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mour has it.

썰/덷거미덷 2016. 8. 18. 11:43 |

Rumour has it.


Chapter 01.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아직 하지 못한 말도, 해야만 했던 말들도. 하지만 그 모든 말들이 산산이 조각이 나 머리를 부유하는 탓에 굳어버린 혀는 입천장에 눌러 붙은 채 침묵하고 있었고, 그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손 틈 사이로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스파이더맨.]


 온통 회색빛인 곳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린 시간들보다도 더 검붉은 색의 옷을 입은 사내의 입 꼬리가 올라간 듯 마스크가 비틀렸고, 기괴한 모양새로 찌그러진 마스크는 산산조각이 나버린 그의 말들보다도 엉망인 채였다.


 [피터 벤자민 파커.]


 혀는 여전히 답답하게도 제자리를 지킨 채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있었고, 흘러가는 시간만큼이나 빠르게 차가워진 체온은 지나치리만큼 비현실적이었다.


 [그 어느 것도 네 잘못인 건 없어. 그저, 다들 제 명줄대로 사는 거지. 그렇게 치면 나보다 일찍 죽은 놈들은 다 억울해서 두 번 뒈졌겠네, 안 그래?]


 평소라면 거친 숨 속에서 뱉어진 말들에 기가 찬 웃음이라도 뱉었던 입술에서 터져 나온 것은 울음이었고, 가느다랗게 떨리며 들어 올려진 손이 뺨에 닿고서야 자신이 아까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움츠러들자, 사내의 손은 빠른 속도로 떨어져나갔고, 손을 붙잡는 대신 이마를 맞댄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구급차가 올 거야. 배너 박사님도 올 거고, 토니도, 그리고, 그게 누구건 올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그 때까지만 버텨줘. 그러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아냐. 그래, 그렇다고 하자. 쓸데없는 걸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아무래도, 아무리 나라도, 이번만큼은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거든. 사랑해, 피터 파커. 피터, 사랑해.]


 찢어진 마스크 사이로 희미하게 떠져 있던 눈꺼풀이 감기는 걸 본 그가 발작이라도 하듯 더 크게 울음을 터트리자 낮게 웃음을 터트린 사내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끝까지 말해줄 순 없는 거지, 그치? 그래, 그래……. 그래……그거면, 됐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빨대를 입에 문 채 말간 눈으로 쳐다보는 청년의 얼굴을 밝았다. 좁은 화면 너머로 보이는 벽엔 익숙한 포스터들, 메모판이 어렴풋이 보였고,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은 그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상대가 보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오랜 버릇만큼은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아냐, 계속 이야기 해.”

 “그러니까! 애초에 과학부인 저한테 왜 문학부 일을 시키나 이거죠. 애초에 그 작가 소문이 얼마나 안 좋은데요. 담당자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그러지, 그 퇴사한 담당자들도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다 그러지. 진짜 얼굴을 못 본 건지, 비밀 유지 서약 때문에 고소 당할까봐 말을 못 하는 건지. 아, 일하기 싫다.”

 “그래? 작가 이름이 뭔데?”

 “데드풀이요. 이름도 웃기지 않아요? 데드풀이라니-”

 “데드풀이라고? 본명은?”

 “어, 그게, 음, 아무도 모르는데-”

 

 그의 격한 반응에 청년이 어리둥절해하거나 말거나 다급해진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며 빠르게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고, 이상한 침묵에 표정을 굳힌 청년이 막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책상 옆 스탠드 스위치에 손을 올린 그가 다급히 말했다.


 “그 인터뷰, 내가 가면 안 될까.”

 “네?”

 “그 인터뷰 내가 가고 싶다고 했어. 질문이야 네가 뽑아주면 되고, 나도 이쪽으론 경험이 있으니까-”

 “에이, 그건 안 되죠. 일 하기 싫은 게 맞긴 한데 잘리고 싶단 소린 아니……였거든요…….”


 청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등 스위치를 킨 그는 사색이 되어가는 청년의 얼굴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고, 그 잠깐 사이에 진정한 청년이 적대적인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 누구예요?”

 

 몇 번이고 연습한 상황이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모든 준비를 끝내놓은 그였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건 몇 번을 겪어도 어려웠다.


 “만나서 반가워, 피터 파커. 내 이름은 피터 벤자민 파커, 다른 세계의 너야.”



Chapter 02.


 자신을 다른 세계의 피터 파커라고 소개한 사내는 이내 그가 인터뷰 하려는 작가와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고 반복해서 말했고, 자세한 설명 없이는 어려울 것 같다는 그에게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야기보다도 더 믿긴 힘든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좋아요. 당신이 사랑을 찾아서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까지는 믿을게요. 근데 뭘 믿고, 아니, 다른 세계의 피터 파커가 당신을 안 도와주면 어쩌려고 그런 도박을 했어요? 당신이 진짜 저라면 그 정도는-”

 “피터 파커잖아. 핏.”


 그의 말을 끊고 대답한 사내는 미묘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고, 사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챈 그는 헛웃음을 짓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인터뷰 정도야 괜찮겠죠. 하지만, 제가 일자리 잃게 만드시는 건 안돼요. 아직 학자금 대출도 산더미거든요.”

 “그래.”

 “고맙다는 말은요?”

 “고마워.”


 지나치게 말을 아끼는 사내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는 상태였고, 괜한 짓을 했나 싶어 잠시 망설이던 피터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채팅창 상단에 있는 자신의 아이디를 보곤 고개를 내저었다.


 피터 벤자민 파커.


 반쯤 장난으로 시작한 랜덤 채팅 치고는 지나치게 정직한 아이디가 문제였을까. 여전히 희미한 불빛 속에서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사내의 얼굴은 자신보다 조금 더 늙었을 뿐, 자신의 것과 똑같았고, 무심결에 학창 시절 3시에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괴담을 떠올린 그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기 위해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화면을 응시했다.


 “말만 하실 거예요?”

 “뭐, 계좌로 돈이라도 쏴줄까?”

 “나 참, 그게 아니라- 헐?”

 “모르나본데 나도 얼굴 없는 유명인이라서 말이야. 얼마 전에 네가 취재한 회사? 거기 기술 고문이 나야. 덕분에 돈은 벌만큼 벌었어.”


 입금 알림이 뜬 핸드폰 화면엔 생각지도 못한 금액이 떠있었고, 말을 잇지 못하던 그가 막 도대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에 대해 물으려는 찰나, 사내가 말을 이었다.


 “여기가 내가 살던 세계의 평행세계라는 걸 잊지 마, 피터. 이상한 생각도 하지 말고. 그리고 비번은 바꾸는 게 좋을 걸. 그러다 한 번 털린다. 내가 그랬거든.”


 비식 웃은 사내는, 문자로 자신의 번호를 보내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화면을 껐고, 화면이 꺼지기가 무섭게 또 다시 울린 핸드폰으로 딱 번호만 보낸 문자가 뜨는 것을 본 그는, 혀를 내두르며 약속 시간과 장소를 보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Chapter 03.

 

 비가 올 것처럼 흐리던 하늘은 어느 새 맑게 개여 있었다. 여름의 끝에서도 발을 물리지 않은 더위는 도시를 녹여버릴 듯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있었고, 예년이라면 애진작에 목소리를 죽였을 매미들의 소음은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낡은 철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 그는, 피터, 그러니까 편의상 벤자민으로 부르자면, 벤자민이 챙겨준 질문지를 다 잡은 뒤 초인종을 눌렀고, 거친 쇳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피터, 벤자민, 파커.”

 “안녕하세요, 데드풀씨.”

 “그냥 데드풀이라고 부르지 그래요? 음료는 뭘로 할래요? 뭐가 좋을지 몰라서 일단 다 사와 봤는데.”


 앞서 걸어가던 사내가 손짓으로 가리킨 식탁을 본 그는, 다 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식탁을 가득 메운 음료캔들 사이에서 망설이다 어색한 얼굴로 생수통을 집었고, 그가 식탁 앞에서 고민하는 사이 소파로 향한 사내는 집 안에서 회색 후드 집업에, 챙모자까지 눌러쓴 채였다.


 “여기가 집이 아니신가봐요.”

 “맞는데요. 왜요?”

 “복장이 그러시길래요.”


 우연찮게 온 히어로가 없는 세계에서조차 불행은 사내를 그냥 보내지 못한 듯 했고, 그의 말에 모자를 더욱 눌러쓰는 사내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그는 애꿎은 질문지를 움켜쥐며 사내의 옆에 자리 잡으며 말했다.


 “좀 춥네요.”

 “아, 온도를 높일까요?”

 “그럼 덥지 않으시겠어요?”


 그의 말에 망설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헛기침을 하며 질문지를 커피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그제야 그가 자신의 바로 옆에 앉아있다는 걸 깨달은 듯 화들짝 놀란 사내가 자리를 벌리자 멋쩍게 웃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죄송해요. 습관이라.”

 “모르는 사람 바로 옆에 앉는 게요?”

 

 당신 바로 옆자리에 앉는 게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걸 누른 그는 고개를 저으며 긴 소파 옆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았고, 사내가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걸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후드 집업 정도는 벗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 그게-”

 “그런 데 편견 없으니까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네?”

 “이렇게 유명한 작가시면 공개 팬 사인회 정도는 해도 되는데 철저히 익명을 지키시는 걸 보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담담하게 말을 이은 그가 사내를 빤히 쳐다보다, 사내의 손에 들려 있던 에어컨 리모콘이 삐빅거리는 소음을 내기 시작할 때쯤 시선을 뗀 뒤 질문지를 끌어 사내의 앞에 놓았다.


 “불편하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역시 기억하시나 보네요.”

 “네?”


 이번에 당황한 쪽은 그였고, 후드 집업을 벗은 사내가 이어 모자까지 벗은 뒤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웨이드 윌슨입니다. 데드풀은 가명이고요. 뭐, 그게 진짜 이름인 사람은 없겠죠. 다시 뵙게 돼서 반갑네요.”



' > 덷거미덷'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버송이랑 독터 관계로_덷거미덷  (0) 2016.08.30
너는 내 운명 ㅋㅋㅋㅋ  (0) 2016.08.18
Long live the Queen.  (0) 2016.07.22
권태기 속박 키워드로.  (1) 2016.06.27
이상과 현실 사이  (0) 2016.06.23
Posted by Spideypool

Long live the Queen.

썰/덷거미덷 2016. 7. 22. 10:58 |


Abeliophyllum 단편

Long live the Queen.



Chapter 00_여는 이야기



이것은 당신의 영원한 동반자이다.


이것은, 매시간 당신의 뒤를 쫓고

당신의 과거를 끌어 당신의 현재를 물고 늘어지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조차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굴곤 한다.


당신의 발뒤꿈치에 붙어 늘상 동행하며

당신의 미래의 끝에 걸터앉아 당신을 기다리는 이것은 무엇인가.




 새까맣게 죽은 꿈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매캐하게 타는 냄새가 사방에 퍼져있었고, 절규하는 사람조차 없는 폐허에 선 그는, 어째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 채였다.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의도나 희망과는 정반대의 광경이라는 것뿐이었고, 숨조차 뱉지 못한 채 벌어진 입으로 타죽은 꿈들의 숨이 스며들어갔다.


 [피터 파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소름끼치도록 다정했고, 친절로 점철되어 일말의 희망을 품고 돌아섰던 그는, 그 까만 재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보곤 이내 가슴 속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고 있던 희망을 내리눌렀다.


 [당신이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그를 향해 내딛은 그녀의 발에 밟힌 누군가의 흔적이 소리 없이 바스라져 바람에 날렸고, 흩날린 재만큼이나 새까만 머리칼이 바람을 따라 휘청이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그 누구도 구하지 못할 거야.]


 다시 한 발자국 내딛은 그녀는, 재 속에서 무언가를 주워 그를 향해 가볍게 던졌고, 그가 그 새까만 재속에서도 여전히 검붉은 빛이 도는 천 쪼가리를 받아드는 것을 보곤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그 사람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더.]


키워드_후회, bottom of the river




Chapter 01_S’s side.



세상의 모든 것이 갖고 있는 것


빛이 있는 이상 영원히 존재할 그것

어둠 속에선 모든 것을 갖지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그것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틀 전부터 내리던 비가 지겹도록 땅을 두들기고 있었다. 거센 빗살은 스며들 땅 한 조각조차 얻지 못한 채 단단한 아스팔트길을 따라 하릴없이 하수구를 향해 흘러들어가고 있었고, 굴곡진 보도블럭 사이에 엉겨 붙은 빗방울들은, 메마른 여름철이면 저들을 반기곤 했던 이들은 만나보지도 못한 채 길거리 행인들에 채이고 채여 끊임없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 도시에 햇살이 들기 시작하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로 사라지고 말 일이었다.


 모든 세상이 회색으로 잠겨든 그 와중에도 그림자는 끈덕지게 발뒤꿈치를 물고 늘어져 있었다. 수많은 그림자들 위에 덧그려진 그녀의 그림자는, 그 짙은 색을 뽐내며 자신의 자리를 고수했고 그 위론 또 다른 그림자들이 겹쳐졌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완연한 어둠을 잃은 도시에서 그림자란, 언젠가 먼 옛날엔 사람들의, 물건들의 뒤꿈치나 물고 늘어졌을 것들이 이제는 어느 새 사방에 덧그려진 채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길거리 위의 그림자엔 높게 솟은 건물의 그림자가, 그리고 그 건물 위엔 비행기가, 그리고 그 위엔 구름이-


 그녀에게 있어서 그림자가 없는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랬기에 그녀는 언제나 언젠가 이 모든 그림자가 사라질, 그 날만을 꿈꾸곤 했다. 인간의 뜻을 따라 제멋대로 꾸며진 도시의 건물들이 무너지고, 그 회색빛 그림자들 위로 걸어 다니던 인간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이 별에서 바싹 마른 대지 위, 구름조차 사라진 하늘에 홀로 떠서 그림자 하나 만들지 못한 태양이 외로이 떠 있는, 그런 날들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갑작스럽게 씌여진 우산은 그녀의 그림자를 덮어버렸고,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들을 아쉽게 쳐다보던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사내의 얼빠진 얼굴에 비죽 웃었다.


