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 DN님 썰 보고 쓴 글
썰/덷거미덷 2016. 3. 29. 12:09 |- DN님 썰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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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 들은 노래
별들이 서서히 모습을 감추는 새벽이었다. 피터 벤자민 파커, 그의 하루도 거즌 끝이 나고 있는 참이었다.
피터는 새벽시간대의 카페를 좋아했다. 24시간 카페의 손님 하나 없는 시간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요는 하루 종일 소음에 시달리며 촉을 곤두세우고 있어야만 하는 그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고, 다른 시간대에 비해 적긴 해도 어쨌거나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시급은 물론이고 한 주 동안 밀린 과제를 끝내기에도 적절한 알바자리였다.
어쨌거나 주말에나 가능한 그 알바 시간도 이제 대충 30분을 남겨놓고 있었고, 곰돌이 모양으로 거품을 올린 라떼에 마지막으로 눈코입을 그려 넣은 피터는 시제확인을 하기 위해 계산대 앞에 앉아 세나마나 똑같을 돈을 세기 시작했다.
평소와 달리 가끔씩 10분 정도는 늦어도 그 이상은 늦지 않던 다음 시간대의 알바가 오지 않아 자리를 지키고 있던 피터가 막 자신이 만든 라떼를 다 마셨을 때, 가게의 문에 달린 종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울렸고, 한숨을 내쉰 피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7시 30분. 피터가 검은색 챙의 모자도 모자라 회색 후드티에 검은색 후드집업의 모자까지 눌러쓴 사내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사이 사내는 천천히 주문대 앞으로 걸어왔고, 피터가 혹시나 모를 비상사태에 대비해 몸을 긴장시킨 보람도 없이 무덤덤한 어조로 주문을 했다.
“블랙커피.”
사내의 주문에 잠시 멈칫했던 피터는 이내 자신이 일하고 있는 카페에 그런 메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친절한 미소로 당혹감을 감추며 주문대 테이블에 붙어있는 아메리카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가게엔 블랙커피가 없어서요. 혹시 비슷한 아메리카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내는 소매에 거의 뒤덮이다시피한 손으로 주문대 위에, 정확히는 피터가 가리킨 아메리카노 그림 위에 현금을 올렸고, 눈짓으로 현금 금액을 헤아려본 뒤에야 이 사내가 자신의 다음 타임 근무자가 그토록 말하던 소문의 ‘블랙커피의 사나이’ 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터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금을 주문대에 올려놓은 사내는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일언반구도 없이 그대로 돌아서서 카페 창가 가장 구석진 자리로 가버렸고, 어깨를 으쓱인 피터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은 채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샷을 두 개로 내려 블랙커피와 라떼 한잔을 순식간에 만들어낸 피터는 커피를 가져가라는 소리를 외친 후, 자리에 앉아 있는 내내 창 밖 멀리만 쳐다보는 듯 했던 사내가 느릿한 걸음으로 픽업대로 걸어오는 것을 확인한 뒤, 라떼 위에 거품 올리기에 열중했다.
자신의 커피를 들고 바로 자리에 돌아갈 것 같았던 사내는 머그잔이 올려진 쟁반에 손을 올린 채로 서있었고, 결국 시선을 못 이긴 피터가 귀 한쪽까지 마저 올린 뒤 고개를 들었다.
“뭐 다른 거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
피터의 고개가 올라가자마자 쟁반을 든 사내는 피터의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로 아까보다 빨라진 속도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고, 나머지 귀를 올리고 곰돌이 머리에 이목구비를 그려 넣은 피터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라떼잔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사내를 보며 망설이다 라떼잔을 조심스럽게 쟁반에 올렸다.
“어, 주문하시지 않은 건 아는데, 음, 그냥 서비스라고 생각하세요. 원래 이 시간대 근무하는 친구 이야기 들어보니까 저희 가게에 자주 오시는데 쿠폰도 안 찍으시잖아요? 그게 도장 다섯 개당 라떼 한잔까지 무료인데 여태 한 번도 안 찍으신 거 같기도 하고, 찍었든 안 찍었든 다섯 번 이상은 오신 거니까, 쿠폰 다섯 개짜리 쿠폰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자신이 근처로 오자마자 커피 잔을 향해 고개를 처박을 듯이 내린 사내 탓에 당황한 나머지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은 피터는 괜한 짓을 한 자신을 구박하면서도 거품이 뭉그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라떼잔을 내려놓은 뒤 빠른 속도로 주문대를 향해 걸어갔고, 8시 정각이 되자마자 밀려온 손님들에 정신을 놓은 채로 주문을 받다가 나중에서야 말끔하게 비어있는 머그잔들에 미소 지었다.
