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여전히 답을 알지 못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혹은
그것조차 상관없는 일인지.
그래서 그는 결정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기로.
피터 벤자민 파커, 그에겐 ‘그럭저럭’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비록 빌런들이 매일 출현하긴 했지만, 그가 감당할 만큼의 빌런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빌런들 때문에 그의 일상이 일그러지는 일은 없었다. 똑같은 일상과 똑같은 전투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에 만족감을 느낄 때 즈음 등장한 저 남자가 그냥 평화로울 뻔한 날들을 ‘그럭저럭’ 이란 수식어가 붙게 만들었지만.
“가라, 스파이디! 다 부셔버려! 이겨라, 이겨라! 이기는 편 우리 편! 난 자기 편 하고 싶으니까, 이겨야 돼, 자기!”
“그러니까-난, 당신이랑! 사귄다고, 한! 적이, 없다구요!”
“우리 같이 살잖아!”
“그거야 당신이 당신 집을 날려서-”
“조심해야지, 스파이디. 난 내 물건에 흠집 나는 걸 엄청 싫어하거든.”
웨이드와의 대화 때문에 정신이 흐트러진 스파이더맨을 노리고 날아온 맨홀을 카타나로 친 웨이드는 이내 날이 나간 카타나를 보고 분노해 날뛰기 시작했고, 이젠 누가 빌런인지 구분이 안 가는 광경에 기가 질린 피터는 빌런이고 웨이드고 간에 구분하지 않고 거미줄을 쏴 포박했다.
“오늘은 구속 플레이야?”
“닥쳐요, 좀.”
“그럼 이것 좀 풀어줘. 내 카타나가 거미줄이 붙어서 울고 있다고…….”
“벌로 2시간동안 그러고 있어요.”
‘벌’이란 말에 꽂혀 또 다시 말을 쏟아내는 웨이드를 무시한 채로 경찰에게 경례한 스파이더맨은 빌런이 있는 곳을 가리킨 뒤 자리를 떴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본명 웨이드 윌슨, 코드네임 데드풀.
불빛 하나 없는 골목에서 발견되었던 그는 발견당시엔 이미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체 징후가 하나같이 미약했지만 피터가 상태를 파악하는 사이에 회복해 난리법석을 떨기 시작했고, 그의 능력이 불사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 건 여러 번의 사건을 통해서였다.
온 몸에 달고 다니는 살벌한 무기가 무색하게 그는 여간해선 무기를 뽑지 않았고, 꺼낸다 하더라도 전투보단 장난에 가깝게 휘두르는 일이 잦았던 터라 피터는 그냥 그가 별난 능력을 갖고 있는 일반인으로 생각하기로 결정한지 오래였다.
정신 나간 말 속도와 비슷한 정신 상태인지 종종 정신 나간 짓을 일삼더니 몇 달 전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자기 집이 날아갔다며 가방 하나만 달랑 든 채로 갑자기 피터의 집으로 찾아왔고, 얼결에 그와 살게 된 지 반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미스테리한 등장과 달리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소파에서 시시껄렁한 티비쇼와 드라마를 보는 데에 쏟았고, 불쑥 사라졌다가 돌아올 때면 희미한 피 냄새가 났지만 같이 살면서 그가 심한 암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 피터는 자세한 사항은 묻지 않았다.
비록 처음부터 낡았던 소파가 웨이드가 누워있는 모양대로 더 내려앉았고, 종종 미친 듯이 구워대는 팬케이크에 바꾼 후라이팬이 수십개가 넘었으며 저녁에 돌아오면 벽에 알 수 없는 구멍이 뚫려 있곤 했지만, 그런 점만 빼면 웨이드는 썩 괜찮은 룸메이트였다.
물론, 반으로 줄어든 월세 부담도 한몫했지만.
그리고 집에 돌아갔을 때 불 꺼진 방이 아니라 맞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 피터는 어느 순간부터 웨이드에게 언제 나갈 거냐고 묻지 않았고, 웨이드 또한 그다지 나갈 생각이 없는 듯 어느 새 창고로 쓰던 방을 정리에 제 살림살이를 하나 둘씩 늘리고 있는 중이었다.