 “글쎄요.”


 애매하게 답한 그녀는 여전히 가야할지 계속 우산을 씌워줘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사내를 빤히 쳐다보다 시선을 위로 올렸고, 그녀의 시선에 거세게 흔들렸던 우산은 이내 평형을 되찾았지만, 우산의 흔들림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사내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건-”

 “팬일수도 있죠. 빨간 색을 좋아하시나봐요? 설마 이거 밖에서도 이렇게 보이는 건 아니죠?”


 금방이라도 우산 밖으로 나가서 확인을 할 것처럼 그녀의 허리가 꺾이는 걸 본 사내가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고, 그 사이에 얼핏 보인 우산 외양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사내를 대신해 답했다.


 “다행히 검은 색이네요. 안이랑 똑같았으면 얼른 우산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는데.”

 “연인이 준 거라서 버릴 수도 없어서요. 그리고 또 안 챙겨 다니면 그건 그거대로 잔소리를 듣기도 하고.”

 “그냥 쓰기 아까워서 소장만 한다고 그러지 그랬어요. 그래도 데드풀이라니 의외네요.”

 “뭐가요?”

 

 그녀가 말하는 사이에도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꺼낸 사내가 그녀에게 건넸고, 말없이 평범하게 생긴 체크무늬 손수건을 받아든 그녀가 턱짓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나사 빠진 캐릭터 아니에요? 뉴욕시의 하고많은 히어로 중에 데드풀이라니, 조금 의외라서요. 댁 같은 타입은 보통 데드풀보다는 아이언맨이나-”

 “아이언맨이나요?”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더라구요.”


 그녀의 말의 어디가 웃긴진 몰라도 웃음을 터트렸던 사내는 이내 그녀가 말없이 손수건을 든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단 걸 깨닫곤 이내 웃음을 그쳤고,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다시피, 연인이 준 거라서요.”

 “남자친군가 보네요.”

 “네?”

 “아까부터 굳이 ‘연인’ 이라고 하시잖아요. 여자 친구라고 안 하시고. 이름은 피터 파커?”

 “와, 혹시 점쟁이세요?”

 “누구라도 맞출 수 있겠는데요. 특히 손수건에 이름을 새겨서 다니실 정도면 말이죠.”


 피식 웃은 그녀는 피터에게 손수건을 그대로 건네주는 대신 우산 손잡이를 잡았고, 그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우산 손잡이에 있던 피터의 손을 풀어낸 뒤 고개를 외로 꼬며 말했다.


 “설마 우산까지 씌워줘 놓고 비 맞고 가라고 하실 건 아니죠, 신사분?”

 “어, 근데 이게 제 남자친구가 준 거라-”

 “그럼 잘 쓸게요. 운이 좋다면 다음에 돌려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요.”


 피터의 손이 다시 우산 손잡이로 향하려는 찰나 우산 손잡이로 향했던 그의 손에 반들거리는 하늘 색 명함이 대신 쥐어졌고, 싱긋 웃은 그녀는 우산을 든 채로 멀어지며 그에게 외쳤다.


 “아니면, 본인이 직접 찾아오는 방법도 있긴 해요, 피터 파커군.”


키워드_그림자, I’m just your problem




Chapter 02_S’s side



누군가는 그것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다.


누군가는 그것이 대화라고 말하며,

누군가는 그것은 기록 외의 다른 의미는 갖지 않는다 말하고,

누군가는, 그것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분명히 존재하나 어떤 것에는 그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하며

그 누군가에겐 전부가 되는 그것,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며칠 새 내리던 비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발에 질척이며 감기던 빗방울들은 모조리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그녀는 영영 모를 일이었다. 또한 그 빗방울들이 언제 다시 이 땅을 적시기 위해 끝없는 추락을 다시 시작할지도, 아무 의미 없을 그 순환을 어째서 그토록 반복해서 하는지도, 그녀는 영영 모를 일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나날들이란 그저 반복에 불과할 뿐이었고, 그녀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수많은 활자와 수많은 데이터의 축적에 불과했다.


 그녀의 책상엔 여전히 검은색 우산이 놓여있는 채였다.


 녹슨 우산의 끄트머리는 플라스틱 손잡이에 접혀 들어가 보이지 않았고, 녹슨 우산의 끄트머리와 별개로 플라스틱 손잡이는, 우산의 주인이 그 우산을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반들반들한 표면을 빛 아래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피터 파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을 그 이름이 갖는 의미는 많고도 많았다. 그 이름이, 가진 관계만큼 늘어나는 의미를, 그 의미들이 갖는 감정들의 전부를,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산의 손잡이 밑바닥에 삐뚜룸하게 적힌 그 이름을 적은 이의 감정만큼은 끊기고 끊긴 선들에 새겨져 있었고,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크기로 적힌 이름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은 그녀는 여전히 소식 한통 없는 핸드폰을 보다 피식 웃은 뒤 우산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애초에, 찾아올지 오지 않을지 모를 손님을 기다리는 건,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뜨거운 태양 빛은 건물 그림자만 남긴 채 하늘 저편에 숨어 보이지 않았고, 뜨거운 열기만이 도시 속에 남아 그들이 거닐고 있는 이 도시가 여름임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맞은 대로변은 혼잡하기 그지없었고, 살결을 파고드는 열기만큼이나 끝없이 귓속을 파고드는 소음에 눈살을 찌푸렸던 그녀는,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하늘을 쳐다보는 대신 우산을 펼쳐 우산 속을 하늘을 향해 들고 흔들었다.


 “워우. 대낮부터 그런 걸 흔들고 계시면 안 되죠. 그것도 스파이더맨 앞에서!”

 “아, 빨갛길래 데드풀인 줄 알았네요. 미안해요. 그럼-”

 “어, 그게, 제가, 음, 얼마 전에, 음, 그러니까 그 우산을 잃어버린 청년을 알아서요, 음, 그건 일단 제가 맡아두면 안 될까요?”

 “어머? 그래요? 이건 제건데 혹시 착각하시는 건 아니고요?”

 “이봐요. 여기 우산 손잡이에-”

 “제 남자친구 이름이에요.”

 “남자친구요?”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는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생긋 웃으며 고개까지 끄덕인 그녀가 우산을 천천히 접었고, 가벼운 소리를 내며 접혀드는 삼단 우산에 안절부절 하지 못하던 청년이 결국 모여드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그녀에게 속삭였다.


 “저기요, 그런 유언비어는 삼가시고, 우산은 이리 주시죠.”

 “저도 이 우산을 준 사람한테 자세한 설명은 못 들어서요.”

 “일단 우산은 좀 주고-제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곤란해졌는데, 저기요?”

 “전화번호는 줬다니까 연락이나 해달라고 전해줘요, 스파이더맨. 친절한 이웃이시니까 그 정도는 해줄 거죠?”


 생긋 웃은 그녀는 미리 준비해놨던 명함을 스파이더맨 손에 건네주었고, 또 다시 손에 건네진 푸른색 명함을 손에 꼭 쥔 청년이 여전히 우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명함 잃어버리지 마요, ‘스파이더맨’”


그녀가 발걸음을 떼자마자 뒤에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스파이더맨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사람들 무리에 휩싸인 스파이더맨을 향해 우산을 흔들어 보인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사무실을 향했다.

 

 며칠간 쏟아 붓던 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모든 사건이 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삶을 스쳐지나간 모든 이름이 그녀에게 의미 있게 남은 것은 아니었지만, 피터 파커, 그 단순하다면 지나치게 단순한 이름은 이미 대문자로 박혀버렸고, 그녀는 그 이름을 그저 스쳐지나가는 이름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키워드_역사, Blood on my name




Chapter 03_P’s side



승리의 앞 두 글자

위치의 앞 두 글자

그리고 맨 아래의 가운데 글자


살아남은 자들만이 가능하고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이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여름이란 계절은 한결 같으면서도 변덕스럽기 그지없었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굴다가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한기를 뿜으며 비를 쏟곤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늘상 그의 가방에 있던 우산은 검은 색의 껍질만을 남긴 채 사라진 채였다. 간신히 풀린 연인과의 관계가 다시 우산 때문에 어그러질까 두려워 우산도 없이 집 밖으로 나온 피터의 입에선 한숨이 새어나왔고, 기세만으로는 못할 것 없이 쏟아 내리던 빗방울들은, 아파트 현관의 지붕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난 채 떨어져 내렸다.


 “우산이 이것밖에 없어요?”


 생긋 웃는 여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불쑥 건네진 검은 색의 삼단 우산은 곱게 접혀진 채였고, 벌써 세 번째 보게 된 하늘색의 명함에는 여전히 간결한 문체로 적힌 긴 이름이 늘어져 있었다.


 “스파이더맨이 아무래도 바쁜가 보네요. 나보고 어찌나 우산을 달라고 닦달을 하던지-”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죠?”

 “뉴욕시라는 게 생각보다 좁아서-”

 “어떻게 알고 오셨냐고 물었어요.”


 명백한 적의가 담긴 어조에도 웃는 낯을 고수한 여자는 고집스럽게 우산을 들이밀었고, 명함을 피해 우산만 집은 피터가 얼굴을 구기자 기어코 여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말하면, 어쩔 건가요.”

 “글쎄요. 일단 가까운 경찰서에 가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을 부른다거나요?”


 장난스럽게 피터의 말을 대신 끝낸 여자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고, 여전히 우산을 든 채 한 발자국도 아파트 밖으로 나오지 않은 피터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모든 연줄을 동원해서 피터 파커를 찾았어요. 됐나요?”

 “우산 하나 돌려주려고요?”

 “우산을 돌려주려고, 라기보단 우산 주인을 보고 싶어서가 더 맞겠죠, 아마?”


 어느 새 정색을 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피터가 한숨을 내쉬었고, 볼을 부풀렸던 여자는 손에 들린 명함을 만지작거리다 여전히 그의 손에서 펼쳐지지 않은 우산에서 시선을 올려 피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곤 다시 명함을 건네 왔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줘요. 이름이 독특해서 부르기 힘들 텐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본인이 그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시니까?”


 비죽 웃은 여자는 할 말조차 잊은 채 서 있는 피터를 향해 고개를 저었고, 피터의 말을 손짓으로 막은 뒤 다시 명함을 내밀었다.


 “아일레마 허니 스미스예요. 피터 벤자민 파커 맞으시죠?”


 여자는, 피터의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내밀었던 명함을 피터에게 던졌고, 명함은 정확히 피터의 왼쪽 가슴, 그러니까 아마도 심장이 있을 법한 위치에 부딪힌 뒤 땅으로 떨어졌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어요, 피터 파커군.”


 분한 마음에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 벌어졌던 피터의 입술은 여자의 다음 말에 다물어졌다.


 “그웬 스테이시나 당신 삼촌같이 당신한테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언젠간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연락 줘요. 투 아웃이에요. 네 번째 기회는 없을 거예요.”


 말을 맺은 여자는 눈짓으로 피터의 발치에 떨어진 명함을 가리켰고,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명함을 주은 피터가 정말로 누구냐고 물을 참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채였다.


키워드_방문, visit, Club 8의 Love in December




Chapter 04_P’s side.



그것은 마치 부모의 집과도 같아서

사라지기 전까지 그 안락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은, 마치 계절과도 같아서

변화 없이는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다.


당신의 삶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는 규정될 수 없는 것,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아침의 싸늘한 공기는 7월로 접어들고 나서부터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옆자리에선 냉기가 흘렀고, 잠들 때와 마찬가지로 세워진 채로 놓여진 베개에 한숨을 내쉰 피터는 평소라면 지겹다고 욕할 팬케이크 향을 찾아 부엌으로 향하는 자신을 타박한 뒤에야 식탁 의자에 앉아 텅 비어 있는 맞은편 식탁 의자의 등받이를 자신이 할 수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웨이드가 집을 비운지 벌써 이주 째였다.


 처음엔 기껏 만들어준 우산을 잃어버렸다며 징징대던 웨이드는 언제부턴가 그를 보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그를 불러 세웠다가 이내 입을 다물곤 하잘 것 없는 농담을 늘어놓았고, 그 짧은 침묵 사이의 불안을 읽어낸 그가 아무리 다그쳐도 자기야 늘 그렇지 않느냔 말로 응수하더니 한동안 하지 않던 자살 소동으로 그의 심장을 뒤흔들어놓았고, 그 여자가 찾아간 뒤부터는 모습을 감춘 채 뉴욕시는 물론 미국 내 그 어느 곳에서도 사라진 채였다.


 그가 탐탁지 않아 할 법한 미션을 받았을 때면 출장이라고 둘러댈지언정 집을 비운다고 예고는 하고 떠나던 웨이드였고, 아무리 미션 중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하루가 멀다하고 울려대던 핸드폰이 침묵한 지도 벌써 이주 째였다.