그 뒤로도 2시간을 더 근무한 피터는, 다음 근무자가 갑자기 일을 관뒀다며 분기탱천한 사장과 교체하고 나서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블랙커피.”
“넵.”
다음 알바가 구해질 때까지만 사정을 좀 봐달라는 사장의 부탁과 추가로 일하는 시간의 시급을 1.5배 더 쳐주겠다는 제안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피터는 그 다음날 7시 반에도 주문대 앞에 서 있었고, 어김없이 그 시각에 가게에 나타난 사내의 주문에 토를 달지 않은 채로 주문대 위에 올려진 현금을 쓸어 담은 뒤 커피를 내렸다.
모두가 늦잠을 자는 주말 아침 알바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그 탓에 그 다음 주, 그리고 그 그 다음 주 주말에도 주문대 앞에 서 있던 피터는 이내 그가 매일 아침 7시 반이면 가게에 온다는 사실을 깨닫곤, 가게의 단골이자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각에 오는 탓에 이젠 친구처럼 느껴지는 그를 놀래켜 줄 요량으로 7시 반에 맞춰 커피를 내린 뒤 가게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크게 외쳤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블랙커피 한 잔 맞으시죠!”
가게를 찾는 내내 태평하게 가게를 들어오던 사내는 피터가 다짜고짜 외친 소리에 놀란 듯 가게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잠시 망설이다 여느 때와 같은 걸음걸이로 주문대 앞에 섰고, 그런 사내의 반응을 지켜본 피터가 빙글거리며 아메리카노와 토끼 모양으로 거품을 올린 라떼를 그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아메리카노가 아닌 블랙커피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신작, 토순이예요!”
평소라면 진작에 주문대에 돈을 올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 사내는 트레이를 앞에 두고 머뭇거렸고, 아마도 자신이 아무 언질 없이 내민 라떼 때문이라 생각한 피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그게 제가 세보니까 오늘이 다섯 번째 시더라구요. 음, 라떼가 싫으시면-”
피터의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사내가 주머니에 내내 꽂혀있던 손을 빼어 현금을 계산대에 올렸고, 다른 때와 달리 준비 없이 내밀어진 듯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을 본 피터는, 왜 그동안 사내가 손에 직접 돈을 주지 않았는지, 혹은 그 손이 소매 안에 꽁꽁 감춰졌는지를 깨닫곤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기분으로 주문대 위에 올려진 돈을 쓸어담았다.
피터가 돈을 쓸어담는 동안 쟁반을 들고 돌아선 사내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자리에 가더니 주문대에 등을 진 채 잠시 앉아있다 가게 밖으로 나갔고, 평소와 달리 머그잔 반환대를 겸하고 있는 픽업대가 아니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머그잔들을 치우기 위해 그가 앉았던 자리로 간 피터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토끼 모양의 라떼와 블랙커피가 그대로 남아있는 머그잔들을 쟁반 째로 들어올렸다.
그 다음 날에도,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2주간의 추가 근무 동안에도 피터는 7시 반에 맞춰 블랙커피를 내렸지만 사내는 더 이상 카페를 찾지 않았고, 마침내 아침 타임 근무자를 찾아냈다는 사장의 말을 들었을 때, 피터는 새 알바를 구했다는 사장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째선지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시는 카페를 찾지 않을 것 같던 사내는 새 알바가 구해지자마자 카페를 다시 찾기 시작했고, 신이 나서 ‘블랙커피 사나이’에 대해 떠벌리는 샛노란 머리의 알바생을 착잡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피터는 입을 비죽거리다 이내 떠오른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세요!”
“블랙커피.”