때때로 웨이드가 종종 피터의 관심을 갈구하며 날뛰는 날도 있었고, 어쩌다 피터가 오늘처럼 그를 방치하는 일도 있었지만, 모든 불만사항은 타코 하나로 충분히 해결되곤 했다.
“웨이드 윌슨씨, 타코 배달 왔습니다.”
“물론 세트 이야기 하는 거겠죠?”
“스페셜 세트니까 문 열어요. 손 없단 말이에요.”
“잠깐만.”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으론 팬티 바람의 웨이드가 환하게 웃고 있었고, 그의 손에 타코를 맡긴 채 욕실로 간 피터는 물에 젖은 채 진동하며 빛을 깜빡이고 있는 웨이드의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웨이드, 전화 온 것 같-”
“쓸모없는 전화야. 망할 텔레마케터 같으니라고.”
진동소리를 들은 듯 황급히 욕실 쪽을 향해 걸어온 웨이드는 화면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로 통화 거절을 누르더니 어깨를 으쓱인 뒤 종이 백에서 음식들을 꺼내 커피테이블에 차리기 시작했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잠시 쳐다보던 피터는 다시 욕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거의 대부분의 질문에 답하고 하다못해 자기 무기 이름까지 떠벌리는 웨이드였지만, 단 하나 자신의 핸드폰에만큼은 피터의 접근을 기겁하며 막았고, 매번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으면서도 휴대폰을 늘 충전해 놓고 끄지 않는 모습에 매번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참느라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때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웨이드-”
“또 광고네!”
“당신 뭐 범죄 저지르고 쫓기고 있는 건 아니죠?”
“내가? 범죄는 저질렀을 수 있는데 여기선 아직 저지른 게 없는데?”
“네?”
“내가 범죄자 상이야, 피터?”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됐네. 밥 먹자! 우리 타코 치즈가 차갑게 죽어가고 있다고, 허니.”
대놓고 얼버무리는 모습에 한숨을 내쉰 피터가 포기하고 자리에 앉는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재빨리 웨이드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은 피터가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웨이드?”
“다음엔 머릴 쏠 거야. 너한테 피해 끼치지 않을게. 다른 뉴욕 시민한테도. 그냥 모르는 척 해.”
웨이드의 배를 관통하고 나간 총알은 벽에 박혔고, 온 사방에 피가 튄 탓에 엉망이 된 거실 바닥으로 웨이드가 쓰러졌다.
* * *
구급차를 부르려는 피터를 말린 웨이드는 상처가 아물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익숙한 듯 거실 정리를 재빠르게 끝마쳤고, 너무나도 익숙한 듯 행동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피터는 방금 전 총질로 난 구멍과 웨이드가 들어온 이후로 하나 둘씩 늘어가던 벽의 구멍을 번갈아 보다 인상을 구긴 채로 타코를 먹고 있는 웨이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타코 치즈가 죽었어……, 피터……. 이건 모두 네 잘못이야…….”
피터가 그러거나 말거나 타코를 베어 문 웨이드가 우물거리며 우는 소리를 한 뒤 피터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피터는 여전히 미간을 구긴 채 그를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앞으론 집에서도 옷을 입고 있는 게 어때요?”
갑작스런 요구에 당황한 웨이드가 입에서 씹고 있던 타코를 뿜었지만, 피터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로 웨이드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몇 번 콜록인 웨이드가 타코를 내려놓고 반문했다.
“반나체라 거슬려?”
“아뇨. 근데 저 구멍은 좀 거슬리네요.”
시선은 웨이드에게 고정한 채로 피터가 정확히 소파 뒷벽 위쪽에 뚫린 구멍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고, 웨이드 또한 피터가 뭘 가리키고 있는지 눈치를 채고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벗었다 입으면 되지.”
“그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뭐, 감시카메라라도 달게? 천하의 스파이더맨이 관음증-”
농담을 늘어놓으려던 웨이드의 입에 거미줄이 쏘아졌고,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인 피터가 비죽 웃으며 말했다.
“제가 집에 없는 시간만큼 붙어있을 접착제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그거 만드는 시간은 거미줄 녹을 시간이면 충분할 거 같고요. 어때요, 내기할래요? 아, 말을 못하는 구나. 그럼 티비나 보고 기다리세요. 아깝네. 돈 좀 뜯어낼 수 있었는데.”