 귀찮게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아쉬움으로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잠이 들 때면 질척이며 달라붙어 귀찮다고 생각했던 사소했던 스킨쉽이, 지겹도록 먹어서 다시는 입에도 대고 싶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팬케이크가, 아침이면 아파트 안을 울리며 퍼져 나가 민원 신고도 수차례 받았던 음악들이 채우던 일상은 단 한사람의 공백으로 사라져버렸고, 평소라면 달갑게 받아들였던 아침의 침묵은 그 고요가 시작되던 날부터 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할 일이 있었고, 해야만 하는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뉴욕시는 영웅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영웅들 모두를 필요로 했고, 거기엔 뉴욕시의 친절한 이웃이라는 스파이더맨 또한 속해 있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라.”


 조용히 내뱉은 말이 남긴 씁쓸함은 피터의 혀를 휘감고 나간 뒤 텅 빈 공기에 잠시 머물다 흩어졌고, 식탁 위에 내려앉았던 먼지가 조용히 선을 그으며 쓸려나갔다. 자신이 한참을 망설이다 내밀었던 장미꽃은, 여름 열기에 바싹 마른 채 식탁 위 화병에 말라죽어있었다.


 몇 번이고 자살하는 웨이드의 속사정을 듣지 못할 것을 알기에, 한 번 고집을 피우면 끝끝내 입을 열지 않는 이임을 알기에, 그리고, 뭔진 모르겠지만 그 원인이 자신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 일에 대해, 이유에 대해 다그쳐 묻는 대신 웨이드의 수트 색이 생각나 샀다며 건넸던 장미꽃이었다. 얄팍한 지갑 사정 탓에 다발은커녕 그 한 송이조차도 한참이고 망설이다 샀던 장미꽃은 꺼멓게 죽은 채 언제고 부서져 나갈 준비가 된, 시체와 같은 꼴로 얄팍한 화병 위에서 건들거리고 있었고, 아마도 이파리 끝에서 떨어져나간 듯한 잔해가 패잔병의 꼴을 한 채로 화병 주변에 흩어진 채였다.


 내내 침묵하던 핸드폰이 울린 건, 상념에 잠긴 채 다 죽은 꽃을 쳐다보던 피터가 화병을 향해 손을 뻗었던 그 순간이었고, 갑작스레 울린 핸드폰에 반사적으로 뻗은 손에 치인 화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어져나갔다.


 “여보세요!”

 [어이구, 귀청 떨어지겠네. 뭐 기다리던 전화라도 있어? 누가 들으면 헤어진 전여친 기다리는 남자라고 해도 믿겠어, 스파이디.]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받아쳤을 토니의 농담은 날카롭게 피터의 심장을 후벼 팠고, 평소답지 않은 피터의 침묵에 당황한 토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피터의 발 앞엔, 누렇게 썩은 물에 뒤섞인 화병 조각과 그 아래에 깔려 엉망이 된 장미꽃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뭐, 별 건 아니고, 내일이 어벤져스 회의인 건 알지? 최근에 창간한 잡지사가 있는데-]


 그렇게 시작된 토니의 이야기는 새로 창간한 잡지사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왔으며, 일단 토니 생각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내일 어벤져스 회의 후에 결정이 되는 대로 바로 인터뷰가 결정될 것 같으니 간단히 준비해오는 게 좋겠다는 말로 끝이 났고 토니의 말에 대충 대답한 피터는 토니가 말을 하건 말건 전화를 끊은 후 물에 젖은 채 엉망이 되어버린 꽃에 한숨을 내쉰 뒤 그대로 주저앉았다.


 핸드폰은, 또 다시 침묵한 채였다.


키워드_일상, Opener 8mm




Chapter 05_W’s side.



단단한 바위틈으로 새어들어 바위를 흙으로 되돌리는 힘


오랜 세월로 다져진 관계를 단숨에 깨버릴 수 있는 것


살에 박힌 가시가 빠져도 그 흔적을 남기듯,

한번 박혀들면 영영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없는 그것


그것의 이름은 무엇인가.



 모든 것의 시작은 하늘색의 명함이었다. 그리고 망할 놈의 우산.


 우산은 어쨌냐는 저의 물음에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하기를 기피한 연인의 바지 주머니에선 막 빨은 빨래에서 풍기는 향만큼이나 산뜻한 색의 명함이 떨어졌고, 의미를 알 수 없게 긴 이름과 번호는, 어째선지 세탁기 속에서도 멀쩡한 몰꼴을 하고 나온 하늘색 종이의 양면에 그 색만큼이나 산뜻한 문체로 적힌 채였다.


 [A.i.l.e.m.a Honey Smith.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름을 저렇게 짓는 거지. 미들 네임은 왜 허니고?]

 (이탈리아언가?)


 두 박스의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떠들건 말건 사라진 우산과 명함 사이의 관계를 추론하던 웨이드는 이내 그 둘 사이의 연관 관계를 찾기는 힘들다는 결론에 생각하기를 멈췄고,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는 대신 샤워를 마치고 나온 피터의 곁에 달라붙어 드라마 이야기를 떠들다 스포일러 좀 하지 말라는 피터의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말을 멈췄었다.


 그 뒤로도 별 생각이 없던 웨이드의 추론 시간이 다시 시작된 건, 길고 긴 장마 기간이 끝났던 어느 날이었다. 늘상 하던 대로 피터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오기 전이면 하는 스파이더맨 모니터링을 하던 웨이드는, 누군가가 올린 유튭 영상에 잡힌 우산을 보고서 고함을 치기 시작한 두 박스에 고개를 저으며 같이 고함을 치다 보던 영상이 끝이나 다음 영상으로 재생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뒤 다시 영상을 불러낸 뒤 미친 듯이 관련 영상을 뒤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고화질 근접 촬영 영상을 찾고서야 조용해진 박스들과 함께 풀스크린으로 띄워진 영상을 감상했다.


 다른 영상들과 마찬가지로 먼 하늘에서 오기 시작한 스파이더맨을 잡아낸 영상 촬영자의 환호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던 데드풀은 얼른 볼륨을 낮췄다가 스파이더맨이 땅에 착지한 시점부터 볼륨을 최대로 늘렸고, 마스크에 가려져 보일 리가 없는 제 연인의 표정을 상상하려 노력했다.


 스파이더맨이 땅에 착지하고 나서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하긴 했어도, 그는, 그 평범함조차도 갖추지 못한 이었고,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스파이더맨이 그녀에게 걸어갈 때까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던 그는, 대뜸 소리부터 지르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에 비죽 웃었다.


 - 워우, 대낮부터 그런 걸 흔들고 계시면 안 되죠. 그것도 스파이더맨 앞에서!

 (그럼, 일하는 도중에 연인 얼굴을 보는 건 직무 태만이지.)

 - 아, 빨갛길래 데드풀인 줄 알았네요. 미안해요. 그럼-

 “뉴욕시에 살면서 스파이더맨을 몰라?”

 [그보다는 우릴 모른다는 거에 화내는 게 옳다고 본다만.]

 “하지만 우리 스파이디 자기는, ‘뉴욕시’의 친절한 이웃이고-”

 - 어, 그게, 제가, 음, 얼마 전에, 음, 그러니까 그 우산을 잃어버린 청년을 알아서요, 음, 그건 일단 제가 맡아두면 안 될까요?

 “역시! 저 년이 훔쳐간 거였어!”

 (옐로 박스 로그인. 지금부터 저 년을 잡아 족칠 파티원을 모집합니다. 옐로 박스의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노 버튼은 없어, 없다고!)

 [그럼 애초에 왜 물어봐.]

 (그게 예의니까.)

 “쉿. 저 년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야 되니까 조용히 해 봐. 이러다 일시정지 버튼이 닳겠다고.”

 - 어머? 그래요? 이건 제건데 혹시 착각하시는 건 아니고요?

 (저런, 달걀 빠진 팬케이크에 치미창가 빠진 치미창가 먹어야 될 년 같으니!)

 “저건 내가 직접, 직접, 주문한 거라고!”

 - 이봐요. 여기 우산 손잡이에-

 “그렇지!”

 (근데 저거 몰래 새긴 거 아니었어?)

 “쉿.”

 - 제 남자친구 이름이에요.

 “뭐?”

 (이런 삐----해서 삐---할 삐---같으니. 이러기야? 이러기냐고? 삐 말고도 얼마나 많은 욕이 많은데, 삐 처리를 하겠다고? 그것도 글에서?)

  - 남자친구요?


 아니나 다를까, 스파이더맨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던 웨이드는, 여전히 생글거리던 여자가 고개까지 끄덕이더니 우산을 접는 모습에 격분해 책상을 내리쳤고,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이케아 책자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 저기요, 그런 유언비어는 삼가시고, 우산은 이리 주시죠.”

 (내놓으라고, 이 망할 년아! 아니, 근데 왜 망할 년은 되고, 삐----하고 삐---하고 삐---는 안 되는데? 심의 기준이 뭡니까!)

 “조용히 좀 하라고!”


 노란 박스 탓에 대사를 듣지 못한 웨이드가 고함을 치며 영상을 10초 뒤로 돌렸고, 곱게 접힌 우산이 가방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내밀어진 명함의 색을 확인한 웨이드는 입을 다물었다.


 - 저도 이 우산을 준 사람한테 자세한 설명은 못 들어서요.

 - 일단 우산은 좀 주고-제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곤란해졌는데, 저기요?”

 - 전화번호는 줬다니까 연락이나 해달라고 전해줘요, 스파이더맨. 친절한 이웃이시니까 그 정도는 해줄 거죠?”

 [바람피는 남자의 대다수가 내연녀의 집에 물건을 두고 가면-]

 “닥쳐. 우리 스파이디는 그런 남자가-”

 (명함 꼭 쥐는 자태 보소.)

 “닥쳐, 닥치라고! 우리 스파이디는!”

 - 이번에는 명함 잃어버리지 마요, ‘스파이더맨’

 (……피터가 스파이더맨인 것도 아나 본데.)

 [우리가 그걸 알아내는 데까지 얼마나 걸렸지? 아니, 피터가 우리한테 그걸 말해주는 데까지-]

 “닥쳐.”


  웨이드의 일갈에도 두 박스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자신의 말은 뒷집 개 개풀 뜯어먹는다는 소리 취급하는 두 박스에게 지친 웨이드는, 그 둘을 닦달 하는 대신 세탁물 바구니를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했지만, 지난번 세탁물에서 떨어졌던 그 명함이나 방금 영상으로 본 명함과 같이 생긴 것은 나오지 않았고, 쓰레기통에서도 명함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을 즈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피터가 집으로 들어섰다.


 “웨이드, 나 왔- 쓰레기는 왜 뒤져요? 세탁 바구니는 또 왜 이러고, 어휴.”


 한숨을 내쉬며 정리하는 피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리법석을 떨기 시작한 박스들과 달리 몇 번이고 달싹이는 입술을 끝끝내 다문 웨이드는 통상적인 인사나 너스레로 피터를 욕실로 들여보내고 나서야 소파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피터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망설이고 망설이다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우산_Ailema]


 간단히 검색되어져 나온 이름에 새어나오려던 웃음을 참은 웨이드는, 그깟 우산쯤은 다시 만들어주면 그만이라며, 여전히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두 박스들은 무시한 채로 전화번호를 지운 뒤에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니, 갔어야만 했다.


 수차례 배신당했던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가며 웨이드를 들들 볶는 박스들은 별 일 아닐 거라는 웨이드의 말에 그렇다면 더더욱 물어봐도 상관이 없지 않느냔 말과 진짜 별 일이 아니라면 왜 우산에 대해서 그 때 피터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로 웨이드를 흔들기 시작했고, 평소라면 그저, 일이 많았겠거니 했을 평소보다 늦은 피터의 귀가나, 웨이드를 피해 받는 전화면 어벤져스 일이겠거니 했던 피터의 모든 통화들은 이내 의심의 근거로 바뀌어갔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평범하다 생각했던 여자의 외모는 심사가 뒤틀린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탈바꿈 되어 갔고,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는 것 같았던 머리칼은, 아주 오래전 읽었던 동화 속 사과를 먹고 쓰러졌다 왕자님을 만났다는 어느 공주의 흑단 같은 색으로, 고화질 영상 속에서 동양인 특유의 색이었던 그저 그런 피부색 또한 어느 새 매력적인 피부색으로 변해 있었다.


 - 제 남자친구 이름이에요.

 - 제 남자친구 이름이에요.

 - 제-

 [제발. 자학도 그 정도면 병이야.]

 “우리가 갖고 있지 않았던 병이라도 있었나.”

 (아마 없을 걸? 아, 자궁암? 유방암? 또 뭐가 있지-)

 “난 영원히 저렇게 될 수 없을 거야, 안 그래? 영원히, 이렇겠지. 영원히.”

 (내가 여간해선 이런 소리 안 하는데, 너 좀 미친 거 같아.)


 키득거리며 내뱉은 노란 박스의 말은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에 꽂혔고,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어 펄쩍 뛰는 것 같아 보이던 연인의 반응은, 어느 새 바람 필 것이 두려워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가까워 보인 지 오래였다.


 “내가, 안, 미친 적도 있었나.”

 [그래도 그건 좀 삼가는 게 좋을 걸. 간당간당한 관계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일단 그 총은- 젠장.]

 (데스 얼굴이나 보고 오자고!)