“오늘도 쿠폰은 안 찍으세요? 이 쿠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커피 다섯 잔을 마시면 새 커피가 뿅하고 나오는 마법의 종이라고요. 제가 본 건만 해도 다섯 번은 넘은 것 같은데 제가 그것까지 다 합산해서 찍어드릴게요! 보관하기 힘드시면 이름 적어서 저희가 보관도 해드린다니까요? 아, 참 이 손님 답답하시네. 네, 네, 알겠습니다. 블랙커피 한 잔, 차가운 도시 남자 같은 손님과 달리 따스하게 한 잔 내어드립죠. 오늘은 돈 안 받을 거예요! 어쨌거나 손님의 방문은 제 심장에 찍혀있으니까요!”
붙임성이 좋은 신입은 상대가 말이 있건 없건 자기 할 말을 후다닥 늘어놓더니 돈을 사내 쪽으로 밀어버렸고, 잠시 머뭇거리던 사내가 돈을 집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피터는 사내의 등을 쳐다보며 고개를 내젓다 미리 준비해놨던 머그잔 두 개를 챙겨 쟁반에 담아 조심스럽게 내갔다.
“주문하신 블랙커피는 여기 있고요. 그리고 이건 제가 드리는 서비스예요.”
피터가 입을 열자마자 크게 움찔한 사내가 무심코 피터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란 듯 재빨리 테이블 아래로 고개를 내렸고, 그 잠깐 사이에 드러난 얼굴을 본 피터는 또 다시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커피향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달달한 것도 좋아요. 특히 이렇게 날이 좋을 것 같은 아침엔 더 그렇고요. 제가 꽤나 고생해서 만든 피터 파커 특제 곰돌이 라떼니까 꼭 마셔주세요. 지난번 토순이는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아서 곰돌이로 다시 전향했어요.”
또 다시 테이블로 향한 사내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고,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새어나올 것만 같은 한숨을 속으로만 삼킨 피터는 빈 쟁반을 품에 안은 채 자신을 향해 입을 벙긋거리며 오만 방정을 떨고 있는 신입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피터가 주문대에 돌아오고 나서도 한참이나 머그잔들을 바라만 보고 있던 사내가 택한 건 블랙커피가 담긴 왼쪽이었고, 결국 참고만 있던 한숨을 입 밖으로 내쉰 피터는 블랙커피 값을 계산대에 넣은 뒤 자신에게 협조해준 신입에게 고맙단 인사를 남긴 뒤 가게를 떴다.
바로 그 다음 날, 평소와 달리 사내가 1시간이나 일찍 카페를 찾은 건, 유독 바빴던 하루를 보낸 탓에 사내에 대한 것은 모두 잊고 평화로운 새벽 시간을 과제에 모두 쏟아 부은 피터가 조금 이르게 시제 확인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과제를 체크하고 있을 때였다.
“어서 오-”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말을 뱉던 피터는 어느 새 익숙해져버린 검은 후드에 놀라 입을 다물었고, 피터가 그러거나 말거나 느릿한 걸음걸이로 주문대에 걸어온 사내가 주문대 위로 돈을 올리며 말했다.
“블랙커피.”
사내의 이른 방문에 의아해하면서도 무심결에 돈을 주워 담던 피터가 평소보다 많은 지폐수를 헤아려보다 정확히 블랙커피 2잔 값에 해당된다는 걸 깨달았고 물어봤자 사내가 대답할 리가 없기에 아무 말없이 돈을 거슬러 주려고 하자 주문대 위로 손을 올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커피 값을 안 내서. 가난한 알바생 등 처먹는 취미는 없거든.”
말을 마친 사내는 피터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재빨리 등을 돌리더니 평소보다 빨라진 걸음걸이로 카페 구석자리로 향했고, 자리에 앉은 사내의 고개가 주문대로 슬쩍 향했다 재빨리 창밖으로 돌아가는 걸 본 피터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문 채 커피를 내려기 시작했다.
이례적으로 ‘블랙커피’ 외의 다른 말을 하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커피 값 때문일 거라는 피터의 예상과 달리 그 다음 날에도 사내는 같은 시간에 카페를 방문했고, 더 이상 소매로 손을 가리지 않고 돈을 내민 뒤 재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핏, 힘차고 강한 아침!”
“그래, 그래, 힘차고 강한 아침이다, 아주. 루시안, 내가 30분 전에는 오랬지? 너 자꾸 이러면 내가 사장님한테-”
“허얼?”