싸늘하게 웃은 피터가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굴리고 있는 웨이드를 뒤로 한 채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다가 돌아서서 다시 웨이드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와 먹다 만 타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뭐? 거실이 엉망이 돼서 미안하다고요? 빨리 청소할 수 있다고요? 죽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친구가 배에 총 맞은 걸 보는 사람 심정을 당신이 알아요? 나 참. 제가 총 맞았다고 생각해보세요. 죽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아요? 아니잖아요. 앞으론 당신 핸드폰 안 건드릴게요! 제가 당신이 숨겨둔 부인한테 머리채 잡히는 일만 없게 해줘요, 알겠어요?”
피터의 고함에 웨이드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고, 피터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비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간 타코는 금지예요. 저런 일이 또 한 번 발견되면 영원히 금지할 거예요. 여어어어어엉원히.”
마지막 음절과 함께 먹다 남은 타코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레기통으로 추락했고, 절망한 웨이드의 몸이 소파 위로 쓰러졌다.
* * *
일주일이 지난 후로 웨이드가 타코를 금지당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웨이드의 핸드폰은 이전보다 더 자주 울리기 시작했고, 종내엔 계속해서 오는 전화로 인해 핸드폰 진동이 끊이질 않게 될 지경이 되었지만 웨이드는 여전히 핸드폰을 끌 생각은 없는 듯 알림 설정을 무음으로 바꾼 뒤 충전기에 하루 종일 꽂아둘 뿐이었다.
번호는 늘 바뀌었고, 핸드폰의 LED등 불빛도 각양각색이었지만, 피터가 알아낼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그라고 화면에 뜬 번호로 전화할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피터가 전화 받는 것을 꺼리고 웨이드 본인도 그 전화를 피하면서도 어째서 연락처를 대놓고 보이게 두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피터는 대여섯 개의 번호를 시도해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번호들은 하나같이 없는 번호라는 무미건조한 음성과 함께 끊어졌고, 최근 피터의 가설은 그가 사채를 쓰고 도망친 한량이란 거였다. 아니면 유령에게 쫓기거나.
어쨌거나 늘 느긋해 보이는 웨이드임에도 불구하고 휴대폰으로 시선이 닿을 때면 그의 눈동자는 늘 불안으로 가득 찼고, 그럼에도 그 핸드폰을 버리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피터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최근 늘어난 밤 외출 또한 그의 의심을 증폭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피터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인 건지, 아니면 몰래 나가기 위해선건지 모를 숨죽인 발자국 소리가 조용히 닫히는 현관문 소리와 함께 사라진 뒤 침실에서 나가면 늘상 충전기에 꽂혀있던 휴대폰도 사라진 채였고, 몇 번이고 웨이드의 뒤를 쫓으려고 해봤지만 빌런을 쫓는 데면 늘 도움을 주던 스파이더 센스마저도 작동하길 거부하는 마당에 신출귀몰한 웨이드를 쫓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추적기였고, 핸드폰에 붙은 추적기를 따라 이동하던 그는 어느 골목에서 쏟아진 푸른 불빛에 드러난 웨이드의 모습을 보곤 몸을 숨긴 채 빛이 쏟아진 골목을 끼고 있는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해봤자 2층 높이인 건물 옥상에 오르는 건 식은 죽 먹이였고, 이내 옥상 난간 뒤에 숨어 고개를 내민 그는 아까보다 어두워진 푸른 불빛 아래 드러난 모습에 숨을 삼켰다.
거기엔 자신의 것과 거의 비슷해보이지만 등에 거미가 새겨진 검은 색과 붉은 빛의 수트를 입은 사내가 피터를 등지고 푸른빛이 새어나오는 손목을 향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안녕, 가짜 스파이더맨.”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골목으로 막 들어선 데드풀이 총을 꺼내 든 채 건들거리며 사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고개를 살짝 돌려 데드풀을 흘깃 쳐다본 사내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가짜? 더 나은, 스파이더맨이겠지.”