 싸구려 총알로 얻을 수 있는 평안은 찰나에 불과했고, 엉망이 된 컴퓨터 책상 앞에서 깨어난 웨이드는 홀로 연속 재생을 해 이제는 언제 봤는지도 모를 스파이더맨 영상에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터는, 아직도 집에 오지 않은 채였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오는 것은 금세 끝이 났고, 하루가 멀다하고 거실 바닥을, 침실을, 부엌을, 욕실을 피바다로 만드는 웨이드에 입을 꾹 다문 피터와의 일상은, 또 다시 장마가 시작된 날에서야 끝이 났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피터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앉아있다 장미꽃에 시선이 닿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면, 우산이라곤 자신이 준 것 밖에 없는 피터가 비를 맞을 거란 생각에 뛰어 내려가지 말았어야 했다. 여전히 징그럽도록 싱그러운 얼굴로 웃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그의 상상보다 훨씬 피터와 어울려보였고, 그 사이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두 개는 계단 층계참에 닿을락 말락 하고 있었고, 빗소리에 파묻힌 대화는 그의 귓가에 닿아오지 않았지만 두 박스나 웨이드나 더 이상 자학을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엔 의견을 같이 했고, 끝끝내 그는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속으로 삼킨 채 짐을 정리한 뒤 집 밖으로 나섰다.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고, 뉴욕은 더 이상 그의 도시가 아니었다.


키워드_의심, Opener 8mm


+) 그냥 쓰는 캐릭터 설정.


두 여자 캐릭터는 쌍둥이.


- Ailema Honey Smith 아일레마 허니 스미스

 모든 것의 역사를 볼 수 있음 (무생물 포함)

 원하는 대로 이뤄짐

 사학자 : 역사란 승자의 기록.

 귀찮은 거 질색

 그렇다고 세상이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어머니 유언이 조용히 살라는 거였음


- Esor Seno Smith 에소르 세노 스미스 / 피터가 처음 마주친 여자는 이쪽.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능력이 없는 대신 미래를 볼 수 있음 ; 언니는 모르는 상태

 정신공격 및 아일레마는 에소르의 역사를 못 봄

 언론인

 아일레마를 싫어하는 편

 방관자로서의 삶도 극혐.

 힘이 있다면 사용하는 것이 인지상정.

 -> 회의주의자. 권선징악, 절대적 선이나 정의에 대한 불신.

 취미 : 점 봐주기 (블로그 운영 중)

  

#_부모 ; 교통사고로 사망


- 어머니 : Honey Amelia Smith

 원하는 대로 이뤄짐

 역사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다 오래 전부터 하지 않음

 (항상 옳은 선택이 옳은 결과를 불러오진 않아서)


- 아버지 : Seno Joshua Smith

 모든 것의 역사를 볼 수 있음

 철저한 방관자로서의 삶

 절대로 나서지 않고 숨은 조력자 정도

 역사엔 주관이 주입될 수 없으며 철저한 기록만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편.


- 왜 스파이더맨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데드풀이 점 보러 왔었음

 제 연인과 잘 될까요?


- 저러고 나서 늘 희망을 갖고 일하는 피터에 비틀린 애정 때문에 피터가 얼마나 버틸지 궁금해서 서서히 피 말려 죽여가는 거 보고 싶었...

- 굳이 언니를 개입시킨 건 넌 과거뿐이 못 보지 병신아! 이런 마인드.

  



' > 덷거미덷'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는 내 운명 ㅋㅋㅋㅋ  (0) 2016.08.18
Rumour has it.  (0) 2016.08.18
권태기 속박 키워드로.  (1) 2016.06.27
이상과 현실 사이  (0) 2016.06.23
뒤늦게 깨달은 웨이드로.  (0) 2016.06.02
Posted by Spideypool

- 쓰면서 들은 노래


- 약 고어. 집착


01.


 비는 언젠가 그치기 마련이었고, 젖은 땅은 언젠가 마르기 마련이었다.



02.


 사랑 또한 마찬가지로 언젠간 그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03.


 절절하게 사랑을 외치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그렇게.



04.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가 그런 끝을 맞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그 끝을 고하는 건, 마음이 식은 연인이 아니라 시간이기도 했고 때로는-



05.


 난 더 이상 이런 삶을 살 수 없어, 달링.



06.


 작별을 고하는 연인의 목소리엔 후련함이 묻어있었고, 마치 자신의 각오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다그침에도 고수하기 일수이던 마스크는 벗겨진 채였다. 눈썹조차 찾아보기 힘든 눈두덩 아래에서 퍼렇게 빛을 발하는 눈은, 그의 연인이 마지막 남은 타코를 사수할 때면 그러했듯, 무너져내린 눈꺼풀을 고집스럽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07.


 난 바른 생활 사나이가 아니야. 그건 자기도 알지?



08.


 동의를 구할 생각도 없는 말을 내뱉은 입술은 그가 무슨 대꾸를 하기도 전에 다시 벌어졌고, 소리 없이 입을 뻐끔인 그는, 다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09.


 그는, 일단은 제 연인의 말을 다 들어줄 참이었다.



10.


 자르고 썰고, 날려버리는 게 내 일이라고. 때로는 돈도, 의뢰인도 개의치 않고 내 좃대로 하는 게 내 삶이었단 말이야. 그게 자기를 만나고 나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어. 이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니까. 내가 마치, 그래! 마치, 자기의 수많은 클론 중 하나가 되어버린 느낌이라고!



11.


 눈썹이 있었다면 치켜 올라갔을 위치의 근육은 말과 함께 위로 솟구쳐 올랐고, 마스크를 뒤집어 쓴 그의 연인은 이미 싸놓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12.


 잘 있어, 허니. 부디 몸 간수-



13.


 는 본인이 해야 하지 않을까요, 웨이드?



14.


 거미줄에 발이 묶여버린 제 연인이 멈칫하는 모습을 본 그는 생긋 웃으며 얼굴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를 벗겼다. 결국 무너져버린 눈꺼풀이 한쪽 눈을 덮고 있었고, 한껏 올라온 종양들이 마스크에 짓뭉개져 엉망인 얼굴에 입을 맞춘 그는 여전히 가방끈을 잡고 있는 손을 비틀어 내리며 축축한 피부에 닿아있던 입술을 떼었다.



15.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은데-



16.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평소에도 말이 많던 제 연인의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본 그가 다시 거미줄로 입을 막았고, 다른 손에 붙잡혀 있던 손목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17.


 내가 당신을 붙잡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더라면 착각이에요, 웨이드.



18.


 연인이 제 짐인줄 알고 챙겨든 가방의 지퍼를 열어 쇠로 된 목걸이를 꺼내 목에 채운 그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다정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여전히 땅에 붙어있는 연인의 다리를 차 부러뜨렸다.



19.


 깔끔하게 정돈된 거실 바닥 한구석에 미리 준비되어있던 고리에 목걸이에 달린 쇠스랑의 끝의 고리를 벌려 간단히 연결시킨 그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널부러져 있는 제 연인의 손을 잡아 입을 맞췄다.



20.


 난,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게 아니라, 하지 않았던 것뿐이거든요.

' > 덷거미덷' 카테고리의 다른 글

Rumour has it.  (0) 2016.08.18
Long live the Queen.  (0) 2016.07.22
이상과 현실 사이  (0) 2016.06.23
뒤늦게 깨달은 웨이드로.  (0) 2016.06.02
피터른, 데드풀 전력 60분 합쳐서 꿈/평행세계  (0) 2016.05.30
Posted by Spideypool

- 쓰면서 들은 노래




Chapter One_그 남자의 은밀한 사생활


01.


 그는, 인간을 사랑했다.


 인간인 그가 새삼스레 그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우습게 들릴지는 몰라도 그 남자는, 인간이란 종족을 사랑했다.


 그는, 인간의 악함을 사랑했고, 선함을 사랑했고, 나약함과 강인함, 그 모든 것을 사랑했다.



02.


 단 하나, 그가 인간이란 종족에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 끝없는 오만과 자만심이었을 텐데, 그는 그 모든 것을 나약함이란 항목에 합류시켜버림으로써 온전히 인간을 사랑하게 된 지 오래였다.



03.


 그가 볼 때 인간은 세 부류로 나눠졌다.


 보편적 가치의 선함을 추구하는 인간.

 보편적 가치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만의 가치를 위해 나머지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 인간.



04.


 그의 기준에 있어서 그 세 부류의 인간들은 때때로 두 부류에 걸쳐져 있기도 했고, 때때로는 한 부류에 종속된 채 살아갔지만, 그게 어떤 인간이건 간에 그에게 있어 더 나쁜 인간이나 더 좋은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그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인간과 지루하기만한 인간, 두 종류로 나뉠 뿐이었다.



05.


 그런 의미에서 피터 벤자민 파커, 이른바 스파이더맨은 그에게 있어 아주 흥미로운 인간인 축에 속했다.



06.


 그가 볼 때 피터 벤자민 파커, 그러니까 스파이더맨은 얼핏 보면 첫 번째 부류에 속하는 듯 했지만 첫 번째 부류에 속하기엔 이미 정해져 있는 시스템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번째 부류에 속하기도 했고, 첫 번째 부류처럼 보이게 하는 자신만의 가치를 위해 싸운다는 점에 있어선 세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07.


 그는, 늘상 세속의 것들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 에 거리를 둔 채 기록자로서의 삶을 사는 편을 즐기는 편이었고 그래서 이번에도 흥미로운 관찰 상대에 손을 대지 않은 채 거리를 둘 참이었다.



08.


 그는, 자신의 관찰 상대에 따르는 불운을 환영하곤 했다. 불운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그의 관찰 상대를 따라다니는 그 정체불명의 검은 그림자는 관찰 상대의 인생을 더 이상 비틀 기도 힘들 정도로 꼬아놨고, 그 때마다 정작 거미란 이름을 가진 자가 거미줄에 걸린 채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 애쓰는 벌레의 꼴을 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09.


 그랬기에 그는, 어느 샌가 바뀐 역사 속에서 행운과 재물의 상징이란 딱지가 붙어버린 관찰 상대를 보는 일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중이었다.



10.


 그래서 그는, 난생처음으로 손에 들었던 펜을 내려놓고 오랫동안 벽에 기대어 놓았던 지팡이를 들고 방 밖으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 > 스파이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터 파커, 꿈으로.  (0) 2016.06.02
the Fall 15  (9) 2016.05.11
the Fall 14  (0) 2016.05.11
the Fall 13  (2) 2016.05.11
the Fall 12  (0) 2016.05.11
Posted by Spideypool

-쓰면서 들은 노래

https://youtu.be/wlDEC0Ln4vI

https://youtu.be/LkE5OjjHaCg

https://youtu.be/zbAyUEaz370


 네 모든 걸 내게 줘.


 네가 이 땅 위에서 숨 쉬는 그 모든 날들,


 그리고


 네가 이 땅 위에서 더 이상 숨 쉬지 않을 그 모든 날들까지도.




덷거미덷 Abeliophyllum 단편.

 이상과 현실 사이.



Chapter 01. Greeting


 그는, 반복되는 시계(視界) 속에서 무언갈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기 전에 그 무언가는 익숙한 거리 속으로 숨어들어갔고, 이내 짙은 색의 음료에 빠진 이물질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그럼에도 입안을 감도는 껄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았고, 평소처럼 정해진 정류장에서 내린 그는, 온통 회색으로 범벅이 된 거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침부터 내리던 소낙비는 어느 새 그쳐 있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 뒤에서 언제고 고개 내밀 준비가 되어있던 태양은, 비가 발걸음을 물리기가 무섭게 회색의 장막이 걷힌, 푸르기만 한 그 하늘 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은 빗방울이 완전히 마르지 않은 우산을 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바쁘게 걸어가던 피터의 발걸음을 멈춘 것은, 최근 들어 잦아진 빗물 덕에 보도블록 틈새 사이로 고개를 내민 들꽃이었다. 이름조차 모를 그 들꽃은 도시가 선사한 아주 자그마한 자비에도 제 온 힘을 다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잎을 펼친 끝에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고, 아직은 축축한 아스팔트는 언제까지나 그 여린 꽃에게 자신의 틈을 내어줄 것마냥 무르디 무른 색으로 물든 채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태양 아래에서 바싹 메말라 가고 있었다. 하마터면 자신의 발에 밟힐 뻔한 들꽃은 여전히 그 짧고 알량한 줄기 끝에 매달린 채 하늘거리고 있었고, 제각기 자신들의 앞길 보기에 바쁜 사람들의 시선은 그 꽃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 들꽃을 막고 선 자신이 떠나고 나면 언제 밟혀 짓이겨져도 이상치 않을 그 꽃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 피터는, 제 알바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힘겹게 발걸음을 띄었고,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을 머금은 채 휘청이고 있던 들꽃은, 여전히 희디 흰 꽃잎들을 자랑스레 펼쳐놓은 채 멀어져 갔다.


 피터가 다른 곳보다 조금 후한 월급에 혹해 선택한 타코 가게는 다른 음식점들과 마찬가지로 대로변에 위치해 있었고, 어느 새 시야에 들어온 화려한 간판에 절로 움츠러든 어깨를 애써 편 피터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외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퇴근 시간의 타코 가게는 적당히 바빴다. 피터는, 첫 근무를 시작하고 한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다른 곳보다 조금 더 후했던 월급이 하는 일에 비하면 결코 후한 편이 아니란 사실을 금세 깨달았고, 타코 가게에서 일하지 않았더라면 평생 맛보기는커녕 들어보지도 못했을 식재료에 서서히 익숙해져 갔다.


 알바를 시작하고 장장 6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알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피터는 최근엔 자주 오는 손님 얼굴과 추가 주문을 거즌 외운 채였고, 그랬기에 얼굴을 다 가린 채로 계산대에 와서 다짜고짜 평소 먹던 걸로 10개를 달라는 사내의 주문은, 피터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네?”

