, 웨이드. 아니면 그냥 별 생각 없이 놀러 와도 좋고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벤이 당신을 많이 보고 싶어 하거든요.”
“당신이 말하지 않았나, 헛된 희망을 가지게 하지 말라고?”
“당신이 제 웨이드랑 같은 경험을 했다는 가정 하에 말할게요. 그래서 그 헛된 희망 때문에 당신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나요? 가끔은 가짜 희망이라도 곁에 두는 게 나을 때가 있죠.”
“그럼 나더러 가짜가 되라고-”
“웨이드.”
웨이드의 말을 끊은 피터가 포크를 쥐고 있던 웨이드의 손을 끓어 감쌌고, 침묵 속에서 잡힌 자신의 손을 쳐다보던 웨이드는 고개를 들어 피터와 눈을 맞췄다.
“나나 벤도 당신 입장에선 헛된 희망 아닌가요? 웨이드는 늘 그랬어요. 자기는 운이 너무 좋다고요. 원래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이죠.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누군가의 입장에선 웨이드가 돌아올 거란 내 꿈도 말도 안 되는 허상에 불과할 거고요. 근데 말이죠.”
웨이드의 손을 감싸 쥔 피터의 손가락엔 아마도 그의 취향일 듯한 단순한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반지 중앙엔 푸른 색 보석이 이따금 전등 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난 그 허상이 허상으로 남지 않게 노력할 참이에요. 우리 웨이드가 돌아와서 왜 살려냈냐고 원망을 해도, 혹은 당신을 보고 바람이라도 핀 거냐며 난리를 쳐도 그만 돌아온다면 상관없을 것 같아요. 분명 제가 할 법한 짓은 아니지만 이미 그런 짓을 세자면 밑도 끝도 없어요. 가령, 스파이더맨 노릇을 관둔다거나 하는 거요.”
“내가 아는 스파이더맨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관두겠죠. 하지만 난 당신이 아는 그 스파이더맨과는 달라요. 겪어도 안 될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죠.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세상을 구할 거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고 하지만 그러면 도대체 큰 책임에 따라오는 큰 권리는 어디로 간 거죠? 책임이 있다면 분명 권리도 있을 텐데 난 최소한의 행복할 권리도 잃은 거 같거든요.”
말을 마친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싱크대로 가져갔고, 초록색 빛이 점멸하고 있는 손목시계를 쳐다보던 웨이드는 조심스레 손목시계로 손을 뻗었다.
[안녕하세요, 웨이드 윌슨씨. 전 당신을 안내할 캐런입니다.]
“캐런, 이번엔 일단 나한테 맡겨줘.”
[그러죠, 주인님.]
손목시계 화면에서 솟아올랐던 인영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고, 어느 새 식탁 옆에 서서 주머니에 한 쪽 손을 꽂아 넣은 피터가 나머지 손을 웨이드를 향해 내밀었다.
“나랑 같이 갈래요, 웨이드?”
공교롭게도 내민 손은 반지가 끼워져 있던 왼 손이었고 얇다란 은색 금속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던 웨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시계를 손목에 찬 채로 그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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