늘 그렇듯 두 손을 흔들며 카페에 들어오던 신입은 주문대 안쪽으로 들어오다 카페 구석 자리에 앉은 사내를 발견하곤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소리를 쳤고, 자신의 단골을 빼앗겼다며 징징거리는 그를 탈의실로 밀어 넣은 피터는 피식 웃으며 최근 다시 만들기 시작한 토끼 모양의 라떼에 집중했다.
“…….”
그러니까 집중하려고 했다. 평소와 달리 20분 넘게 가게에 있던 사내가 픽업대에 머그잔을 반납하러 왔다가 토끼 귀를 막 올린 피터를 빤히 쳐다보고 서 있지만 않았더라면 토끼 귀가 반 토막이 날 리도 없었을 테고, 아마도 피터는 마지막으로 만든 라떼를 마시며 근무를 상쾌하게 마칠 수도 있었을 터였다. 시선을 느낀 피터가 당황한 나머지 토끼 귀를 반 토막 낼 때까지 서 있던 사내는, 토끼 귀를 망친 피터가 분노에 차 고개를 들자마자 재빨리 쟁반에서 손을 떼더니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고, 7시가 되어서야 탈의실에서 나온 라떼를 신입에게 떠넘긴 피터도 한숨을 내쉬며 탈의실로 향했다.
* * *
웨이드는 이른 아침 시간대의 그 카페를 사랑했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그 카페라기보단 유독 손님에게 관심이 없던 그 카페의 알바생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맞겠지만. 어쨌거나 평소와 같은 시간대에 집에서 출발해 느긋하게 가게에 들어섰던 그는,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알바생의 목소리에 처음엔 긴장했다가 이내 그 전 알바생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알바생에 안심한 채로 자리로 돌아갔고, 커피를 찾아가라는 외침에 자신의 머그잔을 가지러 픽업대에 향했던 그가 멈춰 섰던 건 순전히 호기심과 카페의 주광빛 조명 아래에서도 선명한 브루넷 빛깔로 빛나는 머리칼 때문이었다.
자신을 불러놓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알바생을 넋 놓고 쳐다보던 그는, 알바생의 고개가 올라가려는 움직임을 보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숙인 채 쟁반을 들고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그 카페 구석자리에서만 보이는 마천루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그걸로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을 거란 그의 생각은 내내 주문대 앞을 지키고 있던 알바생이 테이블 곁으로 다가왔을 때 산산이 깨어졌다.
“어, 주문하시지 않은 건 아는데, 음, 그냥 서비스라고 생각하세요. 원래 이 시간대 근무하는 친구 이야기 들어보니까 저희 가게에 자주 오시는데 쿠폰도 안 찍으시잖아요? 그게 도장 다섯 개당 라떼 한잔까지 무료인데 여태 한 번도 안 찍으신 거 같기도 하고, 찍었든 안 찍었든 다섯 번 이상은 오신 거니까, 쿠폰 다섯 개짜리 쿠폰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혹여나 자신의 얼굴을 볼까 두려워 고개를 숙인 그의 시야엔 몽글거리는 곰돌이 모양의 거품이 얹어진 라떼가 놓여 졌고, 당황한 어조로 빠르게 말을 쏟은 알바생은 빨랐던 말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테이블에서 멀어져갔다. 조금은 씁쓸한 아메리카노와 달리 라떼는 달았고, 그 위에 시나몬 가루 범벅이 된 거품은 미치도록 달았으며 빈말로도 좋은 레시피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당히 따스했다. 순식간에 뭉그러져버린 곰돌이 모양이었던 거품을 보며 자조적으로 웃은 그는, 순식간에 잔을 비운 뒤 바빠 보이는 알바생을 흘깃 쳐다보곤 픽업대에 쟁반을 올려놓은 뒤 카페를 떴다.
평소보다 늦게 카페를 나온 탓에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이제는 어디에 잡초가 나있는지조차 외운 보도블록을 보며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다른 때보다 가벼웠고, 들뜬 노란 박스가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지만 노란 박스의 설레발에 침묵으로 일관한 그는 심장을 갉아먹기 시작한 설렘을 죽이기 위해 검붉은 자국으로 더러운 욕조에 누워 방아쇠를 당겼다.