 “평소에 먹던 걸로, 10개.”


 피터의 되물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답한 사내는 바닥 쪽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고, 후드 집업 모자에 눌린 검은 모자의 챙 아래에 드러난 얼굴을 본 피터는 숨을 들이쉰 뒤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엉망으로 구겨졌을 피터의 얼굴을 한참이나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던 사내는 이내 모자챙을 손으로 잡아 눌러 더 깊숙이 모자를 쓴 채 계산대에서 멀어졌고, 뒤늦게 피터가 계산대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것을 멀리서 발견한 매니저가 계산대를 향해 뛰어왔지만, 사내는 이미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후였다.


 종종 와서 대량 주문을 하는 손님이라는 매니저의 설명을 듣던 피터는 방금 전 봤던 사내의 얼굴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멍한 얼굴로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매니저가 어느 덧 한산해지기 시작한 가게 안을 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여자 손님은 이틀에 한 번꼴로 오시는 분인데 소스 맛만 조금 바뀌어도 알아채고 시비를 트고 무슨 가게 골수 단골처럼 굴지만 실제로 오기 시작한 건 6개월이 조금 안 됐고, 저 쪽 테이블에 앉은 저 둘은, 너도 알다시피 네가 알바를 시작하고 나서 자주 들르기 시작한 사람들이고, 그 외에도 우리 가게 단골이야 무수히 많지. 그리고 까탈스러운 손님들도 수두룩하고 말이야. 거기다 여긴 뉴욕이라고. 패션? 말할 것도 없지. 깔끔한 겉모습으로는 이 미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도시라고. 하지만 핏, 내가 장담하건대 내가 아는 한 여기 들렀던 모든 단골들 중에 으뜸은 아까 그 손님만한 분은 없었어.”

 “단골이요?”

 “뭐, 이상하게 요새 발걸음이 뜸하긴 했지만, 단골이야. 그 전엔 진짜 미친 듯이 타코만 사가서 우리가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우스꽝스럽게 눈썹을 찌그러트린 매니저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손님들이 엉망으로 쟁반을 반납하고 간 픽업대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잠시 빈 계산대를 쳐다보며 고민하던 피터도 매니저의 곁으로 가 선임이 건넨 쟁반을 닦기 시작했다.


 “때는 5년 전 여름이었지. 내가 처음 알바를 시작했을 때였는데, 너는 모르겠지만 그 때 우리 매장 매니저가 미친 개였거든? 난 막 들어온 신입이었고, 넌 진짜 지금 매니저가 나인 거에 감사해야 돼. 나도 그 때 저 사람 보고 굳어서 딱 너처럼 굴었는데, 그 때 그 매니저가-”


 한참 흥분을 해 말을 잇던 매니저는 언제 왔을지 모를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손님을 발견하곤 피터에게 쟁반을 넘긴 뒤 계산이 끝남과 동시에 타코 주문지를 주방에 넘겨준 뒤 다시 피터에게 와 이번엔 자기가 쟁반을 받아 닦기 시작했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피터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을 이었다.


 “여튼 대차게 까일 위기였는데 그 때 딱 끼어들어서 구해준 게 바로 그 손님이었어. 생긴 건 무슨 호러 무비 살인마처럼 생겼는데, 솔직히 그렇잖아. 여튼, 목소리가 얼마나 친절하던지, 진짜 눈물 날 뻔 했다니까.”


 고개까지 저어가며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을 해보인 매니저가 피터를 향해 비죽 웃어보였고,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은 피터는 마지막 쟁반을 그에게 넘긴 뒤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물론,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다음에 오면 그냥 딱 보통 손님들 대하듯 해줘. 그 손님이 평소에 먹는 주문은 내가 이따가 알려줄게.”


 어깨를 으쓱인 매니저가 피터의 어깨를 두어번 다독인 후 주방에서 나온 쟁반을 받아 서빙하기 위해 테이블들 너머로 멀어져갔고, 매니저의 말을 곱씹던 피터는 때마침 온 손님을 받기 위해 계산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Chapter 02. Happy Ending


 [니가 생각하는 해피 엔딩은 뭔데?]


 사내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고, 머리칼을 넘기는 손길은 너무나도 부드러워서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들 것 같은 기분에 눈을 반쯤 감은 그는 자꾸만 늘어지는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애썼다.


 [당신이랑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거.]


 낮은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고, 아까 전부터 그의 등을 다독이던 손길은 그에게 잠들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나랑?]


 어딘가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말없이 올라간 입꼬리에 와 닿은 거친 손가락을 잡은 그는 조용히 그 손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댔다.


 [이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당신이 내 곁에 있고, 내가 당신 곁에 있었다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그게 해피 엔딩이 아닐까.]


 잠에 빠져든 귀는 웅얼거리듯 들리는 목소리에 담긴 단어를 헤아리는 것을 거부했고, 사내의 손을 붙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박동은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학생! 종점이야!”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었던 탓에 손님으로 넘쳐났던 가게에서 혹사당한 몸은 잠깐의 휴식을 놓지 못한 채 그를 수마로 이끌어갔고, 버스 창밖으로 늘어선 버스들에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서둘러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피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막차조차 끊긴 것은 물론 부재중 통화 옆에 찍힌 꽤나 많은 숫자에 혀를 찬 피터는 숙모에게 상황 설명이나 할 요량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고, 이내 연속해서 자동 응답으로 넘어가는 전화에 아마 숙모도 잠들었겠거니 하며 집을 향한 발걸음을 서둘렀다.


 잠깐의 휴식이 줬던 안락함이나 어딘가 씁쓸했던 꿈의 여운은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 이후로 사라진 지 오래였고, 잠시간 스스로가 무슨 꿈을 꾸었던가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느닺없이 울린 핸드폰에 잡생각을 떨궈야만 했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해온 것은 그의 오랜 친구인 MJ였고,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그녀는 진정하고 말을 해보라는 그의 다그침에 숙모가 집에 홀로 있다 괴한의 습격을 받았고, 지금 병원 응급실에 있으며 아주 위급한 상황이란 사실을 알려왔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MJ가 말한 병원으로 돌린 그는 텅 빈 대로변 곁에 서서 혹시나 올지 모르는 택시를 기다리는 대신 뛰어가는 길을 택했고, 그 사이에도 그의 핸드폰은 수없이 울렸다.


 흰 색으로 점철된 병원은 오만가지 이유로 병원을 찾은 사람들의 흐느낌, 절규로 가득 차 있었고, 콧속을 파고드는 알싸한 향에 몸을 떨며 숨을 고른 그는, 새빨간 색으로 쓰여있는 안내표지를 따라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로 들어서자마자 붉은 머리부터 찾은 그는 온갖 기계줄을 매단 채 잠들어 있는 숙모 위로 엎어져 있는 친구를 일으켜 집으로 보낸 후에야 숙모를 처음 봤다는 응급실 의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의사의 말은 단순 명료했다. 


 복부에 딱 두 발. 그게 다였다. 딱 죽지 않을 위치를 겨냥하고 쏜 총알들은 숙모를 정확히 죽지 않을 만큼 위급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고 아마 범인이 건 전화가 아니었더라면 그날따라 늦은 피터가 집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을 거라는 것.


 피터의 손을 감싸쥘 대면 늘 온기가 흘러넘치던 손은 파리해진 채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MJ의 성화에도 고수하는 백발은 땀에 젖은 채 베개에 흩어져 있었고, 굳게 다물린 입술 위에 덮어진 산소마스크는 일정한 박자로 습기에 젖어 흐릿해졌다 투명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사회보장번호와 보험을 물으러 온 간호사 앞에서 절절매던 피터는 이내 그가 집안 재정 상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에 입술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고, 사무적인 태도로 건네진 영수증에 적힌 금액과 자신의 계좌에 남은 돈을 대조해보다 이내 깊은 절망감에 휩싸인 채 대기실 의자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그리고, 피터의 핸드폰이 다시 울린 건 바로 그 때였다.


 다급한 목소리로 무어라 외치던 통화는 비명과 함께 끝이 났고,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본 피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다시 자신의 자리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그는, 뉴욕시에 그토록 많은 히어로들과 달리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고, 그의 연인의 비명과 함께 통화가 끝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신고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가 핸드폰 화면을 다시 열었을 때 진동음과 함께 화면에 MJ의 엄마의 번호가 떴고, 그가 잠시 망설이는 사이 전화는 끊겼다.


 또 다시 늘어난 부재중 통화 앞에 그가 갈팡질팡 하고 있는 사이 다시 짧게 울린 핸드폰은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려왔고,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열람한 그는 다정스레 숙모의 현재 상태를 묻는 글자들 끝에 달린 물음에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근데 핏, MJ가 도착할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혹시 나랑 통화하고 다시 병원에 있기로 한 거니? 그런 거면 전화 좀 해달라고 할래? 이 녀석이 통 전화를 안 받는 구나.]


 섬뜩한 문구에 그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있을 때 요란스레 울리며 들어온 앰뷸런스 두 대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을 쳐다보던 그는, 천천히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이동 침대 중 하나엔 비명과 함께 전화가 끊겼던 그의 연인이, 나머지 하나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도 병원에 있겠다며 고집을 부렸던 그의 친구가 누워있었다.




Chapter 03. Suspect


 온통 은회색으로 이뤄진 벽을 따라 움직이던 피터의 시선은 전면이 거울로 된 곳에 이르러서야 멈춰 섰고, 그 때까지 그를 말없이 쳐다보던 수사관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네, 저기 너머에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은 범인을 잡는 게 급선무겠죠, 안 그래요?”


 조금은 지친 듯한 기색으로 서류철에 든 사진을 넘겨 살피던 수사관은 여전히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피터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한참만에야 거울에서 시선을 뗀 피터는 여전히 서류철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수사관에게 물었다.


 “제가 뭘 말해줘야 되죠?”

 “원한 관계 같은 거죠, 뭐. 의사가 말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셋 다 정확히 같은 부위에 같은 종류의 총알을 두 발씩 맞고 왔어요. 그것도 하룻밤에. 셋의 공통점이라곤 댁밖에 없고요. 사실, 평범한 보복 범죄와는 좀 다른 양상이긴 한데-”

 “좀, 다른 양상이라고요?”

 “그 정도 실력이라면 충분히 죽일 수도 있는데 굳이 죽이지도 않고 병원에 신고까지 했다는 점이 좀 다르네요, 피터 벤자민 파커씨.”


 귀찮은 어조로 말을 잇던 수사관은 자신을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는 피터를 향해 혀를 찼고, 슬슬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피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거울처럼 보이던 벽이 갈라지며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사내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 정도로 해두는 게 좋겠군. 우린 지금 범인을 심문하는 게 아니질 않나. 그리고 설사 용의자더라도 그렇게 심문하고 있다면 고치는 게 좋겠군. 모든 용의자는-”

 “일단은 무죄라는 가정 하에 심문해야 한다 이거죠? 나 참, 그건 당신이나 가능한 거죠, 캡틴.”

 “그러니까, 바른 생활 캡틴 아메리카 말고 누가 그렇게 원리 원칙에 철저할 수 있겠어, 안 그래? 그것도 하룻밤에 아름다운 여인 셋이 습격을 당한 판에 말이야.”


 캡틴이라 불린 사내의 뒤를 이어 들어온 사람은 토니 스타크였고, 토니 스타크를 보고서야 단정한 인상의 사내가 누군지 깨달은 피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귀찮은 듯 수사관을 밖으로 내보낸 토니가 피터의 맞은편에 하나 놓여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래서, 진짜 원한 관계 같은 건 없어? 아니면 뭐 숨겨놓은 돈이라던가.”


 건들거리는 듯한 태도와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나 눈매에서 분노를 읽은 피터가 그의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저었고, 낮게 침음을 뱉은 캡틴 아메리카가 책상 위에 덮인 채 놓여있던 서류철을 뒤져 크게 인쇄된 감시 카메라 영상 사진을 피터 앞으로 내밀었다.


 “이 자가 일단은 용의자일세.”


 여느 범죄자와 마찬가지로 온 몸을 검은 옷으로 감춘 범죄자는 감시 카메라의 위치조차도 잘 알고 있었던 듯 감시 카메라에 등을 돌린 채였고, 아마도 피터를 배려한 듯 인쇄물 속엔 MJ나 그웬이 잘린 상태였다.


 “있지, 이건 우리 사정상 비밀인데 내 데이터 베이스엔 모든 미국 거주자 데이터가 축적이 되어 있단 말이야. 그냥 단순히 사회보장서비스 번호 정도가 아니라 얼굴, 체형, 기타 등등의 정보가 다 등록되어 있다고. 혹시 오해할까봐 말하는 건데 나도 빌런 추적할 때 빼곤 열어보지도 못하는 정보야. 알다시피-”


 말을 거기서 끊은 토니 스타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캡틴 아메리카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다음 어깨를 으쓱인 뒤에 여전히 피터의 시선이 박혀있는 인쇄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근데 웃기게도 이 인간은 그 데이터베이스에 없어. 그러니까 셋 중 하나라는 소리지. 미국에 불법 입국한 놈이던가, 아니면 내 데이터베이스를 털 정도로 뛰어난 놈이던가, 그냥 신종 빌런이던가. 하지만 분명한 건 어쨌거나 이건 우리 소관이라는 거고.”

 “일단 그웬 스테이시양과 자네 친구, 그리고 숙모님은 스타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옮겼네. 사람들을 지키는 게 우리 일인데 그걸 제대로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 우리 책임이질 않겠나.”