손목에서 나오던 푸른 불빛이 크게 흔들렸고 사내가 불빛이 나오고 있는 손목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넌 눈치 챘나 보군. 네가 존경하는 그 스파이더맨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던데. 그것만 봐도 내가 더 나은 스파이더맨이란 걸 모르겠나?”
“그 쪽은 네 말대로 덜 떨어졌다 하더라도 스파이더맨이고, 넌 애초에 스파이더맨이라고 볼 수가 없지. 네 정의감엔 스파이더맨 캐치프레이즈가 없잖아. 여러분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같은 거 말야. 뭣보다 진정성이나 절박함도 없고.”
웨이드가 뭐라 하건 말건 다시 손목에서 나오는 불빛에 집중하기 시작한 사내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열중했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듯 했던 웨이드가 신랄한 어조로 공격했다.
“아, 그래. 적어도 절박함은 있더라. 끝에 다다라서는 말이야. 적어도 난 그렇게 봤어. 놀랍지 않아? 내가 니 코믹스 라인을 다 봤다는 게?”
희미했던 푸른 불빛은 조금 더 밝아지는 대신 점멸하기 시작했고 신경질 적으로 한숨을 내쉰 사내가 빛을 뿜고 있는 팔을 내린 채 웨이드를 향해 돌아섰다. 그 덕에 사내의 손목에서 나오는 불빛의 정체를 보게 된 피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빛을 뿜고 있는 건, 희안하게 생긴 손목장치였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헛소리만 지껄이는 군! 정의감, 그래! 정의감! 그래서 이렇게 팔자 좋은 곳에 눌러앉았나, 웨이드 윌슨? 늘상 스파이더맨이 없으면 죽고 못 살 것처럼 굴은 행동들이나 지금 나에게 한 말들과 네 행동이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그’ 스파이더맨들이 온 세상에서 죽어가는 마당에?”
“너도 알다시피 언제나 탈출구는 있어.”
“네가 아는 스파이더맨들이 그 탈출구로 도망치는 인물들이긴 하고?”
냉소적으로 말한 사내는 다시 손목장치로 관심을 돌렸고, 미간을 구긴 채 팔짱을 낀 웨이드가 사내만큼이나 냉소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언젠간 탈출하는 법을 배우게 되겠지. 그리고 언젠간 탈출구를 찾게 될 거야. 아직 찾지 못 찾았을 뿐이라고. 하긴, 네 말대로 탈출할 인간들도, 탈출구를 찾을 인간들도 아니지. 아니, 그렇게 만들어진 건가? 아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솔직히 말해서 어차피 몇 명 빼곤 필요하면 다시 다 살릴 속셈들인데! 굳이 그들이 짜놓은 판에 내가 낄 필욘 없지. 낄 수 있는 지조차 지금은 미지수야.”
“여전히 궁지에 몰리면 헛소리만 지껄이는 군. 어중이 떠중이처럼 이쪽에서 일했다 저쪽에서 일했다 하는 용병다워, 데드풀.”
“멸종은, 너희만의 문제가 아니야, 슈페리어 스파이더맨.”
으르렁거리듯 낮아진 목소리에 슈페리어 스파이더맨이라 불린 사내의 고개가 올라갔지만 흘깃 쳐다본 게 전부였고, 팔짱을 낀 채로 손에 들고 있는 총을 까닥이기 시작한 웨이드가 이를 갈며 말했다.
“불 타고 있는 건 너네 세계뿐이 아니라고. 누구에게나 천적이 있어. 제 3차 대멸종이라고 들어는 봤어?”
“하하. 그래서 본인은 거기서부터 탈출할 탈출구를 찾으셨다 이 말인가? 탈출하기 전에 탈출구 위에 적혀있는 명패는 확인해봤어? 내 생각엔 쥐구멍이나 도망자라고 적혀있었을 거 같은데. 그런 건 확실히 해야 좋거든.”
낮고 빠르게 말하는 사내의 시선은 여전히 손목에 가있었고, 총을 쥔 웨이드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발견한 피터는 그를 지금 나가서 잡아야 할지 아니면 지금 저 둘이 하는 말을 더 들어야 할지 망설였다.
“너야 말로 살아남는 거라면 일가견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여기로 왔잖아.”