다른 때보다 길었던 침묵을 깨고 몸을 일으킨 그는, 욕실 벽과 욕조를 더럽힌 핏자국을 보곤 어깨를 으쓱인 뒤 대충 샤워기로 씻어 내리곤 늘 그렇듯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이루어진 수트를 챙겨 입은 뒤 밖으로 향했다.
“우리 자기 이겨라! 뉴욕의 영웅, 스파이디 나가신다!”
“데드풀, 제발, 그 정신-사나운, 소리 좀! 그만- 할, 수! 없! 어요?”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수트를 입은 청년은 그의 외침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소리를 지르면서도 이어지는 빌런의 공격을 유연하게 피해 반격했고, 영혼 없는 응원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를 향해 흰 박스가 중얼거렸다.
[우릴 좋아할 턱이 없지.]
(왜, 그 알바생 있잖아! 우리한테 곰돌이 모양 라떼 준!)
[서비스라고, 병신아. 충성고객 유치를 위한 서비스.]
(오, 네가 모르나본데 자고로 곰은 아시아 어느 나라에선 정력을 주는 토템으로 유명하다고! 그러니까 그 귀염둥이는 우리한테 정력을 보충시키라고 암시를 준 셈이지.)
[니 눈엔 걔가 아시안으로 보이든?]
(브루넷, 체크. 서양인보다 짙은 멜라닌 색소! 그거 말고 다른 조건이 필요해?)
“우리 얼굴을 못 봐서 그런 거겠지. 걔가 아는 정보라곤 우리 목소리랑 신체 사이즈뿐이라고.”
(목소리랑 신체 사이즈에 반했다는 거야, 그럼? 시작부터가 후끈후끈한데!)
“시작은 무슨.”
“시작이요? 이제 끝난 참인데?”
어느 새 빌런들을 모조리 정리하고 경찰까지 부른 뒤 데드풀에게 다가온 청년이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듯 물었고, 구기고 있던 미간을 핀 그는 한껏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의 사랑의 시작 말이야, 스파이디! 사랑하기 좋은 밤이지 않아? 보름달도 우릴 축복하고 있다고!”
“데드풀. 오늘 뜬 달은 그믐달이거든요. 하늘이나 보고 말씀하시죠. 구름도 잔뜩 낀 게 사겼던 연인들도 헤어지기 딱 좋은 밤이네요.”
“그럼 그냥 하나 만들지 뭐. 서치라이트 보름달, 어때?”
두 팔을 벌리고 달려드는 그를 밀어낸 청년은 고개를 내저으며 사고나 치지 말란 말을 남긴 뒤 또 다시 사이렌이 울리고 있는 거리 쪽을 향해 뛰어갔고, 허전한 두 팔을 괜히 한 번 흔들어 본 웨이드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블랙커피.”
“넵.”
어김없이 다음날에도 7시 반에 맞춰 카페에 도착한 그를 맞은 건 어제의 알바생이었고, 곁눈질로 가슴 쪽에 있는 명패의 이름을 확인한 그는 자신의 커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뒤 주문대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알바생을 틈틈이 흘깃대며 혹시나 어제와 같은 친절이 베풀어질까 기대했지만, 알바생은 그의 잔이 모조리 비워질 때까지 주문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작은 기대가 어그러지자 씁쓸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빈 잔을 픽업대에 둔 뒤 카페를 떴고, 그 다음주, 그리고 그 그 다음 주 주말에도 그와 알바생, 피터 파커 사이에 오간 대화들은 늘 같았다. 어서 오세요, 블랙커피. 딱 그 두 마디의 말 외에 그들 사이를 오간 대화는 없었고, 그 날의 친절을 어디까지나 알바생의 변덕으로 치부한 데드풀은 투덜거리는 노란 박스를 구겨 쓰레기통에 넣는 시늉을 한 뒤 다시 다가온 주말 아침에 진절머리를 치며 집 밖으로 나섰다.
“어서 오세요! 오늘도 블랙커피 한 잔 맞으시죠!”
평소와 달리 가게 문을 열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멈칫했던 웨이드는, 또 다시 날뛰기 시작한 노란 박스는 무시한 채로 계산대 앞에 섰고, 알바생이 주문대 위로 아메리카노와 귀여운 토끼 모양의 거품이 올려진 라떼가 담긴 쟁반을 올리자 마른 침을 삼켰다.