 “하지만-”

 “돈이라면 걱정하지 마. 어디까지나 보상 차원에서 하는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도 없고. 일단 급선무는 이 자식을 잡는 건데, 그래서 협조 요청을 하러 온 거야.”

 “협조 요청이요?”


 뜬금없는 협조 요청에 피터가 의아한 어조로 물었고, 어리둥절한 표정의 피터를 잠시 뚫어져라 쳐다보던 토니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여전히 자신의 곁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캡틴 아메리카를 쿡쿡 찔렀고, 그제야 토니와 마찬가지로 한숨을 내쉰 캡틴 아메리카가 피터에게 대답했다.


 “우리와 함께 스타크 타워로 가주겠나? 자네 뇌를 스캔해서 그 범인 정보를 찾을 걸세. 어쨌거나 우리가 가진 마지막 단서가 자네라서 말일세. 물론, 꺼려지기야 하겠지만-”

 “가죠.”

 “뭐?”

 “캡틴 아메리카랑 아이언맨이잖아요. 미국을 두 지키는 두 영웅의 말이라면 믿어야죠.”


 피터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던 토니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고 그런 피터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던 캡틴 아메리카가 피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일세. 그냥 스티브라고 불러도 되네.”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에 잠시 망설이던 피터는 이내 캡틴 아메리카가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뒤늦게 캡틴 아메리카의 손을 마주 잡았고, 내가 누군지는 알지, 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 토니가 피터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후에 먼저 방으로 나섰다.




Chapter 04. Coma


 당장 스타크 타워로 피터를 데려갈 것처럼 굴었던 둘은 피터를 스타크 타워로 데려가는 대신 병원에 내려준 뒤 면회가 끝나면 알려달라는 말과 토니의 번호를 남긴 뒤 자리를 떴고, 얼결에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셋이 같이 입원해 있다는 병실 앞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문고리를 돌렸다.


 옅은 하늘빛으로 색을 칠한 병실은 여느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조금 우습기는 해도 그 인테리어 탓에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피터는 세 침대가 제멋대로 놓여진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메이 숙모는 물론이고 나머지 둘조차도 전에 본 적 없이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있기는 해도 한결 안정된 모습으로 숨을 쉬고 있었고, 일정한 박자를 유지한 채 선을 긋고 있는 바이탈 사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피터는 메이 숙모 침대 옆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아 눈을 붙였다.


 [피터.]


 어둠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익숙했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읊조리고 있었다.


 [난, 처음 널 봤던 날은 기억하지 못해. 그런 로맨틱한 말을 하겠다고 거짓말 하는 게 내 전문이긴 하지만, 지금 그런 짓을 해본들 무엇하겠어? 네가 웃어주지도 못할 텐데.]


 멀리서 들리는 음악이 그러하듯 그의 귓가를 맴도는 듯 하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쓴맛은 그의 혀를 휘어 감기 시작했고, 그가 인상을 찌푸릴 때쯤 모습을 감췄다.


 [그러니까, 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널 되찾아 올 거야. 설령 그로 인해 네가 날 혐오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난-]


 그 뒤로 더 이어질 듯했던 말들은 요란하게 울린 핸드폰 소리에 자취를 감춰버렸고, 갑작스런 소음에 눈을 뜨고 나서도 한참을 눈을 껌벅이던 피터는 벨소리가 끝나고서도 켜져 있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나서야 오늘 근무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있단 사실을 깨닫곤 놀라 화면에 떠 있는 부재중 통화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평소 성실하게 근무했던 피터의 별다른 설명 없는, 집에 일이 생겨 한동안 출근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에 쉽게 수긍한 선임은 그에게 가게 걱정은 하지 말고 일보고 오라는 말을 남긴 뒤 전화를 끊었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피터는 여전히 잠자는 것처럼 보이는 메이 숙모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병실 밖으로 나섰다.


 전화를 남기라고 한 뒤 떠나놓고 바로 조치를 취한 건지, 병원 앞엔 이미 까만 색 승용차가 대기 중이었고, 차를 타란 말 외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기사의 뒤통수를 잠시 쳐다보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피터는 높다랗게 솟은 건물들 위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하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름의 하늘이란 변덕스러워서, 아침에 경찰서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은 어느 새 회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 같은 하늘에 우산이 없단 사실을 깨닫고 피터가 한숨을 내쉴 때쯤 차가 멈춰 섰다.


 자신을 프라이데이라고 소개한 안드로이드봇은 같이 따라다닐 거란 생각과 달리 피터를 홀로 엘리베이터에 태운 후 그대로 사라졌고, 외벽이 투명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캡틴 아메리카의 내밀어진 손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기시감에 신음소리를 낸 피터는 때마침 멈춰선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피터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 건물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마주친 로봇과 똑같이 생긴 로봇이 소리 없이 그에게 다가와 목례를 한 뒤 그대로 그의 앞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로봇을 따라 아무 생각 없이 걷던 피터는 로봇이 옆으로 비켜선 후에야 자신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깨닫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피터가 올 때까지만 해도 누군가와 열띤 토론을 하고 있던 토니는 피터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공중에 떠 있던 화면을 점멸시켜버린 후 곧장 그에게 뛰어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왜, 나도 이거 하고 싶었다고. 아까야 시간이 없어서 그냥 와버렸지만. 안토니 에드워드 스타크. 토니라고 불러. 넌 피터 벤자민 파커 맞지? 알바 하는 가게에 연락한다는 게 깜빡해서 나중에 연락했더니 이미 안다고 하더라고. 자, 그럼 일단 여기 앉으시고.”


 수선스럽게 빠른 속도로 말을 이은 토니는 피터를 긴 의자에 앉힌 후 머리에 팁 두 개를 붙인 뒤 모니터를 조작하기 시작했고, 삐빅거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긴장한 얼굴로 회색 천장에 시선을 올린 피터는 천장 위로 뜬 자신의 방 모습에 기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최소한의 프라이버시 존중이야. 내가 보는 걸 너도 봐야 내가 어디까지 뒤졌는지를 알지, 안 그래?”

 “하지만-”

 “꽤 정신없는 방이네. 오, 저 밴드는 나도 좋아하는 밴든데. 드럼이 예술이지, 안 그래?”


 눈을 찡긋한 토니는 그대로 화면을 빠르게 돌려버렸고, 연달아 에러음을 알리는 기계에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빠른 속도로 돌아가던 화면은 점점 느려지다 피터가 타코 가게에서 일하는 장면에서 정상 속도로 돌아갔고, 자신의 앞에 멈춰선 검은 모자챙에 피터가 멈칫했을 때, 인상을 찌푸린 토니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피터에게 물었다.


 “저 남자 알아?”

 “어,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고요. 저희 가게 단골손님이라는 건 아는데요.”

 “그게 다야?”

 “네.”


 피터의 대답에 다시 얼굴을 구긴 토니가 피터를 내버려둔 채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정상 속도로 돌아가는 화면 속에서 사내가 모습을 감춘 시점에서부터 다시 빠르게 돌아가는 화면에 고개를 저은 피터는 머리에 붙은 팁을 떼어낸 후 여전히 에러음을 울리고 있는 기계로 걸어갔다.


 [Coma]


 “아직 시제품이 아니라서 그래. 가끔은 토니 스타크 머리로도 해결이 안 되는 부분이 있거든.”


 어느 새 돌아온 토니는 화면을 꺼버린 채 피터에게 종이 뭉치를 건넸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종이를 받아든 피터는 종이 뭉치 가장 앞에 있는 남자의 프로필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나도 니가 무슨 기분인지 알아. 유령 본 느낌이겠지, 안 그래? 범인이 오래 전에 죽은 캐나다 용병이라니.”


 어깨를 으쓱인 토니는 피터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 뭉치들을 휙휙 넘기더니 특정 페이지를 펴주었고, 온통 뒷모습뿐인 사진들에 피터가 신음 소리를 내자 한숨을 내쉰 뒤 다시 종이 뭉치를 가지고 가버렸다.


 “우선은 당분간 병원에만 있도록 해. 물론 네 숙모나 그 두 여성분이 위험해졌을 경우 곁을 지켜야 되는 것도 있긴 하지만 그나마 네 집보다는 안전할 테니까. 이 살인미수범이 다음엔 널 노리지 말란 법도 없으니까.”


 경고조로 말한 토니는 어느 새 안에 들어와 피터의 곁에 서 있던 로봇에 눈짓을 했고, 로봇이 천천히 움직여 문 쪽으로 가는 걸 본 피터는 토니의 손에 들려있는 종이 뭉치를 잠시 응시하다 피터에게 대충 손을 흔들고 다시 꺼진 모니터를 켜서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한 토니 등에 인사를 남긴 후 스타크 타워 밖으로 나왔다.


 로봇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말없이 그를 안내했고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가던 피터는 멀찍이서 보이기 시작한 정문 너머로 비가 쏟아지고 있는 것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자마자 멈춰 선 로봇은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검은 우산을 건넸고,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로봇을 빤히 쳐다보던 피터는 조용히 그 우산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피터의 인사를 받고도 고개만 까닥인 로봇은 말없이 다시 정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정문 앞까지 다다른 피터는 익숙한 검은 차가 대기하고 있음에 피식 웃은 후 우산을 펴들었다.


 비는, 여전히 매끈한 대리석 바닥을 향해 끊임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Chapter 05. the End


 너저분한 아파트에는 발 디딜 틈이 없어보였다. 다른 잡동사니를 둘 틈도 없이 모든 가구 위엔 잡다한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고, 낡아빠진 소파는 딱 두 사람이 앉을 만큼의 공간만을 남겨둔 채 옷가지 따위로 뒤덮인 채였다. 엉망진창인 집의 모습에 피터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의 등 뒤로 갑작스런 기척이 들렸고, 피터가 막 돌아서려 했을 때 다가온 두 손이 그의 두 눈을 가렸다.


 [허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장난스럽게 물은 상대의 손은 그의 눈 위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었고, 간지러움에 그가 웃음을 터트리는 동안에도 어느 새 그의 등 뒤로 움직인 상대는 천천히 그를 어디론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아마도 바닥에 즐비해있었을 잡동사니들이 그의 발에 채여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고, 익숙하게 그 잡동사니들을 걷어차며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 걷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떼어졌다.


 [짜란!]


 얇게 구운 팬케이크들은, 거칠게 발라진 생크림에 덮여 있었고, 그 생크림 위엔,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위태롭게 버티고 선 딸기들이 꽤 정성스럽게 만든 듯 보이는 하트 모양새를 유지한 채 바들거리고 있었다. 새하얀 접시 위에 있는 팬, 케이크, 그러니까 아마도 케이크일 음식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의 등 뒤에 모습을 감춘 상대의 입에서도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설마 까먹은 건 아니지? 우리가 사귄지 10일째 되는 날을 까먹은 게 아니라고 말해줘!]

 [제발, 100일도 아니고 10일이잖아요.]

 [10일을 까먹는데 100일은 까먹지 말란 법이 있어? 오, 피터 파커가 이렇게 불성실하답니다, 여러분! 뉴욕시의 영웅 스파이더맨이 이렇게 연인한테 불성실하다고요! 사랑이 식었어! 식었다고! 저 접시 위의 팬케이크만큼-]

 [제발-]

 “-데드풀.”


 자신이 내뱉은 단어에 저도 놀라 파드득 몸을 일으켰던 피터는 어둠 속에서 메이 숙모의 침대 옆에 서 있는 인영에 놀라 얼른 침대 밖으로 내려섰고, 피터가 몸을 일으켰을 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던 듯 보이던 사내는 그가 무기가 될 법한 걸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고개를 숙여 메이 숙모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침대 옆에 있던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그 동안 링거대를 찾아 손에 쥔 피터가 잔뜩 긴장한 상태로 링거대를 사내에게 겨냥했고, 피터의 모습에 피식 웃은 사내가 침대 옆에 있던 전등을 킨 뒤 입을 열었다.


 “핏. 그걸로는 날 죽일 수 없어.” 

 “그래도 상관없어. 곧 경비들이 올 거야. 여긴 스타크씨 병원이라고.”

 “아, 그랬던가.”


 꿈이라도 꾸는 듯 아련하게 말한 사내는 아예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뒤 고개까지 뒤로 젖혀버린 채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링거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보였고, 바싹 마르기 시작한 입술을 깨문 피터가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차마 죽일 수는 없었거든.”


 평온한 어조로 말한 사내가 내내 다리 위에 얹어놓고 있던 손을 꼼지락 거렸고, 그제야 사내가 총을 들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피터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을 때 사내의 고개가 들렸다.


 “저기 누워있는 MJ는, 조금 떽떽거리기고 자기중심적이긴 해도 너만큼이나 올곧은 여자였고, 그 옆에 누워있는 그웬 스테이시는, 나 같은 인간은 범접할 수도 없는 네 첫사랑이었는데다 그리고 메이 숙모는-”

 “닥쳐!”

 “나한테도 파이를 잘라 주시던 상냥한 분이셨단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죽일 수 있겠어, 안 그래, 핏?”

 “너한테 내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한 적 없어!”


 링거대의 무게가 슬슬 부담스러워진 그의 팔이 후들거리기 시작했고, 사내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이, 자신이 들고 있는 링거대로 향한 것을 본 피터가 뒷걸음질 쳤고, 꼼지락거리던 손을 움직여 총을 장전시킨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나도 많이 물러진 거겠지. 그도 그럴게 내 연인이 스파이더맨이었다고, 빌어먹을 스파이더맨.”


 총신은 어둠 속에 잠겨 눈에 보이지 않았고, 빛을 등진 사내의 눈은 이제 꺼멓게 죽어 있었다.