평이한 어조로 대답한 사내의 눈조리개가 가늘어졌다 이내 정상 크기로 돌아왔고, 잠시 그런 사내를 노려보던 웨이드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아무리 더 나은 스파이더맨이라고 말해봤자 네 세계는 그 얇고 찢어지기 쉬운 이차원이야. 네가 최근 본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없이 많은 차원을 난 봐왔어. 그 대가가 너무 비싸서 넌 감히 엿볼 엄두도 못 내는, 그런 차원을.”
“그건 네가 도망자에 불과하다는 내 주장에 뒷받침밖에 안 돼, 데드풀. 그 대가를 치르고 선택한 결과가 이거라고? 스파이더맨과 맞서 싸우던 나조차도 그 징글징글한 거미떼들에 둘러싸여 같이 살아보자고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희얀한 게 하나 있긴 했지. 그 징글징글한 거미떼가 지나치게 깨끗하더라고. 난 솔직히 그 드글드글한 거미들 사이에 종양 덩어리 한 두 개 정도는 껴있을 줄 알았는데 종양이라곤 조직세포 검사 할 만큼도 없더군. 뭐, 스파이더맨을 존경하니 사랑하니 하던 것도 다 그 미친 헛짓거리 중 하나였나 보지?”
손목에서 시선을 뗀 사내는 이제 아예 대놓고 비아냥거리고 있었고 비난어린 목소리로 웨이드가 속삭이듯 말했다.
“난 이미 내 스파이더맨을 잃었어. 그리고 그나마 잃을 가능성이 제일 낮은 스파이더맨을 찾아 온 거야. 내가 아는 스파이더맨들이라면 아무도 여길 찾지 않을 줄 알았거든.”
“……틀린 말은 아니야. 다들 여긴 가봤자 소용없다고 하면서 리스트에서 지웠거든.”
“그럼 그냥 그대로 꺼져, 닥터 옥토푸스. 넌 내가 뭔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 할 테니까. 그러고 보면 그 자식들이 하는 일이 틀리다고만 할 수는 없겠어. 죽이고 살리고, 죽이고 살리고- 이젠 지겨워, 지겹다고! 왜 그냥 해피엔딩으로 끝내지를 않는 거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가 디즈니 엔딩 아닌가? 아니면 그 엔딩도 자본주의에 무릎이라도 꿇었대?”
“헛소리라면 그만하는 게 좋겠어. 그보다-”
사내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을 튕겼고, 그 순간 피터가 숨어있는 자리 위로 떠오른 거미 형태의 비행체가 빛을 뿜어냈다.
“벌레가 하나 있는 거 같은데.”
빛과 함께 피터의 모습이 드러나자 마스크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피터는 웨이드의 얼굴이 구겨질 때로 구겨졌다는 걸 깨달았고 재빨리 비행체를 공격해 떨어뜨린 뒤 웨이드와 사내 사이에 끼어들었다.
피터의 어깨 위로 뻗어진 팔 끝엔 총이 쥐어져 있었고, 철컥이는 소리와 함께 총이 장전되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사내의 손목의 장치는 이제 안정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난 그저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것뿐이야. 다른 거미들은 여기가 닫힌 세계라고 하더군. 아니나 다를까 아주 평화로워. 네가 여기서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는 동안 다른 거미들은 활활 불타고 있거든, 스파이더맨. 흠, 그것보단 거미 전용 살충제가 대량 살포됐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군. 받아.”
주먹이 쥐어져 있던 다른 손에서 던져진 기계는 허공에 떠 있던 그 짧은 순간에 웨이드의 총에 맞고 날아갔고, 혀를 찬 사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공식적으로 난 어쨌거나 여기에 불시착한 거고 그 과정에서 시계를 하나 잃은 셈 쳐야겠군. 좋은 핑계거리 아주, 고마워, 데드풀. 그 시퍼런 놈 표현을 따르자면 여기가 닫힌 세계라는데, 그게 니가 말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인가?”
비웃음 가득한 사내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총알이 그의 마스크를 스치듯 지나가 뒤쪽 벽에 박혔지만 여유롭게 낮은 소리로 웃은 사내가 사라지기 시작한 자신의 발끝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한 대 치기 전에 난 이만 가보지. 이래봬도 꽤나 중요한 인물이라서 말이야.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아보라고, 데드풀.”