“아메리카노가 아닌 블랙커피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신작, 토순이예요!”
늘 알바생이 포스기에 주문 사항을 입력할 때 시선이 잠시 떨어지는 틈을 타 소매로 손을 가리던 그였지만,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알바생의 시선은 그에게 찰싹 붙은 채로 떨어질 줄 몰랐고,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제 나름대로 그가 돈을 주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낸 듯, 알바생이 변명조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 그게 제가 세보니까 오늘이 다섯 번째 시더라구요. 음, 라떼가 싫으시면-”
[거봐, 그냥 고객 유치용 서비스였다니까.]
흰 박스의 투덜거림을 들은 웨이드는 내내 주머니에서 돈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을 꺼내 얼른 주문대 위에 현금을 올렸고, 돈을 받기 위해 내밀어져 있던 알바생의 손이 움찔하는 모양새를 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저 놈도 다른 놈들이랑 똑같아!)
[어이구, 저 알바놈이 다른 놈들이랑 언제는 다르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했지, 쟤가 우리 얼굴을 안 봐서 그랬던 거라고.]
“……그건, 내 대사였어.”
[어쨌거나. 뒤를 돌아보는 우나 저지르지 말자고. 늘상 받는 시선이긴 해도 굳이 다시 확인해서 자학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겠어?]
시니컬하게 말한 흰 박스의 말에 노란 박스가 고함을 치기 시작하는 걸 듣던 웨이드는, 쟁반 위에 올려진 채 반동에 흔들거리고 있는 라떼 거품을 보며 평소와 달리 주문대에 등진 채로 앉아야 하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고, 졸지에 스파이더맨이 휴식하곤 하는 마천루를 보지 못해 골이 난 노란 박스가 웨이드를 향해 징징거리는 것을 잠시 듣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은 물론, 그 다음 주에도, 그 그 다음 주에도 웨이드는 카페 문 앞까지 왔다가 처음 마주했었을 때와 달리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주문대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알바생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 2주간의 시간이 흐른 뒤 카페를 다시 찾은 웨이드는, 브루넷의 머리 대신 노란 머리의 알바생이 중년 사내에게 신나게 떠들고 있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더 이상 그 브루넷을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조 없는 노란 박스는 쾌활한 이 알바생이 꽤나 마음에 든 듯, 끊임없이 알바생에게 추근거려 보자고 그를 닦달했지만, 늘 그렇듯 침묵으로 일관한 웨이드는 카페 구석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채 언제나 그 시간대면 비어있는 마천루를 멍하니 응시하며 커피 한잔을 다 마신 후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기 전에 카페를 떴다.
그 뒤로도 브루넷 머리칼의 청년이 주문대 앞에 서있는 날은 없었고, 그 전의 2주와 달리 홀로 계산대 앞에 서 있는 금발 머리를 잠시 응시하다 유리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블랙커피.”
“오늘도 쿠폰은 안 찍으세요? 이 쿠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커피 다섯 잔을 마시면 새 커피가 뿅하고 나오는 마법의 종이라고요. 제가 본 건만 해도 다섯 번은 넘은 것 같은데 제가 그것까지 다 합산해서 찍어드릴게요! 보관하기 힘드시면 이름 적어서 저희가 보관도 해드린다니까요? 아, 참 이 손님 답답하시네. 네, 네, 알겠습니다. 블랙커피 한 잔, 차가운 도시 남자 같은 손님과 달리 따스하게 한 잔 내어드립죠. 오늘은 돈 안 받을 거예요! 어쨌거나 손님의 방문은 제 심장에 찍혀있으니까요!”
빠르게 말을 쏟아놓은 알바생은 대뜸 그가 올려놨던 돈을 그의 앞으로 밀어버렸고, 그 기세에 눌려 잠시 머뭇거리다 돈을 주워섬긴 그는 무어라 외치고 있는 노란 박스와, 그 말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흰 박스에 의아해하면서도 별 다른 반응을 할 의지 없이 늘 앉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멀리 보이는 마천루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주문하신 블랙커피는 여기 있고요. 그리고 이건 제가 드리는 서비스예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목소리에 놀란 그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고, 익숙한 브루넷 머리 아래에 있는 얼굴에 그만큼이나 놀란 듯한 표정이 떠오른 것을 보곤 재빨리 고개를 내렸고, 멍청한 짓을 한 자신을 타박하며 자신의 앞으로 놓여지는 두 잔의 커피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커피향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달달한 것도 좋아요. 특히 이렇게 날이 좋을 것 같은 아침엔 더 그렇고요. 제가 꽤나 고생해서 만든 피터 파커 특제 곰돌이 라떼니까 꼭 마셔주세요. 지난번 토순이는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아서 곰돌이로 다시 전향했어요.”