 “그래도 말이야, 조금은 섭섭했어. 네 환상 속에서 내 비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 그랬다가 이내 수긍했지. 네가 원하는 해피엔딩이라면, 아마 이럴 거라고. 내가 용병짓이나 하다가 그 빌어먹을 암도 없이, 지긋지긋한 힐링 팩터나 타노스의 저주도 없이 죽는 거. 그게 네가 생각한 ‘날’ 위한 해피엔딩일 거라고. 하지만, 피터 벤자민 파커. 이번엔 네가 틀렸어.”


 안정된 속도로 삐빅거리는 소음은 어느 새 네 개로 늘어있었고, 당황한 나머지 사내를 향하고 있던 링거대가 휘청이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로 피터가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사내의 손이 링거대를 잡아왔다.


 “내가 널 만나기 이전이었다면 모를까, 이젠 너 없이는 내 인생의 해피엔딩이라는 건 없다고.”


 거칠게 잡힌 링거대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병실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고, 두 손이 빈 채 떨고 있는 피터의 어깨를 잡은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메이 숙모는 안전하게 잘 지내고 계셔. 저기에 누워있는 건 네 숙모가 아니라고.”


 삐빅거리는 소음은 이제 다시 세 개로 줄어 있었다. 선명하게 귓가에 울리고 있는 하나와, 어느 새 멀찍이로 떨어져버린 두 개로.


 “MJ는, 너랑 헤어진지 오래고. 아, 꿈도 이뤘어. 끝내주는 여배우가 되셨거든.”


 무언가 더 말을 이으려던 사내는 이내 입을 굳게 다물었고, 이제 삐빅거리는 소음은 두 개로 줄어 있었다.


 “그리고, 그웬 스테이시는 오래 전에 죽었어. 그린 고블린이 떨궜는데 네가 잡질 못했거든.”

 “닥쳐!”

 “그게 네 탓은 아니야, 핏. 하지만 죽은 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지.”

 “닥치라고!”


 삐빅거리는 소음은 이제 하나로 줄어있었고, 텅 비어버린 병실은 어느 새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이 하얗게 빈 공간 속에서 사내는 여전히 회색 후드집업 모자와 검은색 챙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였고, 사내의 손에 들린 총이 천천히 들려져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 피터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사내의 손이 그의 뺨을 감싸왔다.


 “그래, 꿈에서 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가 죽는 거지, 안 그래? 하지만, 피터, 허니.”


 사람을 물기 직전의 개가 그러하듯 으르렁거리던 사내의 목소리는 어느 새 차분해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끝을 고할 듯 나직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피터 벤자민 파커를 죽일 수 있겠어. 내 사랑을, 어떻게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겠냐고.”


 천천히 눈을 뜬 피터는, 어느 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사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지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가 총구가 사내의 머리를 향하고 있단 사실에 기겁을 하며 사내의 손을 잡았고,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한테 난 죽어 마땅한 사람 아닌가? 꿈속이긴 해도 난 네 첫사랑을, 네 단짝 친구를, 그리고 메이 숙모를 거의 죽을 지경으로 몰아간 사람이잖아.”

 “죽어 마땅할지는 몰라도,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당신이 잘못했을지 몰라도, 그게 당신이 죽어야 된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제발, 그 총 좀 내려놔요!”

 “피터, 난 자기가 나한테 소리 칠 때가 제일 좋더라.”


 사내가 총을 잡지 않은 손으로 피터의 손을 감쌌고, 피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사내가 비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난 바보 멍청이라 자기를 죽이지 않고 꿈에서 깨울 방법이 이것뿐이 생각나지 않는데 어쩌지.”

 “안 돼요, 안 돼! 데드풀, 제발!”


 내뱉은 단어에 스스로 놀란 피터가 사내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떨어뜨렸고, 당황한 피터가 다시 손을 올리기 전에 한 손으로 피터의 두 손을 결박한 사내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럼 현실에서 봐, 달링.”


 그리고, 공허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Chapter 06.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옅은 하늘빛 천장이었다.


 곧 이어 들린 알람음과 함께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의 온갖 키스와 잔소리, 울음 속에서 눈동자만 굴리던 피터는, 이내 누군가 하나가 빠져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고, 사람들 무리 등 뒤에서 멀찍이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가 손을 뻗기가 무섭게, 그 사람은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사라졌던 데드풀을 피터가 다시 본 건, 그가 깨어나고도 한 달이 지나서였고, 반죽음 상태로 온 데드풀 대신 그가 피터를 그렇게 만든 상대 쪽을 혼자서 털러 갔다는 말을 전한 토니는 피터의 주먹을 맞아야만 했다.


 “나 왔어요, 웨이드.”

 “다시 만나서 반가워, 허니.”


 아직 회복이 덜 된 탓에 입꼬리만 올려 웃는 데드풀의 이마에 입을 맞춘 피터는 좀 있으면 또 다시 빠져버릴 머리칼을 한차례 쓸어 넘긴 뒤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정색했고, 긴장한 얼굴로 있는 데드풀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준 뒤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래서 그웬에 MJ, 메이 숙모까지 쐈다 이거죠?”

 “하지만, 그 정도면 깨어날 줄 알았단 말이야. 메이 숙모를 쏠 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넌 모를걸.”

 “당신이요?”

 “물론, 울지는 않았지. 하지만, 눈에서 땀 정도는 났던 것 같애.”


 장난스럽게 울상을 지어보이는 데드풀의 코를 잡아당긴 피터가 다시 엷게 웃었고, 그를 따라 미소 지은 데드풀이 어느 새 다 회복된 팔로 피터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잘 돌아왔어, 피터.”

 “다녀왔어요, 웨이드.”

 

Posted by Spideypool

시기

썰/덷풀이 2016. 6. 2. 19:09 |

01.


 그가 보기엔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엔 ‘시기’라는 것이 있었다.



02.


 겨울, 언 땅 속에 죽은 듯 보이는 씨앗에겐 봄이,

 봄날, 고개 숙여 초록빛이던 해바라기에겐 여름이 있었고,

 여름 내내 가지 뻗어 푸른빛을 남발하는 과실수들에겐 가을이,

 그리고 사계절 내내 열매라곤 모를 것처럼 푸른 동백조차도 겨울이란 제 철이 있었다.



03.


 그것은 사람도 하등 다르지 않았고, 태어나고 자랐다가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이뤄 아이를 기르고, 노년을 살아가다 죽는, 그런 시기가 있는 법이었다.



04.


 하다못해 빛이라곤 못 볼 것 마냥 땅에 처박혀 사는 매미들조차도 며칠에 불과할 지언정 그들의 때라고 부를 시기가 있는 법이었다. 그들의 이름에 따라붙는 그 시기가.



05.


 그는 한 때 자신이 매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06.


 이 길고 긴 어둠과도 같은 삶이 끝나면 자신의 삶에도 빛이 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때가 있었다. 어둠 속에 있는 시기가 얼마나 길었건 상관치 않을, 그런 때가 오리라고, 그렇게 믿었던 때가.



07.


 그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08.


 그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좁은 우리에 갇혀 같은 자리를 맴도는 줄도 모르고 쳇바퀴를 굴리는, 쥐나, 햄스터, 어쨌든 그런 존재와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09.


 아니. 그의 삶은 그것보다도 질이 나쁜 축에 속했다.



10.


 그 생명체들조차도 때가 있었다. 모든 생명체라면 갖고 태어나는 죽음의 시기가 있었다. 자신에겐 없는, 그 때가.

' > 덷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드풀 전력 60분, 주제 : 꽃_아스포델  (0) 2016.05.14
전력 60분, 외로움.  (0) 2016.05.03
데스와 시간으로.  (0) 2016.04.21
데드풀 전력 60분, 정장_장례식.  (0) 2016.03.27
데드풀 전력 60분, 고양이.  (0) 2016.03.20
Posted by Spideypool

- 피터를 부둥부둥 해줬으니까 덷풀이나 괴롭혀야짘ㅋㅋㅋㅋㅋ

- 쓰면서 들은 노래는 Sing Street의 To find you.


01.


 그는 그 청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02.


 흥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곤 했다.



03.


 자석의 서로 반대되는 극성이 이끌리듯, 자신과 너무 다른 모습에 이끌린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04.


 그리고 그는 자신의 그런 생각들이 틀렸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05.


 싸늘하게 식은 시체는 그의 팔에 안겨 늘어져 있었고, 그의 칼은 골목 안에 즐비하게 쌓인 시체 틈에 섞여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06.


 평소라면 그가 질색할 법한 책임이나 정의, 법들을 떠들어댈 입술은 느슨하게 벌어진 채 마지막 숨을 내보낸 채로 다물어지지 않은 채였고, 깨어진 렌즈 틈으로 드러난 눈에 풀린 동공은,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한 채 벌어져 있었다.



07.


 늘상 부적절한 때에 끼어들곤 했던 그의 박스들조차도 할 말을 잃은 채 침묵하고 있었고, 햇볕 하나 들지 않는 골목 안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는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그는, 여전히 청년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였다.



08.


 새파랗게 변한 입술과 대조적으로 붉기만 한 수트에선 피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그가 농담처럼 말했던 것처럼, 색만 더 진해졌을 뿐 이 젊은 청년의 부상을 철저히 숨겼고, 푹 꺼진 흉부나, 기괴한 모양으로 꺾인 신체부위만이 이 청년이 얼마만큼의 고통을 견디며 고군분투했어야 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09.


 그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때 제 연인이었던 그녀가 그 청년을 되돌려 보내주기를, 아마도 어쩌다 잘못된 길에 들어선 거라며 청년에게 호통을 치며 되돌아갈 것을 명해주기를.



10.


 어느 새 어두워진 거리엔 길을 오가던 시민들조차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영원히 잠들어버린 그들의 친절한 이웃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사실을 아는 유일한 이 또한 그 청년을 따라 여행을 떠난 참이었다. 골목은, 여전히 고요했다.

Posted by Spideypool

 - 저도 가끔은 피터를 부둥부둥 해주고 싶습니다. 아주 가끔은.

 - 쓰면서 들은 노래는 Sing Street의 Up (Bedroom Mix)


 밤의 뉴욕은 아름다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늦은 저녁과 이른 밤이라고 해야 할 시각의 뉴욕은, 환하게 불을 밝힌 건물들이 배경을 만들고, 그 아래로 복잡하게 얽힌 차도를 꽉 메운 차들이 거기에 빛을 더해, 오만가지 색으로 빛나는 중이었다.


 저도 모르게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밤이란 단어가 들어간 노래를 흥얼거리던 피터는 잠시간의 평화도 내버려두지 못하겠다는 듯 치직거리기 시작한 경찰 무전에 집중했고, 사건의 내용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로 주소지가 나오자마자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 있던 건물 옥상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집을 향해 가던 사람들이 그들의 머리를 스칠 듯 낮게 하강했다가 다시 재빨리 솟구쳐 올라가는 스파이더맨을 향해 환호하기 시작했고, 평소와 다른 반응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흥이 나 평소보다 과한 동작으로 사건현장에 도착한 피터는 어깨까지 잔뜩 세워 올리며 어둠뿐이 보이지 않는 골목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와줘요, 스파이더맨!”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막다른 골목 벽을 보고 있던 피터는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는 스파이더 센스에 의아해 하며 돌아섰고, 무언가가 불쑥 내밀어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재빨리 뒷걸음질을 친 뒤 내밀어졌던 물체를 향해 거미줄을 쏘았다.


 “오, 이런.”


 아마도 자신의 마스크 모양이었던 듯한 케이크는, 달라붙은 뒤 거세게 당겨진 거미줄 탓에 엉망이 되어 있었고, 아마도 갸날픈 비명을 질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찰의 얼굴이 낭패감에 물든 것을 보곤 어떻게든 케이크를 원상복귀를 시키려 했지만, 한 번 뭉개져버린 케이크는 제 모양을 되찾기 어려워보였고, 피터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몰라 당황해하고 있을 즈음, 또 다른 비명이 들려왔다.


 “나도 좀 도와줘요, 스파이더맨!”


 이번만큼은 거미줄을 쏘는 대신 고개만 돌려 소리가 들린 곳을 응시한 피터가 스파이더맨 모양의 케이크를 보고 탄성을 내질렀고, 그제껏 울상으로 케이크 판을 들고 있던 경찰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저 친구가 촛불 끄는데 재능이 없어서 구조 요청을 한 거였거든요. 가서 불 좀 꺼주지 그래요, 스파이더맨?”


 어리둥절해하며 골목 밖에 서 있는 경찰을 향해 걸어간 피터는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골목 안쪽 시야를 피해 모여 있는 사람들에 한 번 놀랐다가 맞은편 건물에서 [사랑해요, 뉴욕시의 친절한 이웃!] 이란 현수막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펼쳐지는 데에 다시 한 번 놀랐고, 바로 그 현수막 옆으로 [스파이더맨 10주년 기념 –PLS]에 다시 한 번 놀라야만 했다.


 “어, 그러니까 이건, 어, 기대도 못했던 건데, 그러니까-”

 [꿈이란 소리죠.]


 어느 새 곁으로 다가온 아이가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고, 순식간에 먼지처럼 사라져가는 사람들 틈에서 고개를 숙여 아이와 마주보기 위해 쭈그리며, 피터는, 어느 새 반토막이 난 케이크를 미련 없이 던져버렸다.


 “또 너구나.”

 [네.]


 까맣게 변한 공간에 홀로 남아 피터와 눈을 마주친 아이는 배시시 웃어보였고, 가느다랗게 접힌 눈꺼풀 사이로 녹색의 눈동자가 사라지는 모양새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피터는 옆으로 멘 가방끈을 쥐고 있는 손을 끌어당긴 후 속삭였다.