사내는 맨처음 골목 밖에서 보았던 폭발하는 듯 하는 푸른빛과 함께 사라져버렸고, 여전히 사내의 빈자리를 향해 뻗어진 팔을 잡아내린 뒤 돌아선 피터는 웨이드가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겼다.
그의 예상대로 웨이드의 얼굴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채였고, 누구보다 위로가 필요해보였지만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넘길 수 없었던 피터는 그를 위해 침묵하라는 마음 속 속삭임은 눌러 넣은 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명할 일이 아주 많은 것 같은데요, 데드풀.”
* * *
웨이드의 설명은 길었다.
웨이드가 피터의 세계로 온 건 말 그대로 도망이었고, 수많은 평행세계에서 죽어가고 있고 죽이고 있는 자신들을 피하기 위한 도피였다. 끊임없이 걸려오던 전화는 그들의 전화였다.
피터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일명 닫힌 세계로 그웬 스테이시가 죽고 그가 라이노를 물리친 날로 더 이상 진행이 없는 세계로 그가 ‘그럭저럭’ 평화롭다 말하던 날들이 그 반증이라는 게 웨이드의 설명이었다.
방금 그 사내가 한 이야기에 대한 설명은 비교적 간단했다. 저 바깥 차원 어딘가엔 차원을 이동하며 스파이더맨의 정수를 흡수하는 빌런이 있고, 그 빌런들이 대대적인 사냥을 시작했으며 그 사냥을 막기 위해 모든 차원의 스파이더맨이 모이고 있는 중이라는 것.
“아까 이야기한 스파이더맨 이야기는 뭐예요? 당신 세계의 스파이더맨도 그 빌런에게 당한 건가요?”
“아니.”
“그럼요?”
“날 구하다 죽었어.”
“당신은-”
“그렇게 멍청한 죽음이 어딨어? 죽지 않는 놈이 죽을 까봐 다시 못 구하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죽음이.”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린 웨이드는 내내 바닥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피터와 눈을 맞췄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알잖아요. 내가 갈 거라는 거.”
“저 새끼가 왜 왔는지 몰라? 네가 이럴 걸 알고 온 거야. 다른 스파이더맨들이 오만 스파이더맨을 다 모으면서 왜 널 빼놨는지 알아? 닫힌 세계? 그딴 게 어딨어! 넌 거기 가면 무조건 죽을 걸 알고 뺄 거라고! 그걸 저 새끼가 알면 널 일회용 쓰듯 쓰고 버릴 거라는 걸 알고 둘러댄 거고!”
“그럼 더더욱 가야겠네요. 어쨌거나 내가 필요하단 거잖아요.”
“난, 이 모든 상황을 알고 널 찾아온 거야. 다른 스파이더맨이 찾지 않을 유일한 스파이더맨을 찾아서. 절대로 죽지 않을 스파이더맨을 찾아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죠. 죽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날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당신은 수없이 죽음을 겪었잖아요. 다른 사람은 한 번으로도 힘든 죽음을 수없이요.”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
“그거 없인 스파이더맨이 아니라면서요?”
엷게 웃는 피터를 향해 비식 웃은 웨이드가 여전히 잡혀있는 팔을 재빨리 틀어 빼낸 뒤 총을 장전한 뒤 피터의 오른손을 겨눴다.
“미안. 그래서 너희를 좋아하긴 하는데 너흰 너무 착해빠졌어.”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오른손을 움켜쥐고 피터가 쓰러졌고, 다시 총을 장전한 웨이드가 이번엔 그의 왼손을 겨눴다.
“그리고 난 이제 착한 사람들이 죽는 영화는 지겹고.”
다시 한 번 총성이 허공을 갈랐다. 신음하는 피터의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으로 구급차를 부른 웨이드는 그를 지나쳐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기계 장치를 주워 파우치에 넣은 뒤 벨트에 고정된 장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잘 있어, 스파이디. 난 이제 이 모든 걸 끝낼 준비가 된 거 같거든. 난, 내 탈출구를 찾았어.”
- 쓰면서 들은 노래 : https://youtu.be/P6btN_cdL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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