(Kiss me, darling, kiss me, kiss me, tonight-)
[닥쳐.]
(Kiss me, darling, kiss an' you'll be alright-)
[어디서 또 설레발 짓이야!]
그가 노란 박스의 노래에 집중하는 사이 잠시 옆에 서 있던 알바생은 자리를 떴고, 여전히 몽글거리며 귀여운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곰돌이를 차마 헤쳐 놓을 수 없었던 그는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결국 곰돌이 모양의 거품이 열기에 뭉그러질 때까지 라떼를 마시지 못했던 그가 머그잔을 픽업대에 올리고 카페에서 나가려고 할 때, 주문대에 늘어선 긴 줄까지 내버려두고 주문대 밖으로 나온 노란 머리의 알바생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원래 오지랖이 좀 넓어서요. 무슨 일인지도 잘 모르겠고, 아마 그 얼굴 때문에 자격지심이라도 있으신가 본데, 제가 그 형을 얼마 보지는 않았어도 그런 것 때문에 당신을 마음대로 평가할 그런 사람 같지는 않거든요. 적당히 하세요. 가난한 알바생이 사비까지 털어가며 커피를 쏜 건데 남기는 건 진짜 너무하잖아요.”
불만어린 어조로 투덜거리며 머그잔을 그의 손에 직접 쥐어준 알바생은 머그잔은 다음에 와서 반납하라고 속삭인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성난 손님들을 상대하기 시작했고 웨이드는 차갑게 식은 라떼 위에 내려앉은 거품더미를 응시하다 휘핑크림까지 녹아들어 미치도록 달달한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켠 뒤 사람들이 밀려들어오고 있는 카페를 떠났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수트를 챙겨 입고 나온 웨이드는 집에서 나올 때 봤던 뉴스를 따라 은행 강도들이 있는 은행으로 향했고, 그가 도착했을 때 막 마지막 빌런에 거미줄을 쏘고 있는 스파이더맨 곁으로 다가섰다.
“아오, 깜짝이야. 웨이드! 그렇게 소리 없이 오지 좀 마요. 하마터면 당신도 저 꼴 날 뻔했다고요.”
빌런을 가로등 아래에 고정시켜놓고 돌아서다 침묵을 지키고 서 있던 웨이드를 발견한 스파이더맨이 그답지 않게 놀란 듯 뒤로 점프까지 하며 구박을 늘어놓았지만, 막상 현장에 와서도 생각에 잠겨있던 웨이드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평소라면 열댓번도 넘게 자신을 껴안으려 했을 웨이드의 침묵에 의아해진 스파이더맨이 그의 얼굴 앞에 손을 흔들려는 찰나, 숙여졌던 그의 고개가 번뜩 들렸고,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렸다.
“거미야.”
“네.”
“아니야.”
“…….”
“스파이디.”
“네?”
“아, 아니야.”
평소와 다른 웨이드의 행태에 눈을 가늘게 떴던 스파이더맨은 자신이 그의 신고를 받고 온 경찰들과 하이파이브까지 마친 후에도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는 웨이드를 보고 팔짱을 낀 채 다가섰고, 한참동안 말을 아끼던 웨이드가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주 가는 가게가 있는데.”
“네, 네.”
“거기 알바생이 서비스를 두 번이나 주고 내가 안 가니까 나랑 시간대까지 맞춰가면서 남아서 서비스를 또 줬거든? 그것도 특제 서비스로?”
“네, 네, 그러셨구나아.”
“걔가 날 좋아하는 걸까?”
“네?”