 “미안해.”

 [알아요.]

 “정말, 미안해.”

 [오빠는 그만 미안해할 줄 알아야 해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오빠가 구할 수 없다는 것도요. 오빠가 없었더라면 살지 못 했을 사람들을 떠올려 봐요. 아마 오빠가 방금 본 사람들보다 더 많을 걸요.]

 “하지만 내가 스파이더맨이 아니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살았을 수도 있지.”

 [더 많은 사람이 잘못된 길로 걸어갔을 수도 있고요. 세상일이란 모르는 거니까요.]


 피터의 손에 잡혀있던 손이 바르작거림을 멈추었고, 어느 새 다정한 미소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울음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인 피터가 입술을 굳게 다물자 한숨을 내쉰 아이가 그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게 바로 오빠라서예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빠, 그 자체여서요. 난 단 한 번도 오빠를 탓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 믿을 건가요?]

 “하지만, 그웬, 네 아버지, 그리고 너까지 나 때문에 죽었어.”

 [아니요. 전 그 빌런 때문에 죽은 거예요. 오빠는 최선을 다했고요. 아빠는 할 일을 하다 돌아가신 거고요.]

 “하지만 네가 내 여자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오빠, 장담컨대 미래의 전 죽는 순간까지도 오빠가 제 남자 친구였던 걸 원망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자랑스러워했을 거라고요. 오빠가 한 모든 일들을 생각해봐요.]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이란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곤 생각 안 해봤어요? 농담이라도 해봐요. 이래서는 오빠가 제가 아는 스파이더맨인지도 모르겠네요. 농담 빼면 시체인 게 스파이더맨 아니었어요? 아니면 내가 보고 있는 게 피터 파커가 아니라-]

 “제발. 그 이야기는 하지 말자.”


 아이의 말에 결국 울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린 피터의 뺨으로 혼자 놀고 있던 손이 와 닿았고, 갑작스러운 접촉에 피터가 몸을 떨자 손을 뗀 아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오빠가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좀 더 죄책감을 버리고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래서는 오빠가 아닐 테죠?]


 아이답지 않은 얼굴로 씁쓸하게 웃은 아이가 피터의 손에 잡혀있던 자신의 손을 빼내었고, 멀리서 밝아오는 빛에 인상을 찌푸린 피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뭐, 그래서 내가 오빠를 사랑하는 거긴 해요. 그런 바보 같은 점에 빠져버리다니, 답도 없는 거죠.]


 저멀리 점으로 시작되었던 점은 어느 새 그들의 발치까지 다가와 재촉하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피터와 눈을 맞춘 아이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사랑해, 피터 파커.]

' > 스파이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역사를 알 수 있는 빌런 소재로  (0) 2016.06.24
the Fall 15  (9) 2016.05.11
the Fall 14  (0) 2016.05.11
the Fall 13  (2) 2016.05.11
the Fall 12  (0) 2016.05.11
Posted by Spideypool

이전 글 : http://cobwebinny.tistory.com/111


01.


 사내의 방문은 늘 그렇듯 급작스럽게 이뤄졌다.



02.


 어쩔 땐 그가 토스트를 먹고 있을 때, 혹 현실에서 그렇듯 사물함에 처박혔을 때 사내는 불쑥 등장해 고개를 들이밀었고, 그 때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꿈임을 인지했다.



03.


 그는, 정신 사납게 떠드는 사내를 볼 때마다 그 사내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의 발현인지 궁금해 했고, 그 때마다 사내는 늘 느닺없는 말들로 그의 정신을 흐트러트리곤 했기에 그는 사내가 자신의 꿈에 등장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그 사내가 실존하는 인물 –얼마 전 만났던, 꿈이란 세계에서 사는 생명체와 같은- 인지 진짜 그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인지 확신하지 못했고, 몇 달이 지나 그 사내와 똑 닮은 인물을 마주하고 나서야 그 사내가 실존하는 인물임을 확신했다.



04.


 현실에서 만난 그 사내와 똑 닮은 이는 또 다른 자신일 거란 말과 함께 아마도 다정하게 대해주라는 말인 듯한 음담패설을 쏟아놓은 뒤 사라져버렸고, 또 다시 그 사내를 꿈속에서 마주한 그의 아는 체에 사내는 입을 꾹 다문 뒤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갑작스럽게.



05.


 그 이후로 그 사내의 방문은 없었다.



06.


 꿈속에서 갑작스런 소음이 들릴 때면 그는 그 소음이 난 방향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실망해야만 했고, 이내 자신이 왜 실망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만 했다.



07.


 사실, 그 사내가 그의 꿈속에서 하는 일이란 하잘 것 없는 것들뿐이었다.


 토스트를 먹고 있는 그에게 대뜸 치미창가나 타코, 팬케이크를 내민다거나, 꿈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괴롭히고 있는 불량배들을 흠씬 두들겨 패준다거나, 혹은, 옥상 끄트머리에 앉아 울고 있는 그의 등을 다독여준다거나-



08.


 그가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은 것은 사내가 모습을 감추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였고, 그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방문을 마치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문을 연 닥터 스트레인지는 침착하게 꿈속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을 그에게 일러주었고 방법을 알려준 뒤에도 몇 번이고 무언가 말을 이으려다 다문 뒤 그저, 잘해보란 말만을 남긴 뒤 그의 등을 떠밀었다.



09.


 그는 이제 매일 밤, 잠드는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0.


 수없이 펼쳐진 문들 중에 사내가 있을 법한 문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그는 여전히 열리고 닫힌 문들이 있는 복도를 헤매고 있다.




11.


 열린 문들에서 피터 파커의 문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12.


 그의 머리칼을 닮은 색의 문만 골라잡아 여는 그의 앞엔 늘 피터 파커가 있었고,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여리고 어린 피터 파커를 사랑했다.



13.


 정확히는 그 피터 파커가 가진 수많은 가능성과 수많은 나날들을.



14.


 여전히 닫힌 문들은 늘어가고 있었고, 여전히 열려 있는 문들 중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피터 파커는 그를 꿈속의 허상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듯 했지만, 그에게 있어선 그 또한 반가운 일 중 하나였다.



15.


 그는 더 이상 피터 파커에게 중요한 누군가가 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의 잔상에 불과한 그들을 그 연인과 동급에 놓을 법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16.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살아있는, 피터 파커를 보고 싶어서 벌인 일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 뿐일 터였다.



17.


 그 수많은 피터 파커들 중에 자신의 피터 파커와 같은 이는 존재할 리가 없었고,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이 또한 그의 연인, 그 피터 파커 하나 뿐이 없을 테니까, 그들 중 하나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18.


 그런 그에게 그의 정체를 알아냈다며 신이 나 떠드는 어린 피터 파커의 말은 사형 선고와도 같았고, 박스들조차 침묵한 상태에서 패닉에 빠졌던 그는, 거기서 빠르게 도망쳐 나왔다.



19.


 마치, 연인에게 불륜 행각을 들킨 사내의 몰꼴로, 그렇게.



20.


 그는, 더 이상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피터 파커를 찾지 않았다.




21.


 길고 긴 나날 끝에 찾아낸 사내는,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20대 청년에게 들러붙어 수다를 떨고 있는 중이었고, 귀찮은 표정으로 사내를 떨궈낸 청년이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을 본 그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22.


 너스레를 떠는 목소리와 달리 축 쳐진 어깨, 그리고 조금은 느려진 발걸음 따위에 우울해진 그는 청년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두 손에 얼굴을 파묻는 사내의 모습에 자신이 봐서는 안 될 모습을 봤단 생각에 뜨거워지려는 얼굴과 어서 자리를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과 달리 자꾸만 그 사내를 향해 돌아가는 시선을 갈무리하기 위해 애쓰며 그 곳을 빠져나왔고, 언제부터 울리고 있었는지 모를 알람을 끄고 나서도 한참 동안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23.


 다음날,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여전히 자신을 닮은 사내들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사내를 본 그는 이내 그 사내가 자신이 아니더라도 자신과 닮은, 아니 아마도 다른 세계에서 자신일 피터 벤자민 파커라면 그게 누구건 간에 상관치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내 분노했다.



24.


 그 수많은 피터 파커는 되면서 왜 나는 안 된단 말인가. 왜.



25.


 그는 더 이상 그 사내의 무시 아닌 무시를 참지 않기로 결심했고, 다른 때보다 이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수면제 세통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지만, 아마도 거미 유전자가 알아서 할 터였다. 아마도.



26.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을 한 청년과 사내의 틈을 파고 든 그는, 마스크를 쓰고 있음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내의 모습에 흡족한 기분을 느꼈고, 패닉에 빠진 청년을 힘껏 밀친 뒤 사내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27.


 변명이라도 좀 해보시죠.



28.


 사내는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이 절망과 실망, 그리고 좌절로 물들어갈 때쯤에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온 이야기들은 그의 심장을 뒤흔들기에 충분했고, 마스크가 벗겨진 사내의 얼굴은 너무나도 슬퍼보여서, 그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한 채 자신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사내의 입에서 끝끝내 나온 말을 들어야만 했다.



29.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30.


 어느 새 내리기 시작한 비가 둘 사이를 가르고 땅을 후들기기 시작했고, 천천히 그에게서 등을 돌린 사내는 또 다시 사라졌다.




31.


 언제부터인가 급속히 빠른 속도로 닫히기 시작한 문 앞에 선 그는, 그의 그림자에 색이 짙어진 문을 쓰다듬어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32.


 생각할 것도 없이 ‘그’ 피터와의 만남 이후로 문이 닫히는 속도는 눈에 띄게 빨라져 있었고,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한 그가 해결방법을 찾기도 전에 문들은 그의 발 앞을 가로막고 서고 있었다.



 33.


  이유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이유를 안다고 해서 막을 방안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34.


 그는 이 세계에 온 이래 처음으로 자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했고, 자신의 등 뒤를 지겹게 따라붙는 상실이란 단어를 저주했다.



35.


 어느 날 밤 꿈에서 평소와 다르게 잔뜩 흥분한 또 다른 피터 파커에게서 다른 세계의 피터 파커를 만났다는 소리를 들은 그는, 처음엔 인상을 찌푸리다 이내 거센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뒤늦게 깨달았고, ‘그’ 피터 파커가 그를 안다고 한 이후 내내 발걸음하지 않았던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36.


 꺼멓게 죽은 문은 마치 그가 찾을 줄 알았다는 듯 안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고 옥상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아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어린 피터 파커를 발견한 그는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37.


 이제야 오네요.



38.


 흥에 겨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넨 피터 파커는 단숨에 그의 앞까지 달음박질 쳤고, 그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에 샐죽 웃더니 입을 열었다.



39.


 난 당신이 그 전에 누굴 사랑했고, 왜 날 찾았는지 상관없어요. 당신이 내 꿈속에서만 연인이래도 상관없고, 몇 명이랑 놀아나건 상관치 않겠어요. 하긴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죠, 안 그래요? 거미집을 터는 건 귀찮죠. 들러붙기도 하고. 가끔은 물리는 일도 있고요. 하지만, 피터 파커잖아요.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며 살인이라면 질색을 하는 그, 피터 파커요. 살아만 있다면 기회는 몇 번이고 되찾아 올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난 내가 몇 번이고 반죽음이 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누군지, 왜 날 찾는지 상관치 않을게요, 다만-


40.


 그들보다 나를 더 사랑해줘요.

Posted by Spideypool

01.


 그에게 있어 상실이란 익숙한 단어였다. 비단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혹은 친구를 잃는다거나 누군가의 죽음이 아니라 그 상실이란 단어는 때때로 자신의 기억, 장기에도 들러붙었으며 너무 긴 세월동안 이어진 상실 탓에 그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그 ‘상실’이란 단어가 없었던 때를 잊은 지 오래였다.



02.


 상실이란 단어는, 그의 삶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였고, 아무 때나 찾아와도 놀랍지 않을 동반자였기에 그는, 그 치의 방문을 달가워하지는 않을지언정 밀어내거나 막을 시도조차 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0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터 파커에게만은 그 단어가 들러붙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04.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끈덕진 인사는 기어코 그, 피터 파커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져버렸고, 그는, 피터 파커가 사라진 세상에서 자신이 그 상실이란 단어에 들러붙기로 결심했다.



05.


 그 일은, 아주 쉽고도 어려웠으며 수많은 것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살아있는’ 피터 파커를 잃은 그에게 그 모든 것들은 한낱 추억 나부랭이에 불과했고, 그 것들 중 그에게 ‘살이있는’ 피터 파커를 되찾아 줄 수 있는 것은 전무했기에 그는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 모든 것들을 가뿐히 떨쳐낸 뒤 새빨간 색 버튼을 눌렀다.



06.


 하지만, 세상만사가 그에게 늘 그렇듯, 혹은 새빨간 버튼이 늘 그렇듯, 행동엔 대가가 따랐고, 그에게 있어 그 대가란 그가 머물 수 있는 곳은 꿈에 국한된다는 것이었다.



07.


 그는, 그 꿈들을 통해 ‘살아있는’ 피터 파커들을 만날 수 있는 데에 만족하기로 했다.



08.


 이제 그는, 모든 세계의 ‘살아있는’ 피터 파커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09.


 하지만 상실이란 단어는 여전히 그의 그림자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닫힌 문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그는 절망했다.



10.


 그는, 여전히 열린 문을 찾아 꿈속을 헤맨다.


 

Posted by Spideypool