웨이드의 마지막 질문에 걷던 발걸음까지 멈춘 채 돌아선 스파이더맨은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도 여전히 시무룩한 웨이드를 빤히 쳐다보며 어쩌면 자신의 말 한마디로 신세를 망치게 될 지도 모르는 알바생과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새 정이 든 듯, 애처로워 보이는 웨이드에 대한 동정심 사이에서 갈등했고, 한참을 망설이다 그에게 말했다.
“어, 글쎄요. 당신도 알다시피 제가 연애에 그렇게 해박한 편은 아니라서요. 그래도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챙길 정도면 호감 정도는 있는 거겠죠?”
“그런가……?”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되묻는 웨이드의 모습에 피터는 벌써부터 드는 제 갈 길이나 갈 걸 그랬다는 생각을 억누른 채 웨이드에게 다가섰고, 말하는 내내 바닥에 처박혀 있던 웨이드의 얼굴이 들릴 때까지 기다린 뒤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섹스 하자고 하면서 달려들지 말고 일단 친구부터 시작해 봐요.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더라구요.”
“시작하면 하는 거지 한다더라구요, 는 뭐야.”
“다들 그런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일례로 토니가 있죠.”
고개까지 주억거려 가며 자신의 말에 스스로 수긍한 스파이더맨은 축 처진 웨이드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뒤 할 일이 있다는 말을 핑계 삼아 재빨리 자리를 떴고, 스파이더맨이 자리를 뜬 뒤에도 잠시 자리를 지키고 섰던 웨이드는 알바생이 근무하고 있는 카페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시간은 더디게 갔고, 카페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 옥상에 앉아있던 웨이드는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막다른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피터 파커가 카페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며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박동에 숨을 들이켠 뒤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의 계산이 맞다면, 이 자살로 지루한 기다림이 조금은 줄어들 터였다.
더러워진 수트 대신 도시 곳곳에 숨겨둔 자신의 일상복을 꺼내 입은 웨이드는 심호흡을 한 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고, 주문대 아래로 내려가 있던 브루넷이 위로 솟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서 오-”
자신을 알아본 듯 경쾌하게 이어지던 인사는 도중에 끝이 나버렸고,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며 최대한 태평한 어조로 말을 하기 위해 애를 쓰며 더 이상 감추지 않은 손을 주머니에서 빼내 주문대 위로 돈을 올렸다.
“블랙커피.”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돈을 담는 듯 했던 피터 파커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계산대 안에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잠시 망설이던 그는 주문대 위로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커피 값을 안 내서. 가난한 알바생 등 처먹는 취미는 없거든.”
혹시나 거절의 말 혹은 단순한 친절이었다는 말이 나올까 두려웠던 그는, 피터 파커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얼른 등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향했고, 주문대 위로 비죽 솟아있을 브루넷이나 볼 요량으로 주문대를 흘깃 쳐다보았다가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피터 파커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터 파커는 그가 자신의 커피를 찾아갈 때도 그리고 잔을 반납할 때도 아무런 말이 없었고, 조금은 실망한 채로 카페를 나선 그의 머릿속에선 잔뜩 들뜬 노란 박스가 흥얼거리는 Blink의 kiss me가 내내 울리고 있었다.
그 다음날에도 카페를 방문한 그는, 조금은 놀란 듯한 피터 파커의 얼굴을 아주 잠깐 쳐다봤다가 이내 시선을 내렸고,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과 함께 쟁반 위에 놓인 도장이 두 개가 찍힌 쿠폰에 적힌 ‘블랙커피의 사나이’란 글씨를 보곤 미소 지었다.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그 동안 마신 라떼의 달콤함을 떠올리던 그는 어느 새 비어버린 잔을 괜히 한 번 손에 쥐어보았다가 점차 사람이 늘고 있는 거리에 한숨을 내쉬며 잔을 반납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관적으로 픽업대에 잔을 올려놓고 돌아서려던 그는, 피터 파커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춘 채 주문대 안쪽으로 고개까지 넣어가며 그가 무얼 하고 있는지 쳐다봤고 그의 시선을 느낀 듯 마지막 귀를 올리고 있던 피터 파커의 손이 삑사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 건네려다 고개가 들리려는 기색에 재빨리 돌아서서 카페를 빠져나갔다.
어느 새 일출이 빨라진 태양이 지평선 위로 고개를 들이민 듯 밝아진 하늘은 옅은 하늘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조금씩 짙어져가는 건물 그림자들을 밟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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